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83화 (83/200)

황혼의 살인자. 83. 또 하나의 장례식.

83. 또 하나의 장례식.

-이곳 온누리병원에는 귀빈들로 득시글거립니다.

라방을 하고 있는 유튜버의 표정엔 긴장이 여실하다.

-뉴스에서나 보던 얼굴들입니다. 정관재계의 인물들, 소위 말하는 1%,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조문을 왔습니다. 고종환회장에게 애도를 전하기 위해섭니다. 예, 그래야 할 존재가 세경개발의 고회장입니다. 지하금융의 왕, 흡혈귀라는 별명을 가진 장막 뒤의 막강한 실력자인 겁니다.

긴장한 이유를 말한다.

-솔직히 겁이 납니다. 이렇게 함부로 말했다가 후환이 생기는 게 아닌가 말이죠. 세경의 고종환회장과 관련한 루머들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없어지거나 한다면, 여러분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결연한 얼굴로 부탁하는 유투버의 눈을 보고 전도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비루한 새끼.”

죽게 되면 죽는 거지 라는 말을 중얼거린 전도성은 폰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여직원이 출근하지 않아 텅 빈 것 같은 상인연합회 사무실을 새삼 돌아봤다. 생리휴가를 달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던 얼굴이 헛웃음난다.

“우리 때는……”

절로 나오는 중얼거림을 이번엔 삼켰다. 라떼는 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변한 걸 부정할 수 없다. 맞춰 살아야지 옛날 생각만 해선 되는 게 없다.

‘꼰대가 될 뿐이지.’

탕비실로 가 커피를 탄 전도성은 비죽거리고 나오는 실소를 제어하지 못했다.

‘꼰대는 오래전에 됐어.’

피할 수 없는 게 그거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히 되는 거였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다만 언제 그렇게 됐는지를 모를 뿐.

“후.”

커피를 넘겨 뜨거워진 숨을 불어낸 전도성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봤다. 강북구 수유리의 번화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길 건너 강북구청을 중심으로 퍼진 골목길의 유흥가들이다.

‘이 거리도 참 많이 변했어.’

전도성 자신이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새삼스럽다.

‘벌떼클럽.’

그때가 생각난다.

밥 때가 되면 다 같이 비빔밥을 만들어 먹던 시절이다.

주방 아줌마가 있는 재료로 만든 그 밥은 정말 맛있었다.

웨이터와 아가씨들 할 것 없이 다 함께 먹었다.

그 속에 그녀도 있었다.

가희.

‘하은주.’

그게 본명임을 알았다. 형사들이 찾아와서다.

그녀가 귀신과 인연을 가졌다는 것도 알았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 둘은 얽혔다.

‘아이를 낳은……’

귀신과 하은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이름이 장민지다.

그 아이가 낳은 아이가 차에 치어 죽었다.

귀신의 손녀, 그 어린애를 해친 놈들이 죽었다.

귀신이 죽였다. 귀신의 혈육을 해쳤으니 당연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장철……!”

귀신의 이름을 소리 내 말한 전도성은 커피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창밖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뱉은 것과 같은,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그때 그 웨이터가 귀신 너였다는 걸……’

장철이란 이름도 몰랐던 귀신, 그는 세월을 건너뛰어 피를 뿌리고 있다.

혈육을 잃은 복수를 하고 있다.

그 일, 귀신장철의 사건은 이제 엄청난 것이 돼 버렸다.

온누리그룹 한대건회장까지 귀신의 손에 죽었다.

‘흡혈귀영감의 아들까지.’

어금니에 몰리는 힘을 숨으로 풀어낸 전도성은 의자를 돌려 책상 위 폰을 잡았다.

여전히 떠들고 있는 유튜버, 그 목소리가 전하는 현장이 생생하다.

온누리병원 장례식장, 고종환회장의 아들내외의 빈소가 있는 곳이다.

‘한대건회장의 장례식장이 치러지는 곳에 고종환회장의 아들까지……’

지금 진행 중인 현실이다. 모두 귀신 장철에게 살해된 이들이다.

보복살인, 귀신은 자신이 당한 일을 피로서 갚았다.

그런데 솔직히 의문이다.

‘한대건은 그렇다 치고, 고회장의 아들내외를 귀신이 죽였다?’

