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93화 (93/200)

황혼의 살인자. 93. 지옥문.

93. 지옥문.

움켜쥔 주먹을 꿈틀거리며 김부장은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모니터 안에 보이는 존재, 귀신이 싸우는 광경은 전율로 몰아넣는다.

칼 한 자루를 낚아챈 저 자는 오십 명이 넘는 인원을 갈랐다.

저건 그냥 일방적이다.

‘양 떼 속의 호랑이……!’

그 표현이 딱 맞다. 지금 본 광경은 정확히 그거다.

‘귀신……!’

저 존재가 어떻게 싸워왔는지, 대적자들을 어떻게 끝냈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cctv를 통해 본 27층의 광경은 새로운 충격과 전율을 준다.

‘몸을 쓰는 것에 있어 아무런 장애가 없는 상태.’

귀신은 그런 자로 보인다, 판단된다.

한마디로 경지에 올라선 자인 거다.

사람이 육신을 사용함에 있어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한계를 넘어 몸을 갈고 닦은 자들이 있다. 달인이다.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경지를,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은 달인이라고 부른다. 그게 무술이든 체조가 됐든 무용이든 어떠한 스포츠이든, 혹은 다른 분야라 해도 그렇다.

국밥집에서 국밥을 배달하는 아주머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층으로 배달쟁반을 쌓고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모습은, 그 능력은 범인의 것이 아니다.

‘극한을 뛰어 넘은 이들.’

그런 이들은 사람들이 놀랄 능력을 발휘한다.

귀신 저자가 그렇다, 아니 그런 이들 중에서도 더욱 특별하고 충격적이다.

마치 칼과 하나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자와 싸워야 한다.

그런데 김부장 자신은 아니다.

‘저 정도는 아니야……!’

인정해야 한다.

귀신과 같은 수준, 극한의 벽을 보긴 했지만 넘진 못했다.

저 자와 부딪친다면 승패를 예상하기 힘들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정확히, 이기기 어려워.’

악문 숨을 뜨겁게 몰아내며 김부장은 현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중하고 철저하게 임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귀신과의 직접충돌은 될수록 피해야만 하는 거다.

‘귀신의 상대는 애초에 역할을 맡은 놈들이 하는 걸로.’

남천파와 오성파와 해오름파의 살인자들, 그들이 하는 거다.

귀신이 아무리 황당하게 강하다 해도 지치고 상처 입을 것이다.

조직의 살인자들도 마찬가지, 그게 바라고 계획하는 것이다.

그때가 마무리를 지을 때다.

‘귀신, 네가 아무리 귀신같아도 결과는 정해져 있다.’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m4소총을 잡고 김부장은 눈동자를 이글거렸다.

* * *

28층 복도에 멈춰선 장철은 큰 숨을 들이마셨다.

거칠어지던 호흡을 깊게 끌어내렸다.

그렇게 느끼고 들었다.

이 복도에 들어찬 바람의 숨결을.

‘동류.’

영혼으로 인지된다.

이곳에 장철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

깊고 깊은 곳으로 내려갔던 자다.

그 존재가 내쉬는 숨결을 복도의 바람이 전해 준다.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장철 자신의 숨은 그에게 간다.

‘뭐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왼손에 잡은 쇠파이프와 오른손에 잡은 회칼에 힘을 실으며 장철은 걸음을 냈다. 그 한걸음에 바로 반응이 왔다. 룸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온다.

‘아홉.’

복도에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그 숫자다.

장철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하나같이 흉악한 기운을 풍겨내는 자들이다.

냄새가 맡아진다.

피 냄새, 많은 사람을 죽여 몸에 밴 냄새다.

아니 저들의 영혼에 밴 냄새다.

‘칼과 도끼.’

아홉이 가진 무기는 그거다.

길이 오십센티정도의 칼은 직선의 칼날이 암흑빛으로 번득이다.

군용 정글도가 분명하다.

도끼는 일반적인 모양이 아니다.

한쪽은 도끼날이고 한쪽은 송곳 같은 모양의, 날렵한 형태다.

“당신이 귀신인가?”

아홉 명 중에 말을 건 자,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난 최고한이야. 당신 이름은 장철이라지?”

흥분한 미소를 품은 채 말하는 자, 최고한의 목소리를 장철은 묵묵히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보고 이렇게 흥분한 적이 없는데 말이지.”

어깨를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한, 아니 정말로 떤 최고한은 다시 말한다.

