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85화 (85/200)

황혼의 살인자. 85. 불안한 시간의 흐름.

85. 불안한 시간의 흐름.

“자살이라고요?”

황당한 충격 속에서 되물음을 뱉은 최재우는 기억을 떠올렸다.

강북구 수유리, 전도성을 찾아가 만났던 기억이다.

그의 얼굴이 생생하다.

귀신장철에 대한 과거를 이야기 하던 그의 눈은 회한과 두려움에 젖었었다.

-그래, 리볼버 권총을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긴 거야.

무거운 숨으로 다시 목소리를 던진 이, 폰 너머 박인수는 계속 말한다.

-귀신이 한 건 아니야. 그가 전도성의 상인연합회사무실에 들어 왔다 나간 직후,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전도성은 자살했어. 영상에 남았지.

사무실 내 영상과 엘리베이터 영상.

-두루마기차림으로 왔어. 윤진건설 윤종대 회장 때와 같아. 그런 모습을 또 할 거라고, 해가 환할 때 행동하리라곤 아무도 예상 못했지. 더군다나 목표가 전도성일 거라곤 말야. 주변의 인물, 아니 그것도 아닌데.

그렇진 않을 겁니다, 라는 말을 최재우는 속으로 삼켰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그들만이 아는 게 있는 거지.’

무의식적으로 최재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벽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다.

전도성의 사망 시간은 오전 9시 37분이라고 했다.

귀신이 방문했다가 떠나던 시간, 홀로 사무실에 남은 전도성이 방아쇠를 당긴 때다.

-황당한 건 말이야, 처음에 꺼져 있던 사무실 카메라를 전도성이 켜고 자살했다는 거야. 영상을 보면 그게 확실해. 총을 잡으면서 내부 카메라를 켰어. 여직원이 생리휴가 중이었다는데, 혼자 있어서 꺼놨던 거지.

원래 거기 카메라가 있었나? 그런 게 필요한 공간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상인연합회 회의가 잦아서 cctv를 설치했다는군. 나중에 생길 분쟁 같은 걸 차단하기 위해서 말야. 죽자고 결심한 순간 꺼놨던 걸 켠 거야, 왜 그랬는지는 몰라. 그대로 죽었으면 귀신의 소행이 되는 건데 말이지.

“상황 자체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맞아. 귀신이 한 게 아니라 내가 확실하게 자살한 거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 정황이야. 도대체 귀신이 왜 거길 간 거며,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자살한 건지 모르겠어. 삼십오 년 전에 얽힌 뭔가가 있었나?

그런 게 있었다고 해도 이제 와서? 라는 박인수의 의문이다.

“그들만 알겠죠, 그런데 합수부와 본청의 대응은 어떤 겁니까?”

-무대응이 대응인 거지. 전도성의 죽음은 강북서에서 조사하고 마무리 할 거야. 귀신사건으로 확실하게 넣을 것 같으면 발표하겠지만, 아직까지도 안하고 있는 건 이대로 간다는 거지. 그냥 전도성이 자살한 걸로.

해야 할 일에 장애가 되면 안 되니까 란 말을 최재우는 또 속으로 삼켰다.

-정말로 전도성이 제 입에 총구를 넣고 자살한 건 확실한 건데, 어쨌든 귀신이 방문한 것도 사실이지, 윤종대를 찾아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말야. 그런 진실을 덮는 건 필요해서고. 고씨가 꾸미는 일과 관련해서.

고종환회장의 그림, R호텔에 모여 있는 짐승들.

“하아.”

최재우는 부지 간에 깊은 한숨을 뿜어냈다. 현실이 주는 압박 때문이기도 하지만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떻게 이 나라의 치안기관들이 고종환회장 같은 자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건지, 정말 개탄스럽다.

-한대건이 당한 건 당한 거고 라는 자신인데, 내가 볼 때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아.

또 하나의 황당한 현실을 박인수가 말했다.

고종환회장이 꾸미는 일의 얼개다.

가평에서 한대건회장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데도 한단 거다.

다를 게 없는 방법으로다. 물론 그 수밖에 없다는 불가항력이 있긴 하다.

‘귀신을 잡거나 찾을 수가 없으니.’

뜨거워진 숨을 흘려내며 최재우는 물었다.

“호텔 상황은 어떻습니까?”

-강남서에서 경비중이지. 명목상은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조폭들을 감시경계하고, 동시에 고종환회장의 경호를 위해서라는 건데, 개수작이잖아?

맞다. 조폭들은 고종환회장이 불러 모았다.

-그런 모양새를 꾸미면서 귀신에게 오라고 강력하게 손 흔드는 건데, 어떨 거 같아? 귀신이 또 귀신처럼 스며들 거 같아? 구멍을 놔두겠지?

