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69화 (69/200)

황혼의 살인자. 69. 야만시대.

69. 야만시대.

“헤.”

허탈한 숨을 흘려낸 박인수는 꺼져 있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렇게 전원이 나간 상태의 기계처럼 하릴 없이 책상만 지키고 있는 신세가 된 거다.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특별히 하던 일은 없었지만 이젠 배제다.

“그래라, 합수부가 뭐 뜯어 먹을 거 있다고 미련이 있겠냐.”

정말 미련 없다. 합수부는 이름만 합수부지 하청업체고 흥신소다.

그 일도 제대로 못해 고객이 살해당하는 일에 당면했다.

온누리그룹 한대건회장, 그는 이제 불귀의 객이 됐다. 그와 동시에 박인수 자신은 제척됐고.

‘한대건회장 사건 나기 전에 정해진 게 분명하지만.’

앞으로도 합수부의 역할을 기대할게 없으니 실망이나 화가 나진 않는다.

다만 그렇기에 가슴이 무거울 뿐이다.

귀신사건은 누가 해결한단 말인가.

경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데, 검찰도 시늉뿐인데 난망한 일이다.

‘이제까지 손대서 해결하지 못한 사건은 없었는데.’

새삼 미간을 찡그린 박인수는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전기포트를 눌러 물이 끓는 동안 머그잔에 믹스커피를 뜯어 부었다. 그러며 밖을 봤다.

자신이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과장실 밖, 강남서를 차지한 합수부다.

‘다들 물에 뜬 기름처럼……’

하라는 일만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시늉만 하는 거다. 아무도 의지가 없다. 수뇌부가 의지가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저 현실이 귀신을 날게 한다.

‘한대건과 한진수를 한자리에서 죽인 건……’

귀신의 의도로 확신한다.

한진수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애초의 배경이다.

물론 그게 아닐 수 있다.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결과를 배제 못한다.

하지만 귀신이 계획하고 결과 낸 것이라는 예감, 확신이 심장을 조인다.

‘가평, 거긴 분명히 귀신을 상대할 인원들이 있었어.’

아직 합수부의 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지만 최재우와의 통화로 확인했다.

리조트외부의 산자락에서 총격전을 벌인 정황이다.

귀신을 잡으려한 자들, 그들은 성공 못했다. 귀신은 리조트로 침투해 한대건을 죽였다.

‘리조트 안의 온누리 전략기획실 인원들을 인형처럼 부수면서.’

가파른 소리를 질러대는 커피포트 때문에 박인수는 흠칫했다.

코드를 뽑고 끓는 물을 머그잔에 부어 휘휘 저었다.

익숙한 인스턴트커피 맛을 음미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머리에 떠오르는 건 남은 자들의 대응이다.

‘고종환회장.’

세경개발, 그들은 지금 털이 곤두서 있을 것이다.

한대건의 다음차례라는 걸 모를 수 없는 터, 당연한 일이다.

지금 어쩌고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온누리전자 한용수 회장은……’

그가 어떻게 나올지도 궁금하다. 부

친 한대건회장과 가장 닮았다는 인물, 경쟁에서 지고는 잠도 못 잔다는 사람이다.

그는 복수에 나설 것인가?

제 아버지가 한 것처럼 귀신을 잡아 죽이려고 모든 역량을 동원해?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그렇지만 해야 하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일인 거다. 한용수의 마음이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현실은 암울하고 두렵다.

피가 피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다.

끝이 없을 것 같다.

만일 한용수가 귀신에게 죽는 다면 그다음은 누가 또 나설 것인가?

‘무슨 무협영화도 아니고……’

끝없는 복수와 원한.

그것이 만들어내는 피와 죽음의 현실을 박인수는 곱씹었다.

이런 일은 과거 야만시대의 것이다.

그런데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 거다.

그럼 지금은 어떤 시대인 걸까.

‘문명의 탈을 쓴 야만시대.’

그런 시대다.

곳곳에서 살인과 방화와 강절도가 빈발하는 세상.

그런 일이 끊인 적은 없지만 더 악랄하고 강력해져만 가는 세상이다.

살인자들은 추호도 반성의 기미가 없다.

그들은 양떼 속에 사는 늑대들인 거다.

‘누가 양이고 누가 늑대인지 모를 세상이란 게 더 문제지만.’

쓴 것을 삼킨 것 같은 얼굴로 한숨을 내쉰 박인수는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달달한 믹스커피의 맛이 입 안에 퍼졌지만 여전히 목구멍은 쓰다. 꿀꺽하고 삼키며 폰을 잡았다. 최재우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폰을 놨다.

“최팀장, 너희도 이제 신명서로 복귀명령 떨어질 거다.”

허무한 중얼거림을 흘려내던 박인수는 폰의 울음에 미간 좁혔다. 발신번호를 보니 부산의 후배다. 이런 시간에 갑자기 전화한 예감이 곤두선다.

“여 무진아 잘 있었냐?”