“아래층을 피바다로 만드는 걸 봤어. 여태 말은 들었고 결과에 대해 사진이나 영상 같은 걸 봐서 그렇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진 않았었지. 그런데 지금 본건, 이 결과는 인정 안 할 수가 없네. 정말 대단해.”

장철은 최고한을 응시하며 복도 전체를 눈에 넣었다. 최고한과 다른 여덟 명의 짐승들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자들, 또 다른 두 사내를 응시했다.

‘너구나.’

왼쪽 룸에서 나온 젊은 남자, 하얀 얼굴에 은테안경을 쓴 자가 그임을 알았다.

깊은 곳으로 내려간 자다. 무심하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장철 자신을 알아본 미소다. 마침내 만났구나 하는, 기쁨이 확연하다.

‘저자는……’

더 뒤의 룸에서 나온 남자는 눈빛이 깊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내쉬는 숨이 고르고 길고 깊다. 일체의 흥분도 느껴지지 않는, 제어하는 거다.

‘무술가.’

그렇다는 걸 장철은 직감했다. 바닥을 디딘 두발의 균형, 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칼을 갈 듯이 닦아낸 몸, 호흡으로 일으키는 힘, 다 보인다.

‘위험한 자.’

두 사내에 대한 평가를 마친 장철의 귀에 다시 최고한의 목소리가 박혔다.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고민되네.”

어깨를 으쓱한 최고한은 다른 소리를 이어냈다.

“여긴 수상하고 구린 구석이 많은 곳이라서 말이지. 다들 같은 일을 하자고 모였는데 속으론 딴 생각들을 하고 있단 말야? 뭐 그딴 건 상관없는데, 지금 할 일의 순서는 문제네. 아무래도 그렇지? 어떻게 생각해?”

최고한은 마지막 말을 뒤를 돌아보며 뱉었다.

민음서와 음혜군을 향한 말, 둘은 각자의 반응을 낸다.

민음서는 옅은 찌푸림, 음혜군은 미소로.

“무슨 상관이야?”

음혜군이 입을 열었다. 민음서를 돌아보고 뒷말을 낸다.

“당신은 죽게 돼 있어. 나와 야락칭들이 합공해서, 귀신과 싸우는 와중에.”

단답형문제의 답을 말하듯 음혜군은 말했고 민음서는 더욱 찌푸렸다. 이미 인지하고 예상하던 부분, 그런데 음혜군이 저렇게 말하는 건 모르겠다.

“어차피 우린 여기서 죽어.”

이어 나온 음혜군의 말과 미소에 민은서는 미간에 내천자를 그렸다.

“저 자.”

음혜군은 오른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복도 전편의 귀신을.

“지옥문을 연 자야.”

의미를 헤아리기 힘든 말을 낸 음혜군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민음서를 바라보던 눈을 아락칭들에게로, 그 너머의 장철에게로 고정했다.

“누가 누구의 손에 어떻게 죽든, 그런 걸 누가 어떻게 계획하든, 저자를 만난이상 다 소용 없어. 우린 지금 지옥문을 열고 발을 디딘 거니까.”

민음서의 시선과 아략칭들이 시선이 귀신 장철에게로 돌아갔다.

* * *

“알겠습니다. 상황변동에 생기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귀에 댔던 폰을 내린 황철현은 뒷목을 주물렀다.

피곤과 짜증이 몰려들어서다.

호텔을 주시중인 지금 이 상황이 그렇게 만든다.

윗선이 중대한 관심을 가진 사안이다.

국정원 최고위층, 그리고 연결된 어딘가다.

‘고종환회장.’

그 늙은이가 벌이는 일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저 바라보고 보고하라고만 하는 지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앞뒤좌우가 어렴풋이 짐작된다.

‘흡혈귀영감은 막후 권력자, 그런 힘을 가진 자들과 교유하고 균형을 이룬 존재야. 그 균형이 깨질 수도 있는 거지. 그래서 지켜보라는 거고.’

이게 그런 일임을 예감한다.

정확하게는 몰라도 틀리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힘들에 의해 돌아간다.

아니 민중이란 물결이 역사를 이뤄내는 건 분명하지만, 그 흐름에 편승하는 자들이 있다.

‘과거로부터, 청산하지 못한.’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뜬 황철현은 다시 호텔을 주시했다.

망원카메라로 보이는, 창밖의 강남대로 너머로 존재하는 호텔은 고요하다.

그러나 저 고요 속에 깃든 위험이 보인다.

곧 터지려는 시한폭탄 같은.

