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53. 적막 속의 비명.
53. 적막 속의 비명.
새벽 4시가 막 넘어갔다. 하지만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창밖의 저 어둠과 적막은 육중한 무게로 시야를 사로잡고 있다.
산의 숨결이 만들어낸 무게, 바라보는 이 가슴의 무게만큼이나 헤아리기 힘든 무저갱이다.
‘귀신, 오늘도 안 왔구나.’
한대건은 위스키 잔에 술을 채웠다.
밤을 새워 귀신을 기다렸지만 오늘도 이렇게 흘러간다.
이젠 저 어둠과 적막을 보며 술병을 비우는 게 습관이 됐다.
귀신을 포기하고 잠자리에 든 게 3시, 하지만 못 잔다.
‘아들놈을 미끼로……’
새삼스레 자신의 결정에 대한 회의와 가책을 한대건은 삼켰다.
비정하고 잔혹한 짓인 거다.
그런 존재라고 언급한 세경의 고종환회장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 해야 한다. 귀신을 잡을 방법이 된다면 뭐든 해야 한다.
‘미안하구나, 진수야. 놈을 잡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다. 네 복수를 위해서는.’
손에 쥔 위스키 잔을 입에 대던 한대건은 흠칫했다.
어둠과 적막을 찢는 소리가 들려서다.
열어놓은 창을 통해 새벽 산 공기와 함께 밀려들어온 소리는 분명히 비명이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창가에 붙었다.
‘뭐야?’
처절한 소리, 속을 긁어 울리고 뒷골을 조이는 울음.
‘이게 무슨 소리야?’
부릅뜬 눈으로 창밖을 훑어보던 한대건은 다시 또 소리를 들었다.
정확하게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지만 짐승의 멱을 딸 때 나는 것 같은 소리다.
최후에 터트리는 마지막 토혈 같은 소리, 가슴을 흔드는 울음이다.
폰을 잡은 한대건은 최길준에게 상황을 물었다.
“지금 들리는 게 무슨 소리냐?”
당황함이 없는 전략기획실장 최길준, 현재 상황을 말한다.
-산속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짐승울음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피터윤과 동료들이 소리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순간 산자락 숲속에서 섬광이 보였다. 그게 피터윤과 그 동료들의 액션으로 인해서라는 걸 한대건은 알았다. 소리의 원인을 찾아낸 것이다.
-피터윤이 원인을 찾았습니다.
최길준의 정확한 답을 이어냈다.
-고라니입니다.
한대건은 허탈한 숨을 흘려냈다.
그렇지 않은가 예감을 품긴 했었지만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말로 고라니였다.
저런 울음소리라는 게 새삼 놀랍다.
가평의 산속이라서 더 강력한 감정과 느낌을 준 모양이다.
‘저렇게 처절한 울음일 줄은……’
한대건은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총을 쏜 모양인데 흔적 없이 마무리하라고 해.”
섬광은 분명 총기를 사용한 거다. 고라니가 피를 흘렸을 거고 관통한 총탄은 나무에든 어디든 박혔을 거다. 그런 흔적을 귀신이 보면 안 된다.
-피터윤이 누구보다 잘 알아서 할 겁니다. 그만 주무십시오.
최길준의 담담한 대답, 바로 목소리가 또 넘어온다.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귀신은 반드시 올 겁니다. 놈이 오면 그때가 마지막입니다.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놈을 처단하는 때가 그땝니다.
한대건은 음, 하는 짧고 모호한 반응으로 통화를 끝냈다. 위스키를 넘기고 열어놓았던 창을 닫았다. 하지만 최길준이 권하는 대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창밖의 어둠과 적막을 계속 응시했다. 비명이 다시 들린다.
‘고라니……’
그 짐승이 울어대던 소리, 뒷골을 쭈뼛하게 만들고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울음.
그것은 고라니의 울음이 아니라 다른 뭔가의 울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다른 뭔가가 뭔지 모르겠다.
그 대상과 주체가 뭔지.
“귀신……!”
일그러진 그림의 얼굴처럼 한대건은 안면을 구겼다.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분노의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귀신을 향한, 놈을 생각하면 주체하기 힘든 이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소리치고 싶다.
고라니처럼 울고만 싶다.
한대건은 위스키병을 잡아 입에 박고 벌컥거렸다.
* * *
허공에 떠올라 두발을 버둥거리고 몸부림치는 자.
양석훈의 최후를 고종환은 차분한 눈으로 바라봤다.
태블릿 속의 양석훈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소리 없는, 낼 수 없는 비명, 이 세상을 떠나는 자의 울음이다.