부산 남부경찰서 형사과장 고무진은 핵심부터 뱉어낸다.

-형님, 오성파 전두칠이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뭐?”

-그놈만이 아니라 남천파 고래도 서울로 가고 있습니다.

박인수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지금 들은 말의 의미를 되물었다.

“그 새끼들이 왜?”

서울에 왜 온단 말인가?

부산을, 아니 부울경지역을 아우르는 거대조직폭력집단의 보스놈들이 무슨 일로 상경하는가?

그것도 두놈이 동시에?

-예사로운 상황이 아니라서 전화한 겁니다.

그렇다, 예사롭지 않다, 아주 이례적인, 아니 특별한 상황이다.

어떤 특별한 상황인지 모르지만 감이 잡힌다.

남부지역의 대표적인 두 조직 대가리가 서울로 오는 상황, 서울 조직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오는 거다.

‘그래야 할 상황이라면, 누군가 호출한 거라면?’

서울의, 수도권의 조직들이 두 놈이 상경하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둬야 할 상황, 그렇기에 두 놈이 안심하고 올라오는 거라면 말이 된다.

말이 안되는 게 말이 되는 이 상황 뒤에는 조율자가 있는 것이다.

‘호출한 자, 고종환회장.’

그다, 그가 부산의 두 짐승을 불러올리는 거다.

그놈들만이 아닐 거다.

광주에서도, 대구와 대전에서도, 전국에 숨 쉬는 맹수들을 호출한 거다.

‘이 늙은이가!’

예감을 확신으로 이 악문 박인수의 귀에 고무진의 목소리가 다시 파고들었다.

-그놈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형님 쪽에서 주시해야 할 겁니다. 강남서에 합수부가 차려져 있으니까 여력이 없겠죠. 다른 지역서들에 연락해서 공조를 해야 합니다. 그놈들 어디서 뭐하는지 주시해야죠.

걱정과 두려움이 밴 고무진의 당부 아닌 당부, 박인수는 대답했다.

“알았다. 전화해줘서 고맙다. 전화 돌릴 테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예 형님, 그럼.

통화를 마치자마자 박인수는 전화를 돌렸다. 대구와 광주와 대전, 전국 주요 경찰서에 확인했다. 조직들의 동향은 늘 감시하던 터, 예상한 답이 나왔다. 각 지역의 조직 보스들이 서울로 오고 있다. 호출 받은 거다.

“하아.”

땅이 거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박인수는 현실을 곱씹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고 생각했다.

합수부에 보고하거나 서장에게 보고해야 할지다.

그게 소용없는 일일 거라는 걸 알지만 해야 한다.

“귀신을 막아야 하지만 그것들도 마찬가지야.”

그것들, 피를 흘리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짐승들, 그 짐승들을 부리는 것들, 다를 게 없다. 이 사회와 세상을 병들게 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설치게 놔둘 순 없다. 경찰이 알고 움직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뭔가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을 때 하는 거야.’

의자를 밀고 일어선 박인수는 서장실을 향해 바삐 걸었다.

* * *

‘특별치료.’

최재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장철의 집 욕실 거울에서 발견했던 단어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장철을 만든 계기라는 것을 이젠 안다.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럴 틈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부딪치는 수밖에.’

그래서 지금 가는 거다.

경찰청 자문의사인 윤일한박사에게 전화하고 약속을 잡았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프로파일링을 강의하는 교수다. 흔쾌히 만날 것을 수락했다.

어느새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 정문이다.

‘화재사고도 그렇고 가평사건도 내가 비집고 손댈 여지가 없으니까.’

조웅이 세경 측을 엿 먹이고 도주한 신명시 상가 화재는 더 캐볼게 없다.

홍인구형사가 도로와 주변 영상들을 뒤지고 있을 뿐이다.

유지건과 송치호도 그 일에 붙였다.

합수부에서 떨려나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원천의 의문부터 해결하는 거야.’

주차장에 차를 댄 최재우는 윤일한 박사의 교수사무실을 찾아갔다.

가볍게 노크를 하려다가 문득 빈손인 걸 깨달았다.

현안 문제들을 생각하다보니 깜빡했다. 그래서 돌아서는 데 초로의 신사가 다가오며 묻는다.

“최재우팀장님?”

“아 예, 윤일한 박사님이시군요?”

“맞습니다. 내가 윤일한이에요, 자 들어갑시다.”

반가운 미소로 교수실 문을 여는 윤일한, 그 뒤에서 최재우는 쭈뼛거렸다. 하지만 이제 와 빈손을 채울 방법도 없는 터, 그냥 발을 들였다.

“차 한 잔 하실래요? 커피는 늘 마실 테고.”

의향을 묻는 윤일한 박사의 미소에 최재우는 송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녹차 같은 게 있으면 한잔 주십시오.”

미소로 고갤 끄덕인 윤일한은 바로 찻물을 끓였다.

다기에 녹차 잎을 넣고 준비하는 걸 보고 최재우는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티백정도로 예상했는데 제대로인 거다.

