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89화 (89/200)

황혼의 살인자. 89. 죽음을 깔고 앉은 만찬.

89. 죽음을 깔고 앉은 만찬.

호텔스카이라운지엔 적막에 내려앉았다.

그 속에 화려한 만찬이 준비 돼 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남거리의 화려함 같은 테이블, 그 곁으로 하나둘씩 모였다.

가장 먼저 해오름파, 그다음 남천파, 그리고 오성파.

심유한 눈빛으로 고종환은 모여든 자들을 응시했다.

세 조직의 보스들을 필두로 다른 열일곱 조직의 보스들.

그리고 세 곳의 조직에서 동원한 살인자들을 눈에 넣었다.

그들 중 눈에 두드러지는 자들은 야락칭이다.

‘몽골 살인자 놈들.’

따로 차려진 테이블에 거침없이 앉는 아홉 놈을 바라보며 고종환은 호흡으로 반응했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흥분이 되는 것 같기도 한 숨결의 곤두섬이다. 야락칭 놈들의 거침없는 모습 때문은 분명 아니다.

‘피 냄새가 나.’

야락칭이란 말이 도살자와 백정, 살인마라는 뜻이라고 들었다.

정말로 그 말이 딱 들어맞는 놈들이다.

희번득거리는 눈빛과 미소는 피에 굶주린 짐승들 같다.

저놈들이 따버린 머리 숫자가 얼만지 새삼 다가온다.

‘오성파 놈은……’

전두칠이 데려온 살인자놈은 얼굴이 하얗다.

은테안경을 썼고 평범해 보인다.

그런데 그게 겉모습뿐이란 걸 알고 있다.

전두칠이 알린 내용에 더해 조사해본 결과로는 진짜 살인마다.

한마디로 깊이를 모를 놈이다.

‘저 하얗고 온화한 얼굴 뒤에 악마가 있는 거지.’

묵직한 숨을 삼키며 고종환은 해오름파의 살인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놈도 측량이 힘든 놈, 아니 어쩌면 제일 무서운 놈인 것 같은 느낌인데……’

고종환은 본능으로 그것을 감지했다.

역시 평범해 보이는 용모에 보통의 체격을 가진 자다.

그런데 저 몸에서 엄청난 살인기술을 풀어내는 거다.

정확히 살인기술이 아니라 무술이다. 구천동 말로는 팔괘장이란 거다.

‘삼합회에서 죽이려고 추적중이다?’

그런 내력을 가진 자다.

능력에 대해 의혹을 품는 김부장에게 구천동은 영상을 보여줬다.

그걸 본 김부장은 눈동자를 빛내며 인정했다.

김부장이 인정했으니 고종환 자신이야 토 달 것 없었다. 저놈은 인간흉기다.

“모두 모였으니 짧게 한마디 하지.”

입을 연 고종환은 구천동과 지경호와 전두칠을 위시한 다른 보스들을 일일이 응시했다. 그렇게 눈으로 말했다. 너희도 모인 이유를 알 거라고.

“오늘 밤을 기점으로 시작이다.”

덤덤하지만 꿈틀거리는 것을 품은 목소리로 고종환은 계속 말했다.

“내가 호텔로 돌아온 걸 귀신도 보고 있었을 거다. 놈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웅크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반드시 온다. 가평으로 한대건회장을 찾아간 것처럼 찾아올 거다. 그래서 우리가 모여 있다. 환영준비는 끝냈지.”

채워 놓은 잔을 든 고종환은 들어 올리고 결론을 뱉었다.

“귀신을 잡자.”

스무 명의 조직 보스들과 따로 앉은 테이블의 살인자들은 잔을 들었다.

* * *

“왜 퇴근 안 해?”

등 뒤로 다가온 과장 이왕길, 돌아본 최재우는 어색한 미소를 물었다. 대답을 대신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본 이왕길은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불안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책상으로 눈길을 돌렸던 최재우는 과장 이왕길의 눈을 응시했다. 무사안일주의의 대명사라고 동료들이 뒤로 놀리는 인물, 저 눈은 정말 그렇다.

‘귀신을 직접 겪어본 사람.’

정확하게 겪어봤다고 말하긴 그렇다.

귀신이 피와 죽음을 펼쳐놓았던 현장에 발을 디뎠던 거다.

97년 서영나이트, 그 기억에 잡힌 사람이다.

‘누구보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사람.’

과장 이왕길은 그런 이다. 그렇기에 이제 벌어질 일을 예감하고 저런 눈이다. R호텔에서 생겨날지 모를 일, 아니 분명 일어날 일을 알아서다.