“뒤탈은 없겠지?”
당연한 거지만 이란 눈의 고종환에게 김부장은 고개를 숙였다.
“현장까지 차미경의 차로 이동했습니다. 양석훈도 제 차를 이용해 그곳까지 온 게 고속도로 카메라와 톨게이트 등에 뚜렷이 흔적이 남았습니다.”
고종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부장이 실수를 할리 없는 거다.
현장에 김부장이 들고난 흔적이며 절대 포착될 리가 없다.
그렇지 않을 방법으로 했다.
반면에 양석훈과 차미경의 이동 흔적은 확실하게 남은 거다.
‘양석훈이 차미경을 불러 담판을 지으려다가 살인했다.’
그런 결과인 거다.
어째서 차미경이 양석훈의 부름에 반응해 오산까지 간 건지는 알 수 없는 거다.
그건 경찰이 밝혀내든 만들어내든 해야 할 터다.
어떠하든 결과는 끔찍한 거다.
양석훈이 차미경을 잔혹하게 죽였다.
‘집권여당의 대표가, 삼선국회의원이.’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힐 거다. 과거에나 있을 법한 사건, 정치와 치정이 얽힌, 누구나 내막을 알지만 끝내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사건인 거다.
“온누리측과 차미경이 연결됐던 흔적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어 나온 김부장의 목소리에 고종환은 미미하게 고갯짓했다.
“온누리에서 차미경을 접촉하고 사건을 만든 내막, 은신처를 제공하고 변호사를 제공한 내용 등은 지웠습니다. 차미경의 pc에 있던 메일과 폰의 통화기록 등, 증거가 될 만한 모든 것들을 온누리가 단속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거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고종환은 문득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를 상기했다.
온누리병원 VIP룸이다.
잠 못 드는 이 새벽에 한대건은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귀신을 기다리던 밤은 오늘도 이렇게 지나간다.
“귀신이 움직일 것 같으냐?”
고종환의 물음에 김부장은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가 펴며 대답했다.
“그자의 행동패턴으로 본다면 분명히 가평으로 간다고 판단합니다. 공격을 피하는 자가 아닙니다. 제가 죽을 거라고 확신하면 먼저 죽이는 잡니다.”
“그래, 그런 놈이지.”
그런데 가평에 오늘도 안 나타난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의미.
“귀신에게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움직이고 싶지만 바로 움직이지 못할, 가령 부상을 입은 상태라면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상?”
눈썹을 세운 고종환은 창으로부터 돌아서 김부장을 응시했다.
“그런 보고는 없었잖아?”
의혹과 노기를 품은 고종환의 눈에서 시선을 내린 김부장은 대답했다.
“만일의 가정입니다.”
“그 만일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
“그건…… 합수부에서 모든 걸 다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고종환의 눈썹은 더 높게 올라갔다.
“합수부가 다른 수작을 부린다?”
“확신은 아닙니다. 아디까지나 가정입니다.”
가정, 온누리측은 분명 아니다. 그들은 귀신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부장 네가 그런 생각을 품었을 때는 뭔가 있어서가 아니냐?”
아주 잠깐 망설인 김부장은 입을 열었다.
“이해가 되질 않아서입니다. 귀신 장철이 상대한 자들, 하나같이 살인자들입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은 자들, 제 나라에서 살인을 업으로 살다 도망쳐온 놈들, 그런 놈들이 귀신을 상대로 총까지 사용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부 죽었습니다. 그런 결과치고 귀신은 너무 무사합니다.”
“무사하다?”
“현장에서 귀신의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는 겁니다.”
고종환은 비로소 이해했다.
그렇게 격렬한 싸움을 벌였는데, 총질을 해댔는데 귀신이 상처 입었다는 얘긴 없었다.
정말로 그런 건지 아닌데 안 알려주는 건지 모른다.
후자라면 괘씸한 걸 떠나서 아주 안 좋은 일이다.
“수뇌부가 그렇게 하진 않을 것 같은데?”
고종환의 짐작에 김부장은 바로 반응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검경의 수뇌부라면 그런 생각조차 안할 겁니다. 했다면 중간관리에서 일선담당 쪽일 겁니다. 물론 가능성이고 짐작입니다만, 귀신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차질이 생깁니다.”
심각한 눈빛으로 숨을 뿜어낸 고종환은 혼잣말 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귀신이 부상을 당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부분을 착안해 이미 조치를 취했습니다. 음지에서 의사노릇을 하는 자들에 대한 명단을 추리고 있습니다. 곧 결과가 나올 걸로 생각합니다.”