구멍, 귀신이 스며들어 올수 있는 틈, 고종환회장 측이 열어놓을 거란 소리다. 그래야 귀신을 잡는 목적을 이룸이다. 귀신은 알면서도 갈 거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귀신이 가고 안가고가 아니라 호텔에서의 결과가 어떨지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어, 그래, 나중에 통화하자고.

뭔가 상황이 발생한 건지 박인수는 다급히 통화를 끝냈다. 허탈한 눈길로 폰을 응시하던 최재우는 쓴 입맛을 다셨다. 박인수의 처지 때문이다.

‘합수부에서 떨려 나와 하는 일이……’

조폭두목들의 호텔집결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당연히 주시하며 대응해야 하기에 저러고 있는 걸 상부에서도 뭐라고 하질 못한다.

그런데 그게 그림 맞추기인 거다.

박인수 경정이 실질적으로 뭘 할 수가 없다.

‘조폭들이 움직여 사건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이 상황까지도 고회장 측의 의도다. 하찮지만 가시처럼 걸리는 박인수경정을 저렇게 묶어 놓는 거다. 그리고 그건 성공한 것 같다.

“후.”

다시 깊은 한숨을 흘려낸 최재우는 창밖을 봤다.

봄바람에 벚꽃잎이 날리고 있다.

신명서의 살풍경함을 봄이면 화사하게 꾸며주는 고마운 벚꽃나무들, 봄은 이제 절정으로 가고 있는데 현실은 암울하게 흐르고 있다.

‘귀신.’

장철의 얼굴을 그리며 최재우는 눈을 감았다.

* * *

“황철현입니다.”

덤덤한 얼굴로 손을 내미는 남자, 서른 후반에서 마흔 초반쯤으로 보인다.

국정원팀장, 팀원 둘을 데리고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방문이유는 야락칭 놈들 때문, 확실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전화했다.

‘문 앞에 찾아와서 방문한다고 전화를 해?’

무시당한 느낌에 박인수는 옅은 화를 삼켰다. 하지만 속마음을 감추고 황철현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어쨌든 국정원의 움직임은 고무적이다.

“잘 오셨습니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바쁘신데 시간 뺏는 것도 도리가 아니죠. 사진 촬영하신 게 있다면 확인 먼저 할까요?”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그래라, 하는 미소로 박인수는 부하형사에게 눈짓했다.

“여깄습니다.”

사진이 건너왔다. 대로 반대편 R호텔에 들어가는 9인의 몽골인들, 야락칭으로 추정되는 놈들이다. 출입자들을 모두 사진 찍었기에 건진 거다.

“그놈들이 맞습니까?”

황철현팀장은 미간에 내천자를 그린 얼굴로 사진을 들여다봤다.

“모릅니다. 야락칭들은 사진 자료가 없습니다. 범죄현장에서 단편적으로 찍힌 것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들입니다. 실제 얼굴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들이 야락칭이 맞다면 공개된 최초사진입니다.”

어쩐지 어이없는 생각이 들어 박인수는 물었다.

“국정원의 입장과 대응은 어떤 겁니까?”

사진을 뚫어지게 보던 황철현 팀장은 고개를 들었다.

“지켜봐야죠. 야락칭이라는 게 확실해지면 체포할 겁니다.”

박인수는 또 묻고 싶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느냐고, 호텔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아느냐고, 국정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느냐고.

* * *

“전도성을 죽였다는 건 우리한테 손을 들어 보인 거다.”

조문객들이 잠시 끊어진 빈소를 응시하며 고종환은 김부장에게 목소릴 이어냈다.

“귀신 그놈이 전도성을 손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어쨌든 제 존재감을 과시했어. 곧 찾아갈 거니까 기다리라고 하는 거지. 제대로 된 거야.”

제대로, 귀신의 방문.

“귀신이 전도성을 죽인 건 아니었습니다.”

“쯧.”

김부장의 말에 혀를 차는 걸로 반응한 고종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손에 쥔 칼을 그었어야 죽인 거냐?”

맞다. 귀신은 전도성이 제 입에 총구를 쑤셔 넣도록 만든 거다.

어째서 그런 결과가 이뤄진 건지는 모른다.

확실한건 귀신이 전도성을 만난 거다. 그래서 만들어진 결과다.

귀신은 이편의 준비를 어느 정도 눈치 챘다.

“계획을……”

“그대로 하는 거다.”

고종환의 단호한 목소리에 김부장은 움찔했다. 이유가 이어 나온다.

“모가 되던 도가 되던 부딪쳐야 끝날 일이다. 귀신 그놈도 그걸 알아. 놈은 반드시 온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걸 알아. 그러니까 꼭 올 거다.”