“귀신이 고회장을 방문할거라고 보시는 군요.”

최재우가 되물음인 듯 아닌듯한 말을 내자 이왕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외근 나가고 퇴근해 비어버린 강력계를 힐긋 돌아보며 목소릴 낸다.

“그자는 귀신이야.”

대답, 한 치도 의심이 없는 확고한 목소리다.

‘그래, 그는 귀신이니까.’

뜨거운 숨을 삼키며 최재우는 그 의미를 새삼 되새겼다.

귀신, 그 단어가, 아니 그 호칭의 존재가 보여준 결과들이 있다.

귀신과 조우한 자들은 지옥으로 끌려간다는 거다.

예외가 없는 결과다. 변하지 않을 결과다.

‘그런데도……’

고종환회장은 귀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어서 오라고, 내가 목을 이렇게 내밀고 있으니 따보라고,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고 있으니 오라고.

‘외면할 귀신이 아니고.’

장철은 그런 인물이다.

고종환회장의 의도와 숨은 위험을 알지만 간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고 어떻게든 부딪쳐야 할 일이어서다.

양측은 서로의 칼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지하면서도 한다.

서로 죽일 자신으로다.

‘고회장 당신의 힘과 능력을 알지만……’

갑자기 등골에 돋는 소름 때문에 최재우는 어깨를 경직했다. 그 모습을 인지하고 힐긋 눈길을 줬던 이왕길은 책상위의 서류들에 시선을 준다.

“그건 뭐야?”

채널링에 관한 자료들, 나인규 교수에게서 얻는 것이다. 거기에 최재우 자신이 그동안 조사하고 깨달은 내용들을 정리한 거다. 장철에 관해서.

“예 뭐……”

어떻게 말해야 할지 우물거리는 최재우의 어깨를 이왕길은 가볍게 두드린다.

“애쓰지 말고 집에가 쉬어.”

붙잡고 있는 게 뭐든 돌아서서 휴식하라는 격려.

“귀신의 일은 아무리 불안해하고 염려한다고 해도 손쓸 수 있는 게 없어.”

냉정한 소리, 현실을 보라는 조언이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는 최재우의 어깨를 다시 두드리며 이왕길은 일어섰다.

“난 간다.”

그러니 너도 집에 가라는 시선을 던진 이왕길, 그 뒷모습을 보던 최재우도 일어섰다. 왜 안 오냐고 전화하던 아내 유인주를 떠올리며 돌아섰다.

* * *

쉬지 않고 음식을 입에 넣던 최고한은 문득 그들을 봤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두 남자, 오성파가 데려온 은테 안경 놈과 해오름파가 데려온 놈이다.

둘 다 평범해 보인다.

아니다, 은테안경 놈은 허약해 보인다.

“모가지 몇 개나 따 봤어?”

최고환은 갑자기 물음을 던졌다. 그 순간 다른 여덟의 야락칭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아귀들처럼 음식을 먹어대던 얼굴에 눈동자가 곤두선다.

“할 줄은 알지?”

다시 나간 최고한 물음, 야락칭들은 킬킬 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최고한이 곧바로 몽골말로 되풀이 해 말했기에 의미를 파악해서다.

그런데 마주 앉은 두 사람, 음혜군과 민음서는 변화가 없다.

조용히 식사한다. 그리고 그런 보습을 김부장은 지켜봤다. 무겁고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예상대로.’

야락칭들의 도발에 음혜군과 민음서는 반응하지 않고 있다.

저런 자들이 무섭다. 속에 진짜 칼을 품은 자들이다.

그렇다고 야락칭들이 허섭스레기들인 건 아니다.

저놈들도 진짜, 피에 절어 사는 살인마 놈들이다.

‘너희가 제 역할만 해준다면 귀신을 잡는 건 수월해진다.’

살인자들의 테이블을 응시하던 김부장은 보스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엷은 미소를 품은 얼굴로 간간히 농담을 던지며 식사하는 자들, 그러나 눈동자에 칼을 품었다.

귀신이 찾아오면 날을 보일 칼들, 아직까진 숨긴다.

‘회장님의 의지대로.’

보스들의 최후를 그리며 김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에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고초희, 그녀가 웃는 얼굴이다.

‘아가씨.’

그녀를 찾아야 한다. 회장님의 시대가 저물고 있으니 그녀가 미래다. 반드시 그녀를 찾아 제자리에 안돈시키는 것이 김부장 자신이 할 일이다.

‘아가씨, 이젠 놀이를 멈추고 일을 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염원을 던진 김부장은 눈을 떴다. 그런데 그 순간 구천동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찰나의 순간, 시선을 돌린 구천동은 술잔을 든다.