역시 김부장, 하는 눈으로 고종환은 고갯짓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양석훈이 일은 아침인 거냐?”
차미경을 살해하고 목매달아 자살한 여당대표의 최후가 알려지는 때.
“여섯시 경에 발견될 겁니다.”
고종환은 희미한 미소를 흘려내며 다시 창을 향해 돌아섰다.
* * *
염순례는 부지런히 걸었다.
슬슬 아침이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가노라니 새삼 힘이 솟는다.
이제 청석골은 곧 영업을 시작할 것이다.
준비청소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일하게 되는 거다.
고정 수입이 생긴다.
‘칠십이 다 돼서 어디서 일을 구해.’
그러니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염순례 자신이 벌어야 중학생 초등학생 손녀들을 키울 수 있다.
자식 버리고 간 아들과 며느리년을 욕하는 건 이제 지친다.
손발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벌어서 살아가는 길뿐이다.
“후아.”
청석골에 다다른 염순례는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러며 차들을 괴이하게 봤다. 검정색 대형세단과 주황빛의 준준형 승용차다, 이런 차들이 왜 있나?
“뭐여?”
차들을 지나쳐 청석골 출입문 앞에 선 염순례는 두 번째 괴이한 것을 봤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이다. 도어락과 보조키까지 풀려 문틈이 보인다.
‘얼랴?’
염순례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순간 얼어붙었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으로 들어선 시간, 적막을 깨뜨리는 비명이다.
* * *
호수공원을 뛰어 몸은 달궈진 쇠처럼 열기를 풀어내고 있다.
땀으로 인한 상처부위 걱정은 이제 하지 않는다.
거짓말 같은 치유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결과를 볼수록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음을 절감한다.
“후.”
숨을 뱉어내며 장철은 체육공원 비탈을 올라갔다.
새벽운동을 나온 신도시 사람들이 도는 호수공원과 이어진 체육공원.
이곳에도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지금 달려 올라가는 천왕바위 쪽은 반대편이라 사람이 없다.
‘시간 거의 다 됐어.’
이제 곧 훤하게 밝아질 것이다. 그 전에 운동을 마무리 하고 돌아가야 한다. 달려 올라가며 버피하듯 엎드렸다가 다시 튀어 올라 달리고 또 엎드리고, 무한 반복으로 천왕바위 정상까지 올라가는 움직임, 끝냈다.
“후욱. 훅.”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장철은 바람을 맞았다.
송화가루가 날리기 시작한 봄바람 너머 아침이 보인다.
체육공원과 호수공원, 그 안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과 안 쓴 사람들, 다들 열심이다.
‘무엇을 위해.’
문득 든 그 생각을 장철은 곱씹었다.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진정 무엇을 위해서일까가 궁금하다.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다.
죽음, 누구도 그 결과를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살려고 열심인가 죽으려고 열심인가.
‘뭐든.’
부질없고 헤아릴 수 없는 생각이다, 천왕바위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털어냈다.
오로지 영혼과 몸으로 품고 가야 할 것만 생각했다.
복수, 그 대상들이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이 지쳐 갈 때, 찾아갈 시간은 곧이다.
“기다려라.”
바람 속에 중얼거림을 던진 장철은 돌아서 달려 내려갔다.
* * *
“아 즐거운 아침인데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건 왜일까요?”
책상머리에 앉자마자 한숨을 내쉬는 유지건을 송치호가 째려본다. 홍인구와 통화를 하던 중이라 뒤통수를 치지 못하는 게 한인 것 같은 눈이다.
“오늘 할 일은 형제보육원 출신자들 만나보는 거죠?”
유지건의 시선을 받은 최재우는 책상 위 파일을 펼쳐보는 걸로 대답했다. 합수부에서 이미 조사한 내용, 그러나 이 속에 든 진실을 캐내야 한다.
‘별관의 비밀치료. 미국인들.’
어금니에 문 단어들을 씹던 최재우는 박인수의 굳은 얼굴을 발견했다. 인사하려고 일어나기도 전해 다가온 그가 말하는 내용은 엄청난 것이다.
“자유겨례당 대표 양석훈이 죽었다.”
유지건과 송치호까지 경직하며 얼빠진 표정일 때 박인수는 뒷말을 이어냈다.
“성폭행으로 고소한 차미경을 살해하고 목을 매 자살한 걸로, 그렇게 발견됐다. 현장은 오산 외곽의 카페겸 게스트하우스다. 청소부가 발견했지.”
최재우는 피부에 돋는 소름을 느꼈다.
직감했다.
이건 음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