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55. 소리 없는 아우성.
55. 소리 없는 아우성.
-집권여당의 대표가 성폭행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 자체가 황망한 일입니다. 도덕의식이 부재하고 법질서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결국은 이렇게 비참하고 잔인한 결과로 거듭 충격을……
패널로 나온 시사프로그램의 변호사는 침통한 얼굴이다. 오늘 하루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 자유겨레당 양석훈대표의 살인과 자살이다.
‘뭐가 부족해서.’
속에서 치미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 삼키던 유인주는 날선 목소리에 흠칫했다.
“저런 개새끼들은 몽둥이로 골통을 뽀개서 죽여야 해.”
서슬 퍼런 눈으로 커피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는 이는 802호 여자다.
“저렇게 자살하게 놔두면 절대로 안 되는 거야. 죄 값을 치르고 죽게 해야지. 법이고 지랄이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회실레를 놓고 조리돌림을 하고 매질을 해야 하는 거야. 그다음엔 죽을 때까지 살을 발라 포를 뜨고.”
잔인한 말을 서슴지 않고 뱉는 802호 여자의 눈엔 독기가 가득하다. tv에서 간간히 흘러나오는 자료영상속의 양석훈을 볼 때마다 더 강해진다.
“아유 언니 말하는 거 들으면 어떤 땐 겁난다니까?”
집주인 702호 여자가 짐짓 겁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tv를 보며 모여 앉은 다른 집 여자들도 비슷하다.
때 아닌 커피모임, 이게 얼마 안 있을 부녀회장 선거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지만 유인주는 참석했다.
‘그나마 집에 있는 여자들.’
다과를 들며 수다 떠는 아파트 여자들, 이 중에 유인주 자신이 제일 젊은 것 같다. 부녀회장 출마가 유력한 집주인 702호를 제외하면 802호 여자가 가장 연장자다. 그래선지 내 뱉는 말이 거침없고 속 시원하다.
“겁나긴 뭐가 겁나? 내가 틀린 말했어? 정치인입네 정부관료입네 기업인이네 하는 것들, 우리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사는 것들, 저것들이 법을 지키고 살아? 지네들은 안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것들이잖아?”
“맞아요, 청백리인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비리를 저지르죠.”
501호 여자가 응수했다. 유인주 자신을 빼면 가장 젊은 여자다.
“드러난 것만 해도 국민들 힘 빠지게 하는 사건들인데 안 드러난 것들은 어떻겠어요? 저 사람들 사는 걸 보면 우리는 왜 사나 싶다니까요?”
“맞아, 그거야. 저것들은 국민들을 위해 봉사한다고 아가리로 외치지만 그게 아니거든. 국민과 나라에 빨대를 꽂은 흡혈기생충들이야. 좌우 진보 할 것 없이 똑같고, 정권교체에 상관없이 사는 공무원들은 더 지독해.”
501호 여자는 또 받아친다.
“이쪽 아니면 저쪽, 선택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우리의 불행이죠.”
“그렇다니까? 그런데 대안정치세력은 없으니 국민들만 계속 당하는 거지.”
분위기를 바꾸려고 702호 주인여자가 입을 연다.
“자자, 정치얘긴 그만하죠. 해도 끝이 없고 결국 싸움만 일어나는 게 정치 얘기잖아요.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는 친목도모, 거기 집중하자구요.”
웃으면 커피잔을 드는 702호를 802가 냉담하게 바라본다.
“자기도 정치하는 거잖아.”
“에? 아유 언니는 무슨 소릴……”
“부녀회장에 출마하려면 현실을 외면하면 안 되지.”
“어머 갑자기 부녀회장 얘기는 왜 해요?”
“뭐가 갑자기야? 이게 사전 선거운동이란 걸 모르고 여기 모인 사람 있어?”
미소를 잃지 않으려던 702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걸 유인주는 봤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로는 부녀회장하면 안되지. 우리 아파트 부녀회를 대표하려면 자기 소신은 확실해야 하는 거야. 뭐가 옳고 그른지, 어떻게 해야 우리 아파트에 이익이고 피해를 최소화 하는지의 판단.”
움찔, 미간 사이를 반응했던 702호가 입을 연다.
“당연한 말이네요. 그런데 뉴스에서 나오는 저런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게, 자기의 정치 소신을 밝히는 게 우리 아파트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몰라서 물어?”
“알면 가르쳐 줘 봐요.”
702호와 802호의 눈싸움, 모두가 숨죽이며 지켜봤다.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둘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분위기다.