* * *

역삼역을 돌아 이면도로로 들어선 차는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 3층짜리 작은 상가 건물, 일층엔 벽지와 페인트를 취급하는 점포다. 일층의 반은 주차장, 대기 중인 승합차 옆에 경차를 세운 장철은 점포로 들어갔다.

“배규철씨?”

오야지가 분명한 중년남자가 장철을 부른다.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으로 간 장철은 마스크를 내리고 주의사항과 내용을 들었다.

“오늘 밤 안으로 작업을 끝내야 합니다. 뉴스 봐서 알겠지만 R호텔상황이 별로 안 좋습니다. 그렇다고 문제될 건 없고, 지시에 적극적으로 따라주면 아침되기 전에 끝날 겁니다. 근데 얼굴이 왜 그렇게 굳어 있어요?”

“아, 아닙니다. 민폐 안 끼치고 잘할 수 있을까 긴장해서요.”

실리콘을 붙여 변장한 얼굴, 장철은 마스크를 올리며 변명했다.

“그래요? 긴장할 거 없다니까 그러네? 돌아가는 일은 일이고 우린 우리 할 일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자자, 이제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합시다.”

인부 다섯 명과 함께 장철은 승합차에 올라탔다.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개인장비가 든 가방을 메고서다. 호텔내의 도배와 페인트칠을 하는 작업, 조웅이 만든 틈이다. 그 안에 발을 들였다. 이제 부딪치는 거다.

‘날 기다린다면 구멍은 열어놓겠지.’

분명히 그럴 거다. 찾아오길 기다리는 데 문을 걸어 잠글 수는 없는 거다. 물론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늉 속에 쪽문을 열어둘 거다.

‘환영해 다오.’

출발하는 승합차의 진동 속에서 장철은 눈을 감았다.

* * *

‘이제 시작했어.’

새삼 밀려드는 긴장과 흥분 속에서 조웅은 두려움을 밀어냈다. 만에 하나 장철이 위험해지면 어쩌나, 당해면 어떻게 하나, 계속 꿈틀거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거라는 확신으로 이를 악문다. 귀신을 어쩌진 못한다.

‘제발 무사해라.’

마음속의 기원을 떨리는 숨으로 뱉은 후 조웅은 고갤 흔들었다.

‘아니, 넌 귀신이야. 덤벼드는 것들을 모조리 박살내버려. 고종환의 목을 따. 네가 그곳에 간 목적을 이루는 거지. 당연한 거야. 넌 귀신이니까.’

두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조웅, 그 모습을 이영숙이 씽크대에 기대 바라다 봤다.

* * *

대로 저편에 우뚝한 호텔을 바라보며 황철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국정원에 몸담고 일해 온지 이십년, 이제 나이는 마흔 셋이 됐다.

팀장으로 아직 현장에서 일하는 건 원해서다. 내부의 정치놀음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어도 휘말리지 않을 재주가 없다는 게 문제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일, 강남서 박인수과장이 주시하던 현안, 이것에 얽힌 위험한 냄새가 진동한다. 박인수는 윗선의 명령으로 철수했다. 그가 가면서 알려준 내용들은 이미 아는 것들, 귀신 장철과 얽힌 일인 거다.

‘보기만 하라고?’

위에서 내려온 지시다.

야락칭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위험에 대비하려고 움직였는데 지시가 내려왔다.

호텔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지켜만 보란 거다.

물론 언제일지 모르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 있다.

‘어느 정도 위의 가스인지 모르겠어.’

주시만 하라는 명령의 근원지가 짐작 안 된다.

국정원 내부인지 외부인지도 알 수 없다.

분명한건 개입 말라는 거다.

의미가 헤아려 지질 않는다.

고종환회장이 알아서 할 거라는 건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란 건지.

‘귀신에 대응해서 저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상황과 현실이다.

물론 귀신 장철이 한대건회장을 살해했다.

명백한 그 결과로부터 대응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가능성이다. 귀신이 호텔에 안 올수도 있고, 언제 올지도 모른다.

‘전국의 조폭대가리들을 불러 모아 놓고……’

야락칭 같은 흉악한 살인자들이 호텔에 있다. 귀신을 잡기 위해서다.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없다.

이게 무슨 드라마 스토리도 아니고 황당하다. 그런데 엄연한 현실이다.

야락칭과 같은 위험이 실재하는 사안인 거다.

‘그런데 보고만 있으라……’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 그 안에 배는 땀을 황철현은 바지에 문질렀다.

시간은 어느새 밤 10시.

강남의 화려한 불빛은 더 찬연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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