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51화 (51/200)

황혼의 살인자. 51. 포식자들의 밤 1.

51. 포식자들의 밤 1.

“지역구에서 난리가 난 건 둘째 치고 윤리위회부가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심각한 걱정을 담은 얼굴로 말하는 자, 마주 앉은 원희철의원의 눈을 양석훈은 읽어냈다. 가늠하고 계산하는 눈이다. 양석훈 자신이 이제 어떻게 될지, 국회의원으로서 정치인으로서의 명운이 끝장날 것인지에 대한.

“언론 쪽은 귀신사건으로 수그러들긴 했지만 여성단체 등에서 여전히……”

“난 안 죽어.”

단호한 결론을 뱉어 던진 양석훈은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차가운 정종의 맛이 목구멍을 훑어 위장으로 내려가는 느낌, 살아 있음을 만끽하게 해 준다.

지금 이 자리, 고급요정에서 즐기는 인생의 참 맛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절대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양석훈이란 이름 하나로 버티고 지켜온 세월이다.

아직 환갑도 안됐는데,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남았는데, 여기서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대표님의 결연함이야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동영상이 워낙 결정적인 게 돼 놔서 말이죠. 사면초가에 백척간두의 현재 상황을 타개하자면……”

“알고 있으니까 술이나 먹지.”

다시 단호하게 말을 자른 양석훈, 술상을 두고 마주 앉은 원희철은 미간을 옅게 찡그렸다. 이른 저녁을 겸한 술자리다. 이렇게 술친구를 해주는 일은 이제 없을 지도 모른다. 증거가 워낙 확실해 이건 빼박이다.

‘그러게 아랫도리 간수를 잘했어야지.’

속에서 치미는 욕과 짜증을 원희철은 술잔과 함께 넘겼다.

그렇게 미련을 버렸다.

당대표인 양석훈은 이제 끝났다.

의원 배지를 떼야하고 정치인으로선 사망이다.

호텔동영상은 지금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다.

‘그건 누가 봐도 강간이지.’

동영상을 떠올린 원희철은 갑자기 여자 생각이 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걸 누굴 탓하겠나.’

솔직히 양석훈이 당한 일은 재수가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자신도 여자야 생각날 때마다 품는다. 그렇지만 양석훈 같은 일은 안 생긴다.

안 당한다. 확실하게 뒷마무리 한다.

근데 양석훈은 그게 아니다.

강간한 거다.

‘다섯 번이나 끌어내서 그 짓거릴 했으니 강간하는 걸 즐긴 거지. 불독처럼 늘어진 저 볼 살에 든 게 탐욕만이 아니라 더러운 음심도 든 거야.’

빈 술잔을 스스로 채우며 원희철은 양석훈을 힐긋 거렸다. 그 시선을 느낀 양석훈이 눈에 힘을 주는 걸 알고 얼른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 개 대가리 새끼가……!’

양석훈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참았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위하는 척 따라와선 저런 눈길을 던지는 원희철, 저 커다란 대가리와 넙데데한 안면을 박살내주고 싶다. 눈빛을 보니 이젠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개 같은……!’

술잔 쥔 손을 부들거리며 양석훈은 고개를 숙였다.

안주가 화려하게 차려진 술상, 그 빈곳을 응시하며 현실을 곱씹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다.

안다, 누구 잘못도 아닌 내 잘못이다. 그런데 정말 재수가 없다.

‘그년이 호텔에서 동영상까지 찍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식으로 반격을 준비할 줄 예상 못했다. 다섯 번을 찍어 누르는 동안 언제나 반항했지만 그 맛에 더 자빠뜨리고 싶었다.

여태 겪은 년들하곤 다른 거다, 그런데 달라도 정말 확실하게 달랐다.

‘요즘 것들.’

그 말이 주는 의미가 뭔지 이제 확실하게 알았다.

절절하게 겪고 있다.

권위와 힘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지난 세대와는 정말로 다른 신인류다.

‘정말로 온누리그룹이 배후인 건가?’

쥐고 있던 술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양석훈은 그 부분을 더듬었다.

국회정보위 소속 진도경의원이 넌지시 전해 준 정보다.

국정원으로부터 흘러나온 이야기라는데, 사건을 터트린 뒤에 온누리그룹이 있다는 이야기다.

‘귀신사건으로부터 세간의 이목을 돌리기 위해서……’

진도경의원이 전한 이야기의 결론은 그거였다. 오늘도 새로운 살인사건이 일어나 충격을 주는 귀신사건, 그 중심에 온누리그룹이 있는 거다.

‘한대건회장의 막내아들이 귀신장철의 손녀를 해친 놈 중 하나.’

한진수라는 애새끼다.

제 아버지만 믿고 안하무인이던 미국국적의 애새끼.

그 새끼가 마약에 취해 어린 아이를 차로 치었다.