“내가 부탁했지? 담배 좀 집에서 피우지 말라고.”
드디어 나온 802호의 목소리, 참고 참아왔던 가슴 속의 말이다.
“아침저녁으로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우리 집으로 올라와서 가득 찬하고 말했잖아? 화장실을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잖아? 이제 더워지면 창을 열고 살 텐데, 그럼 우리집 말고도 윗집들은 전부 피해자가 되는 거야?”
입술을 잘근거리던 702호가 반격한다.
“애들 아빠가 하루 종일 집에서 담배만 피워대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내 집에서 그런 권리도 못 누린단 말이에요? 말나온 김에 해보죠, 언니네가, 802호에서 층간소음을 얼마나 일으키는지 알아요? 쿵쾅거리는 발소리에 가구 끄는 소리, 새벽부터 그러면 얼마나 짜증나는지 알아요?”
802호의 눈썹은 올라갈 대로 올라간다.
“슬리퍼 신고 사는데 무슨 층간 소음이야? 생활소음까지 어쩌란 말이야? 그 정도가 시끄러우면 아파트 살지를 말아야지! 부녀회장은 또 뭐야!”
“어머어머! 왜 소릴 질러요!”
본격적으로 시작할듯한 두 사람, 그 사이로 유인주가 목소리를 던졌다.
“누군가 죽인 것 같죠?”
삿대질까지 하려던 702호와 802호가 시선을 돌렸다.
501호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도 그랬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눈들이다.
“양석훈하고 차미경, 다른 놈들이 죽인 거예요.”
저게 모슨 소리래 하며 커진 눈으로 서로를 보는 여자들.
“저 시사프로그램에서도 의문점을 말하잖아요. 양석훈과 차미경이 비밀리에 저렇게 연락을 주고받고 만날 이유가 없다고요. 미스테리라고요.”
유인주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체 계속 이야기 했다.
“양석훈은 몰라도 차미경은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두 사람이 대포폰을 가지고 있고 그 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의문점이죠. 물론 양석훈 같은 기생충은 당연히 있었을 테지만 차미경은 다르죠.”
“902호 자기……”
“아 제가 말 안했죠? 결혼 전에 경찰이었어요, 남편은 현역이고요.”
물음을 내던 702호는 입을 다물었고 802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찰의 직감이 아니라고 해도 냄새가 진동을 해요. 저 두 사람이 저렇게 비극적인 사건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게 너무 작위적이란 말이죠. 저건 마치 누군가 의도하고 기획한 작품 같아요. 그럴 필요가 있는 자들이……”
유인주의 눈빛에 압도된 여자들은 눈치 보며 찻잔을 들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사건보도365 tv입니다.
유튜버의 과장된 얼굴표정과 눈빛을 보며 한대건은 미간에 내천자를 그렸다. 오산 외곽에서 일어난 참혹한 사건, 그 진실에 모두 달려들고 있다.
-경찰이 진을 친 저곳에 바로 양석훈이가 차미경을 죽이고 자살한 곳입니다. 자, 엄청난 일입니다. 집권여당 대표가 사람을 죽이고 자살했습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 유례가 없는 초유의 사건이죠. 무엇보다 치정살인이란 것이 더욱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동시에 부끄럽게 만듭니다.
고종환회장의 얼굴을 떠올린 한대건은 폰에서 잠시 시선을 뗐다.
-우리 모두가 궁금해 하는 건 진실이죠. 이런 사건이 일어난 명확하고 실체적인 진실. 그걸 파헤쳐 보자는 게 제 목적이고 사건보도 365tv의 존재 이유입니다. 자 그럼 이 참혹한 사건의 진짜 얼굴은 뭘까요?
유튜버의 과장된 목소리에 다시 끌린 한대건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가정을 해봤습니다. 양석훈이가 차미경을 죽인 게 아니라면, 양석훈도 죽임을 당한 거라면? 무슨 소리냐고요? 말그대롭니다. 두 사람은 다른 제 삼자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죠. 왜 그런 헛소릴 하냐고요?
시선에 힘을 준 한대건은 이어져 나온 말을 들었다.
-밤의 여신님으로부터 제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의 여신이 누군지는 다들 아시죠? 네, 귀신 장철의 사건 초기부터 진실을 알린 분입니다. 그분의 메시지가 온라인에 퍼졌습니다. 이 사건은 조작된 살인이라고요.
“밤의 여신?”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뱉은 한대건은 인상을 구겼다. 고종환회장이 꾸민 일, 의도한 대로 흘러가질 않을 것 같아서다. 이번에도 그년이 나섰다.