* * *

“허……”

자신도 모르게 나온 허탈한 숨소리에 구천동은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태블릿을 통해 본 27층 영상은 충격이라고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고회장 측이 호텔 cctv를 연결해줘 볼 수 있었다.

귀신의 칼부림이다.

‘혼자서……!’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엄청난 광경이었다.

귀신장철은 혼자서 조직의 칼들을 바쉈다.

그렇다, 이건 바수어 버린 거다.

육십여 명을 도륙했다.

이제야 귀신의 실체를 절감한다. 저놈은 정말로 끔찍한 귀신이다.

‘민음서가 제대로……’

구천동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누굴 믿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닌 거다. 지금 부딪치는 이 현실은 구천동 자신의 생사와 미래가 달린 일이다.

‘고좋환, 그 늙은이를 거꾸러뜨려야 살아.’

그 일은 시작됐다. 돌이킬 수 없는 일, 해내야 한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거야.’

으스러져라 이를 악문 구천동은 연장을 잡았다.

평생을 함께 한 칼, 삼십센치 길이의 몸통엔 구천(九泉)이란 한자를 새겨 넣었다.

자신의 이름과 발음이 같지만 듯은 다른, 넋을 땅 속 깊이 돌려보낸다는 뜻이다.

‘여태 그렇게 했지.’

이 칼을 담가준 놈들이 기억난다. 구천으로 보낸 놈들, 이번에도 그럴 거다. 고종환 그 영감을 보낼 거다. 그러니 귀신이 잘하는 것이 좋다.

‘결과는 어떻게든 날 테니까.’

회칼을 움켜잡고 선 구천동은 진저리치듯 몸을 떨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죽음을 품고서 죽이고자 할 때, 그 모든 의미를 삼키면서다.

* * *

“우리가 어떤 놈을 상대하는 건지 확실히 알았어.”

충격을 삭히며 폰에 숨결을 불어넣은 전두칠은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다.

-귀신이잖아.

역시 충격을 겨우 제어한 목소리, 지경호는 상대적으로 침착하다. 그게 지금 귀신을 막아선 야락칭과 음혜군 때문이라는 걸 전두칠은 알고 있다.

자신 역시도 그렇게 때문이다. 저들이 힘을 합치면 귀신도 죽일 거다.

“총을 사용하면 간단한 걸 복잡하게 만들었어.”

-고회장에게 사정이 있는 거지, 호텔 외부에 경찰들이 경비를 서는 마당이기도 하고. 생각할수록 웃기는 일이긴 한데, 우리 일만 하면 되는 거지.

우리 일, 그 의미를 전두칠은 새삼 곱씹었다. 그러다 태블릿화면을 보고 미간을 경직했다. 음혜군과 야락칭과 해오름파 민음서가 움직여서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면이 있다. 귀신을 향해 합심한 것 같은 모양새다.

‘해오름파 놈을 귀신과 먼저 붙게 해야……’

그런 걸 더 이상 생각할 틈이 없다. 귀신과 조직의 살인자들을 얽혔다.

* * *

지옥문을 열었다는 말.

그 의미가 소름을 동반하고 전신에 퍼지는 걸 민음서는 느꼈다.

음혜군이 귀신을 평가한 것이다.

그것에 한치의 과장도 없음을 인정한다.

귀신 장철, 저자를 보고서, 이렇게 대면하니 알겠다.

‘음혜군과 유사한 기운, 그러나 훨씬 더 깊고 위험한 기운.’

귀신 장철은 그런 존재다.

깊다는 느낌이 왜 드는지 모르지만 그렇다.

저자는 뿌리가 어딘지 측량하기 힘든 자다.

오늘 싸움은 정말 위험하다.

“기도를 했나?”

갑자기 튀어나온 음혜군의 목소리, 귀신을 향한 물음에 민음서는 의아함을 품었다. 기도를 했냐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그런데 대답이 나온다.

“울림을 들었지.”

귀신의 대답, 음혜군은 하얀 미소를 입가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나눠야 할 말은 없을 거 같은데.”

야락칭 최고한의 목소리, 그의 눈은 음혜군과 민음서를 본다. 귀신장철을 상대하는 것에 대해 협력하자는, 그 후 일은 살고난 후라는 눈길이다.

‘저런 면도 있었군.’

민음서는 옅은 감탄을 삼켰다.

짐승 같던 야락칭들의 변화, 진정한 강적을 알아본 맹수들의 대응이다.

저러하기에 저들이 여태 살아 있는 거다.

“우린 준비가 된 것 같은데?”

최고한이 시선을 돌렸다. 귀신에게다. 귀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옥문을 여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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