경찰이 그렇게 발표했고 언론이 말하고 있는 결론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고회장의 아들 고재춘과 그 아내를 귀신이 살해했다는 건 오버 같다.

한 다리 건너. 귀신은 그런 식의 살인을 하진 않는다.

‘고초희 때문에 고종환이 덤벼든 거라면 당연한 거지만 고재춘은?’

고초희와 고재춘은 이복남매다. 세경개발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지만 그 정도는 안다. 고재춘은 고초희에 대해 손톱만큼의 정도 없다. 고초희가 귀신에게 당했어도 그만, 아버지 고종환과는 완전히 다른 거다.

‘그런데 죽였다? 아내까지?’

귀신은 무시무시한 살인을 저지르는 존재지만 불필요한 살인을 하는 자는 아니다. 고재춘과 그 아내의 죽음은 귀신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고종환회장에게 보복하기 위해서란 말은 선을 넘어간 추측이다.

‘온누리그룹의 아들들이 무사한 것처럼, 관계하지 않는 자들은 손대지 않아.’

귀신자신에게 직접 위협이 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은 그렇다.

그러니 고재춘 부부의 죽음은 위화감이 든다.

뭔가 덮어씌운 느낌이다.

거기에 또 이상한 것은 현진 형제와 문형철 검사의 죽음, 너무 공교롭다.

“계성가디언이 그랬다고?”

헛웃음이 나와 전도성은 어깨를 흔들었다.

역시 경찰이 발표하고 언론이 받아 떠드는 내용이다.

현진써큐리티와 경쟁관계에 있던 계성가디언의 박철호대표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그는 현재 검거를 피해 도주 중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

그렇다는 걸 안다. 묻지 않고 듣지 않아도 보인다.

계성가디언은 해오름파에 속한 조직이다.

구천동이 지금 고종환의 호출로 R호텔에 있다.

이 그림을 못 볼 수가 없다. 고회장과 구천동이 휘두르는 붓질인 거다.

‘누가 죽였느냐, 왜 이런 그림을 그리느냐는 모르겠어.’

모호하다. 현진의 오동철은 백운호수에서 귀신에게 당했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밝혀지지 않았다.

동생 오동진은 상계동에게 역시 당했다.

생사의 진실이 묻혀 있던 그들이 문형철의 죽음과 같이 장위동에서 드러났다.

‘귀신의 짓이 아닌 걸로.’

고종환회장의 지시다. 그런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귀신의 소행으로 만들면 편한 것을, 그게 진실인데 진실을 덮고 이러는 이유가 뭘까?

이런 식의 그림은 다른 뭔가를 감추고 덮으려 할 때다.

뭘 가리려는 건가.

‘가려져 있는 또 다른 진실이……’

인기척이 들린 건 그때였다.

사무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온다. 두루마기 차림의 할아버지다.

지팡이를 짚은 구부정한 모습, 그런데 허릴 편다.

* * *

“호텔상황이 변동이 없는지 철저하게 모니터 해.”

폰에 대고 지시한 최길준은 주변을 돌아봤다.

‘이젠 한산하군.’

빈소를 찾는 조문객은 거의 다 끊겼다. 이틀째 아침이 됐으니 내일이면 장지로 간다. 오일장으로 하자는 주변의 주장을 한용수회장이 잘랐다.

‘세경은 이제 시작.’

복도를 돌아가면 나오는 세경의 빈소 앞이 어떨지 눈에 보인다. 같은 층에 빈소를 두는 걸 한용수회장은 못마땅해 했지만 참아 넘겼다. 세경입장에선 온누리의 아래층에 빈소를 마련하는 걸 참을 수 없었을 터다.

‘호텔에 짐승들을 모아놓고 조문을 받는다……’

세경 고회장이 지금 그러고 있다.

호텔엔 여전히 조직 보스들이 있다.

두문불출하는 그들이 가만히 있는 중이란 생각은 순진하다.

귀신을 잡을 준비가 진행 중인 거다.

그래서 호텔 출입자들을 모조리 체크 중이다.

‘야락칭.’

남천파 보스 지경호가 불러들인 짐승들은 파악했다.

몽골인 아홉 명이다. 그들은 몽골현지에서 흉악한 범행을 저지른 자들이다.

조직들을 쓸어버리는 살인마들.

수배를 피해 어떻게 한국까지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물론 남천파가 도왔겠지.’