전기포트는 금방 물을 끓였고 다기에 부어졌다.

“자 드십시다.”

윤일한 박사가 내주는 녹차를 받아들고 최재우는 비로소 변명했다.

“빈손으로 온 불청객에게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당치 않단 표정으로 윤일한은 미소 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투명한 녹색 찻물을 들이켰다. 쌉쌀한 녹차의 청량함은 온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

“바쁘실 테니까 용건부터 들어봅시다.”

윤일한 박사가 먼저 대면의 이유를 꺼냈다.

“예, 다름이 아니고……”

입을 연 최재우는 잠시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내 목소릴 이어냈다.

“귀신사건에 대해 아실 겁니다.”

윤일한 박사의 눈동자가 빛나는 걸 보며 최재우는 계속 말했다.

“귀신 장철, 그가 어린 시절에 겪은 일에 대해서 의문을 풀고자 합니다. 그는 열세 살 때 충남 서산의 형제보육원이란 곳에 수용돼 특별치료라는……”

최재우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윤일한 박사는 미간을 찡그리기도 하고 눈동자를 번득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단어하나를 말했다.

“채널링이군.”

“예?”

식어가는 녹차 잔을 잡고 한 모금 마신 윤일한 박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최팀장이 만나봤다는 공성훈이란 사람이 말한 겁니다.”

“공성훈씨가 말한……”

뭔지 알았다. 그는 분명 채널이란 단어를 말했다. 그게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윤박사가 채널링이라고 했다.

“채널링이라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윤일한 박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듯 숨을 불어내고 대답했다.

“Channeling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물리학 용어로는 전자가 원자축과 관계없이 결정을 투과하는 현상을 말하죠. 영어권 법률용어로는 ‘책임의 집중’ 이란 뜻입니다. 법률적, 혹은 경제적인 책임을 누군가 떠맡음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이것이 의문의 핵심……”

미간에 깊은 골을 그리고 목소릴 끊었던 윤일한 박사는 다시 이어냈다.

“오컬트 용어로 채널링은 산 사람이 우주 안의 다른 어떤 존재와 접촉하는 걸 뜻합니다. 가령 죽은 사람이나, 신적 존재, 외계인, 심지어는 동물과 영적으로 이어지하는 걸 말하죠. 이와 같은 연구나 행위가 있습니다.”

최재우는 놀람과 당황을 품은 눈으로 물었다.

“그럼, 형제보육원에서 했다는 특별치료라는 게, 후자로 말씀하신 그런 행위라는 겁니까? 사람의 정신을 이용하는, 다른 존재와 접촉하는 일이요?”

그런 게 가능하냐는, 그런 일이 정말로 있냐는 최재우의 반응.

“우리가 사는 세상엔 상식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학생들에게 하듯 윤일한 박사는 설명을 시작했다.

“과학의 영역에서 보면 비과학적인 일들, 그렇지만 일부는 과학의 영역에서 연구되고 증명된 일들, 놀라운 일들이죠. 채널링이 그런 일입니다.”

“아니 그게 정확히 뭡니까? 공성훈씨 같은 사람의 얘길 들어보면 무슨 정신수련 같은 거, 최면술요법 같은 걸로 짐작됩니다만, 왜 그런 일을 수십 년 전 보육원에서 한 건지, 누가 무슨 의도로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은 나도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짐작이 없는 건 아닙니다. 거기 미국인들이 출입했다고 했던가요? 그럼 채널링을 실시한 주체는 그들일 겁니다. 그 시절의 우리나라엔 그런 개념조차도 아는 이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 미국인들이 누구고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혹시 이게…… 영화나 소설 같은데 나오는 무슨 비밀실험 같은 거였을까요?”

품고 있던 뇌피셜을 최재우는 꺼냈다.

“미국인들이 저희 본토가 아닌 우리나라 같은데서 피실험체를 찾아 비밀리에 실행한 거죠. 음 그럼 그래야 할 목적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윤일한은 명료하게 답을 냈다.

“군사목적.”

최재우는 아, 하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고 윤일한은 목소릴 이어냈다.

“나도 짐작일 뿐입니다. 최팀장님 말처럼 영화나 소설에서 보면 늘 그거지요.”

“예?”

“현실적으로도 그렇다는 겁니다.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합니다. 비대칭 전력에 관한 그들의 연구는 공공연한 일입니다. 인간의 정신에 관한 연구는 오래됐죠. 구소련에서도 했던 겁니다.”

“그럼 제 예상이……”

“진실은 내가 답해줄게 아닌 것 같네요.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요. 그 부분에 대해 깊게 연구한 사람을 압니다. 괴짜긴 한데, 소개해 드리죠.”

윤일한 박사가 건네주는 전화번호를 받으며 최재우는 황망한 숨을 들이 내쉬었다. 드디어 꼬리를 잡은 진실의 일각, 그런데 너무 황당하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윤일한에게 진심으로 인사한 최재우는 전화번호를 쥐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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