윤진건설의 아들 윤완규차다, 그런데 그 사건에 또 다른 내막이 있다는 게 포인트다.

‘세경.’

흡혈귀영감, 고종환회장의 딸이 있다.

그 아이도 차에 함께 타고 있었다는 거다.

고초희란 이름의 이십대 아가씨다.

알려진 건 그게 전부다. 사진 한 장 외부로 드러난 게 없다.

그런데 귀신장철은 찾아내 응징했다.

‘언론에 제보된 내용이 진실이라면.’

세경은 부인하고 있다. 아무 관련 없으며 고초희는 모처에 안전하게 잘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게 어디고 어떻게 잘 있는지 확인해 주진 않았다.

‘내 문제는 고회장만이 해결할 수 있어.’

거듭 술잔을 넘긴 양석훈은 확신했다.

살아날 길을 그것뿐인 거다.

온누리그룹에서 터트렸다면 그걸 수습하도록 해줄 존재는 고회장 뿐이다.

현재 상황을 정부와 논의할 수는 없다.

정부는 이미 고갤 돌려버렸다.

‘내가 어떻게 대통령을 만들어줬는데……!’

부득 소리가 양석훈의 입에서 나온 순간 원희철이 반응하며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정확하게 같은 찰나에 폰이 울었다. 메시지 알림음이다.

‘응?’

폰을 확인한 양석훈은 눈썹을 세웠다.

[회장님이 시간을 내셨습니다.]

전혀 모르는 번호다. 그런데 내용은 알겠다.

세경개발에서 온 대답이다.

고종환회장과 만나길 원한다는 양석훈 자신의 간절한 청에 답이 왔다.

“어? 일어나십니까?”

벌떡 일어서는 양석훈을 따라 일어선 원희철은 물었다.

“다 저녁때 어딜 가시려고요?”

차가운 시선으로 양석훈은 대답했다.

“당연히 저녁약속 아니겠나? 천천히 들고 가라고.”

찬바람 나게 돌아서 방을 나가는 양석훈을 보며 원희철은 인상만 구겼다.

* * *

“후, 피곤하다. 피곤해.”

뒷목을 주무르며 차에서 내린 고재춘은 문득 인상을 구겼다.

정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돌아보고 작게 한숨 쉬었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니 짜증이 치민다.

이젠 정말로 새 차가 필요하다.

‘이 벤츠처럼.’

마이 바흐, 가끔은 오늘처럼 손수 운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새로운 여자를 품을 때처럼 설레고 뿌듯하다.

그거다, 새 여자가 필요하다.

세 번이나 결혼했지만 새로움을 찾는 갈증은 여전하다.

‘호사에 겨워서 바가지나 긁어대는 년.’

거실에 앉아 있는 세 번째 아내는 나이 차이가 열여덟 살이나 난다.

처음엔 그 젊은 싱그러움이 좋았다. 그런데 이젠 삼십대 후반이다.

젊은 냄새는 어디에도 없다. 고재춘 자신의 일거수일투족만 감시하고 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겠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고재춘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아내가 고리 눈을 뜨고 감시해도 할 건 다하고 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낙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그걸 제지한다면 더 살 수 없다.

이젠 정리해야 할 때다.

‘이젠 그냥 홀가분하게 혼자 살까?’

계단을 향해 걸음을 내던 고재춘은 문득 떠오른 얼굴에 멈칫했다.

‘초희.’

이복여동생 고초희, 그녀의 얼굴이 생생하다.

제 엄마를 닮아 어려서부터 예뻤던 그녀는 지금 병원에 누워 있다.

안면은 알아볼 수 없게 됐고 머리엔 칼이 박혔었다.

숨을 쉬고 있지만 다신 본래대로 돌아올 수 없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또 부지 간에 중얼거림을 뱉은 고재춘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둠이 내린 하늘, 그 속에 그날이 보인다.

저항하다 죽은 듯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이복여동생, 그 눈이 저랬다.

텅 비고 어두운 저 하늘같았다.

“씨발.”

신음 같은 욕을 뱉은 고재춘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냈다.

주차장에서 정원으로 올라갔다.

연못 옆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거실엔 불이 켜져 있는데 커튼이 내려져 있다.

보나마나 아내가 술잔을 쥐고 있을 터다.

‘열어줄 생각 같은 건 없겠지.’

현관 키패드에 손가락을 댄 고재춘은 조용한 정황으로 인지했다.

집엔 아내 혼자뿐인 거다. 가사도우미들도 정원사도 다 보낸 거다.

고재춘 자신과 한판 뜰 생각으로다.

그래봐야 제게 남는 게 없을 텐데 이런다.

띠리리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구두를 벗고 거실로 올라선 고재춘은 좌우를 돌아봤다.

무드등만 켜진 거실엔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방에 있는 거냐?’