고래, 얼굴에 칼자국이 흉측한 남천파 보스.

그자는 잔인무도한 인물이다.

고종환회장의 아래 조아리고 있지만 야망을 삭이고 있을 뿐이다.

수완이 좋고 머리가 명민하다는 인물, 이번 일에 흥분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자들도.’

오성파 전두칠, 해오름파 구천동, 그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살수 없는 전 자연의 이치다.

그들은 언제고 충돌할 자들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고종환의 아래 조아린 처지, 속에선 꿈틀거린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지.’

머릿속에서 얽히는 복잡한 생각 속에서 최길준은 귀신을 잡았다.

그가 가평에서 피터윤을 상대하던 광경, 그 영상이 눈앞에 재생된다.

이해할 없는 광경, 그러나 뚜렷한 결과의 모습, 피부에 소름이 다시 돋는다.

‘그런 자를……!’

과연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잡을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귀신의 그 영상은 한용수회장의 지시로 숨겼다. 세경 측은 전혀 모른다.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말 궁금하다, 몇미터 거리에서 총탄을 피하는 귀신을.

‘응?’

최길준은 시야에 들어온 인물을 보며 눈썹을 세웠다. 한용수 회장을 찾아온 남자, 청년과 중년의 사이에 있는, 나이를 추정하기 모호한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자다. 그가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짓고 걸어온다.

“최실장님?”

낭랑한 상대의 목소리에 최길준은 움찔했다.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 손을 내민다.

“반갑습니다. 온누리정신연구소를 맡고 있는 소장 길한수라고 합니다.”

* * *

이영숙이 걱정하는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장철을 염려하는 저 마음이 고맙다.

이런 때에 외출을 했으니 당연한 걱정이다. 하지만 조웅 자신은 걱정하지 않는다.

친구 장철을 알기에, 귀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전도성을 어떻게 할지는 네가 결정할 문제.’

뉴스에 눈을 박은 채 조웅은 장철을 더듬었다. 조폭들이 모인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파악해야겠다는 말에 알아봐주겠다고 했더니 직접 움직인다고 했다. 어디로 짚어 가야할지만 수고해달라고 해 그렇게 한 거다.

‘수유리장사파.’

조웅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 전도성은 그곳을 기반으로 성장해 국회의원까지 해먹었다. 그의 뿌리는 수유리 장사파, 귀신 장철과 조웅 자신이 얽혔던 곳이다. 전도성을 적들이 더듬었을 건 당연한 일, 그래서 갔다.

‘귀신 네가 할 일은 그거고, 나는 내가 준비할 것들을 해야지.’

리모컨을 눌러 TV를 끈 조웅은 엉덩이를 밀고 일어섰다.

* * *

구부정한 노인의 허리가 꼿꼿하게 펴지는 걸 보는 순간 전도성은 알았다.

‘귀신!’

두루마기 차림의 할아버지, 저런 모습으로 귀신이 한 일을 안다. 명륜동 윤진건설에서다. 윤종대를 죽이고 그가 동원한 살인자 놈들을 죽였다.

깨달은 순간 전도성은 움직였다.

책상 서랍을 열고 권총을 꺼냈다.

바람 같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게 맞을 거다.

장전상태의 리볼버를 겨눴다.

‘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시야에서 귀신이 사라졌다.

뭔지 모를 희끗한 잔상을 느끼는데 목이 따끔하다.

뭣 때문인지 들린다.

“해 봐.”

귀신의 목소리, 목에 칼을 들이댄 그가 바로 옆에 서 있다.

“아, 아니……”

뭔지 모를 소리지만 부정의 표시를 내며 전도성은 권총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두려움 속에서 생각했다. 자신이 귀신에게 죽을 짓을 했는지.

없다.

기억을 샅샅이 더듬어 봐도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귀신에게 진즉에 죽었을 거다.

그런데 귀신이 찾아왔다.

뭣 때문에 이러는 걸까.

“왜……”

물음을 낸 전도성은 목에서 칼이 떨어져나가는 걸 봤다.

책상 위, 권총 옆에 놓인다.

침을 꿀꺽 삼키며 순간 생각했다. 권총을 다시 잡을까하고.

“삼십오 년 전에……”

나직한 목소리를 흘려내는 자, 귀신의 얼굴을 전도성은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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