‘도대체 누구야?’
움켜쥔 주먹을 테이블에 내리치려던 한대건은 최길준의 다가옴에 주먹을 폈다. 한눈에 봐도 최길준의 얼굴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보고하려는 거다.
“무슨 일인데?”
한대건의 눈을 응시하고 시선을 맞췄다가 내린 최길준은 입을 열었다.
“세경 측에 상황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상황?”
“병원에서 고회장이 급하게 이동했습니다. 아들 고재춘의 구기동자택입니다. 김부장 아래의 세경직원들이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고회장 아들 고재춘은 오늘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고회장이 구기동 아들 집에 갔다……?”
한대건은 의문을 곱씹었다.
서초동 세경본사를 아들 고재춘에게 넘겨주었지만 늘 차갑게 대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아들 보다는 딸 고초희를 끔찍이 여기는 거다.
고재춘의 구기동 집에는 거의 출입하지 않았다.
“무슨 상황 같아?”
한대건의 물음에 최길준은 반 박자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짐작하긴 힘듭니다만, 중대상황인 걸로 확신합니다. 고회장측 누군가가 위해를 당했다든지 위중한 상태라든지, 물론 정황상 아들 쪽입니다.”
한대건은 눈을 치떴다.
“귀신에게 당했다고?”
“그건 확실치 않습니다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고회장의 아들 고재춘은 따로 경호인력을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경찰서에 연동된 경호시스템을 갖춘 걸로 압니다. 경비회사는 업계선두고 3분 이내 출동……
“고재춘이 그놈, 제 아비의 말을 무시하고 살던 놈이니까.”
무거운 숨소리를 흘려내던 한대건은 작은 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귀신이 그랬다면…… 고회장 아들놈은 죽었겠군.”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킨 한대건은 최길준을 응시하고 지시했다.
“모르는 척 해라.”
최길준은 돌아섰고 한대건은 창을 보며 일어섰다. 봄 햇빛이 내리치는 가평의 산자락, 해가지고 어둠이 되면 귀신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오너라, 제발.’
산을 지나는 바람은 나무들의 울울한 울음을 빚어냈다.
* * *
방바닥에 늘어놓은 장비들을 하나씩 살피며 장철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카람빗 두 자루.’
영화에 나온 육식공룡의 발톱을 닮은 칼이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모양은 섬뜩한 두려움을 준다.
날빛은 없다. 빛을 반사하지 않게 검게 됐다.
‘파이팅 스틱.’
폴리프로필렌이 재료인 단봉은 그립감이 좋다. 미국 유명회사의 제품이다. 사용자에겐 편리한 유용성을 상대방에겐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거다.
‘잘도 구해주는 군.’
조웅의 능력을 새삼 인지하며 장철은 파이팅스틱을 허공에 휘둘렀다.
가파르게 공간을 가른 느낌이 짜릿하게 피를 데운다.
곧 사용하게 될 터다.
‘카바 나이프.’
미군용의 유명한 나이프, 꺼내서 검정색의 날을 살핀 장철은 만족한 숨을 내쉬었다.
내려놓고 상대방의 준비를 생각했다.
가늠할 것 없이 총기다.
그것도 권총 따위를 넘은 자동소총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총이 필요하면 현장에서 잡으면 돼.’
중요한 건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거다.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
귀신을 기다리고 있을 적들에게 피로감을 주며 시간을 끄는 거다.
긴장과 피로가 누적되다 흐트러지는 한 순간, 그때가 멱을 딸 때다.
‘거의 다 됐다. 우리가 서로 볼 시간이.’
깊은 숨을 들이마신 장철은 문소리에 반응했다. 조웅이 들어온다.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조웅은 폰을 내밀었다. 유튜버가 방송하는 영상이 나온다.
-밤의 여신님이 진실을 말해주셨습니다. 자유겨레당 대표 양석훈이 차미경을 죽이고 제 목을 매단 사건은 조작이란 겁니다. 그런 결과가 필요한 자들이 꾸민 거란 이야깁니다. 엄청난 일이죠, 그럼 그게 누굴까요?
미간 좁힌 장철에게 조웅은 심각한 눈으로 말했다.
“유튜버들이 떠들고 있다. 온라인상에선 이렇게들 말하고 있는 거야.”
밤의 여신.
제보자다. 보이지 않는 눈이다.
그 존재가 던진 폭탄이 터져 불이 번지고 있다.
들판에 번지는 불길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