결연한 의지, 김부장은 시선을 내리고 무겁게 받아 들였다. 이 현실을 되새겼다. 그런데 이가는 숨을 흘려내던 고종환은 흠칫하며 폰을 잡는다.

“초희냐?”

다급한 긴장으로 전화를 받은 고종환, 이 번호를 전화를 걸 사람은 몇 사람뿐이다. 그 중에 초희일 거라고 확신한다. 귀에 목소리가 박혀든다.

-아빠, 호텔에서 뭐하려는 거야?

고종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 * *

-수유리장사파의 조직원으로 국회의원까지 해먹은 인물이 전도성입니다.

유투버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며 조웅은 인상 썼다. 뉴스에서 제대로 보도되고 있지 않은 사건, 전 국희의원 전도성 권총자살이란 짤막한 기사가 전부다. 그런데 유투버들은 배경을 짚어 말하고 있다.

-권총자살이라는 흔치않은 사건입니다.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총기사고라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다. 미국 같은 나라완 완전히 다른 거다. 그런데 총기사건이 없었냐하면 절대 아니다.

‘우범곤사건 같은 엄청난 살상극도 있었어.’

유튜버는 수유리중심가의 10층 건물을 등 뒤로 두고 떠든다.

-현재로선 관련을 추측하기 힘들지만 절대로 평범한 사건이 아닙니다. 예, 귀신 사건과의 관련성이죠. 왜냐고요? 전국의 조폭보스들이 한군데 모여 있는 현실이다 이겁니다. 역삼동의 R호텔이죠. 왜 모였을까요?

고종환 때문에 라고 조웅이 중얼거리는 데 유튜버는 강한 목소리를 냈다.

-누군가 불러 모았기 때문입니다! 왜 불렀냐고요? 귀신이 무서워서죠! 온누리 한대건 회장처럼 당할까봐서요! 그게 누군지 다들 아실 겁니다!

유튜버는 제 흥분에 취해 더욱 소리 높인다.

-엄청난 일 아닙니까? 전국의 조폭보스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겁니다!

이어내는 말은 전도성의 자살과 귀신의 연관성에 대해서다.

-전도성은 조폭출신입니다. 그가 R호텔에 모인 보스들과 접촉했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귀신은 그걸 알고 전도성을 봐버린 거죠. 이게 무슨 뇌피셜이냐고요? 예, 뇌피셜 맞습니다. 밤의 여신님 전언이 아닙니다.

유튜버는 자신 있게 뒷말을 낸다.

-순수하게 제 생각과 예측입니다. 제 눈엔 그렇게 보입니다.

그냥 추측과 예단이라고 말하면서도 저렇게 당당하다니, 조웅은 한숨 쉬었다. 누가 들어도 허술한 이야기여서다. 그런데 핵심을 짚은 건 맞다.

‘저런 이야기들이 더 영글기 전에……’

장철은 행동 할 거다. 전도성을 찾아간 것으로 이미 시작했다.

‘끝내야지.’

폰을 내려놓고 긴 숨을 흘려낸 조웅은 이영숙을 돌아봤다. 씽크대에 붙어서 저녁거리를 준비 중이다. 불안한 눈을 감추고 버틴다. 안전한 곳을 찾아서 안돈시켜줘야 하는데 계속 이렇게 같이 있다. 하지만 머지않았다.

‘그때가 되면……’

이영숙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웅은 뉴스를 틀었다.

* * *

“전도성?”

찌푸리듯 좁아진 한용수의 미간을 응시했던 최길준은 입을 열었다.

“고회장이 부른 조직들과, 고회장 측과 접촉이 있었던 걸로 판단합니다. 귀신에 대한 정보를 줬을 겁니다.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겠지만, 전도성이 가지고 있던 다른 부분들이 있다면이란 일환이었을 걸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귀신이 전도성을 죽였다?”

“확실치 않습니다. 전도성을 찾아간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모호합니다. 고회장측의 대응에 대한 인지로 반응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던 건지……”

“그래, 귀신은 직접 손을 쓰지도 않았지.”

전도성의 권총자살, 결과를 곱씹으며 최길준은 눈동자에 힘을 실었다. 한용수가 디디고 선 휴게실 바닥을 노려보는 시야에 귀신이 어른거린다.

“길소장과 인사했다고?”

흠칫하며 시선을 든 최길준은 이어 나오는 말을 들었다.

“길소장이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야.”

옆모습을 보이고 있던 한용수는 최길준을 향해 똑바로 섰다.

“귀신은 우리가 잡게 될 거야.”

한용수의 입가에 퍼지는 미소, 차가운 한기를 풀어내는 웃음 앞에서 최길준은 소름을 돋워 올렸다. 이 기이한 느낌이 뭔지 모르는 체, 예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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