안방 쪽을 노려본 고재춘은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그대로 양복을 벗어 소파에 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안방 욕실을 사용하지 않은지가 꽤 됐다.

“우.”

뜨거운 물을 머리에 맞으며 피곤을 밀어낸 고재춘은 거품을 내며 개운하게 몸을 씻었다.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와 이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에서 스킨과 로션을 바르며 향을 음미했다, 다시 나와 위스키를 찾았다.

“음, 좋아.”

개운하게 씻은 후에 한잔하는 맛은 일품이다.

잔을 들고 아래층 거실로 다시 내려갔다.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잔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누가 찾아왔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현관에 신발도 있었다.

‘손님 거?’

여자들이 신는 스니커즈였다, 아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신발이 아직도 있으니 방문자도 아직 있다는 소리다.

‘뭐야? 방에서 뭐하는 거야?’

사람이 왔는데 라는 짜증 섞인 소리를 흘려내며 고재춘은 계단을 내려갔다. 거실 우측의 안방을 향해 소리 내 걸어갔다.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뭐하는……”

고재춘은 얼어붙었다. 숨을 멈췄고 눈동자를 경직했다. 그렇게 방안을 봤다.

흔들의자에 전깃줄로 묶여 있는 아내, 처참하게 난자돼 있다.

바닥은 핏물로 흥건하다. 그 피 속에 회칼 한 자루가 덩그마니 떨어져 있다.

“이제 왔네.”

안방 화장실에서 나오는 여자, 자신을 향해 던지는 목소리에 고재춘은 경직에서 깨어났다. 여자의 얼굴을 보고 경악하는데, 여자가 뭔가를 쐈다.

테이저건의 전기충격 속에서 고재춘은 허물어졌다.

* * *

옥상을 지나가는 바람, 그 어루만짐과 숨소리를 장철은 느끼고 들었다.

이젠 더욱 정밀해지고 확연해진 감각.

이 감각이 상대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해주고 공격을 예측하게 해준다.

깊은 곳의 부름에 답한 결과다.

“후우.”

긴 숨을 내신 장철은 가상의 적들을 세워놓고 움직였다.

좌측에서 칼을 후려 오는 적을 스치듯 피하며 그 목에 나이프를 긋고, 우측에서 권총을 발사하는 적의 손목을 휘감아 돌며 겨드랑이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저격은 그 순간 이뤄졌다.

뒤통수를 뚫기 위해 날아오는 저격총탄의 운동에너지를 피해 고개를 틀었다.

화끈하게 뒷골을 지나가는 죽음을 밀어내는 움직임으로 손발을 내질렀다.

달려드는 적들의 형상을 깨부쉈다.

* * *

“옥상에서 운동하시는 거 아녜요?”

아주 조심스럽게 묻는 미쓰리의 눈을 조웅은 무덤덤하게 응시하고 대답했다.

“맞아, 근데 움직이는 소리가 하나도 안 나지?”

고개 끄덕이는 미쓰리에게 까놓은 군밤을 건네며 조웅은 뒷말을 냈다.

“귀신이라서야. 귀신이 소리 내면 귀신이 아니지. 누구든 귀신에게 걸리면 소리 없이 죽는 거고. 귀신보다 강한 존재는 없어. 최상위 포식자지.”

어깨를 경직하는 미쓰리의 반응을 무시하고 조웅은 속엣말 하듯 중얼거렸다.

“귀신을 기다리는 놈들, 귀신이 찾아가면 다 먹히는 거야.”

군밤을 입에 털어 넣은 조웅은 우적대며 씹어 먹었다.

* * *

‘왜일까?’

차문을 열지 않은 채 최재우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래도 되나 싶게 이른 퇴근을 한 날, 엄밀히 이른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퇴근한 거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아파트 주차장에 이러고 있다.

‘무슨 이유로 남규덕을 죽인 걸까?’

언론 제보자, 묘령의 여자, 사건 초기부터 들여다보고 있던 존재.

그녀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가늠이 안 된다.

홍형사의 말대로 유희라고 밖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럼 정말로 유희였을까?

“후아.”

한숨을 내쉰 최재우는 문득 동물의 왕국을 떠올렸다. 약육강식의 세상.

“포식자인 거냐?”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향해 중얼거림을 던진 최재우는 그를 떠올렸다.

귀신 장철.

그야말로 진정한 포식자라는 걸 알고 있다.

그의 숨이 들린다.

“으.”

고개를 흔들어 모든 생각을 털어낸 최재우는 차문을 열고 나갔다. 내일은 형제보육원 출신들을 전부 만나봐야겠다는 계획으로 걸었다. 그러며 밤하늘을 봤다. 아파트 위로 펼쳐진 하늘, 포식자의 눈처럼 깊고 어둡다.

스르르 시선을 내린 최재우는 아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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