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94. 귀곡성.
94. 귀곡성.
바닥을 통해 전신에 스며드는 차의 주행감각 속에서 길한수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귀신 장철이란 사내, 역시 그런 존재가 생겨날 수 있는 거다.
‘우연일까?’
현재로선 그렇게 밖에 판단할 수 없는 결과, 하지만 필연이 스며든 일인 지도 알 수 없다. 채널링을 기반으로 한 연구는 온누리정신연구소에서만이 아닐 거다. 이전에 연구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갈래들이 있다.
‘종교, 무속, 개인적 성과.’
가능성의 갈래들이다. 확실한 결과들을 도출해냈다.
종교에 빠진 이들의 초월적 행동과 능력은 과학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무속은 더욱 그렇다.
단적인 예로 무당이 내림굿을 받을 때 작두 칼날을 밟는 거다.
‘전 세계에 걸쳐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 해.’
아무리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도, 상식으로 용납되지 않는 현상과 결과들이다.
그것이 바로 채널링이다.
인간 내면 깊은 곳으로의 길을 여는 거다.
그렇게 접촉하게 된다.
다른 존재, 그로인해 변화를 겪게 된다.
‘그 변화를 제어하고 이용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
온누리정신연구소의 존재이유이며 나아갈 길이다. 잘해 왔고 잘해나가고 있다. 백경과 같은 접촉자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부서지지 않았다.
‘접촉으로 인한 피해……’
정신이 파괴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후유증이 생긴다.
다른 존재와의 접촉이란 건 그렇게 무서운 거다.
그렇지만 끊임없는 도전과 연구의 결과로 극복했다.
이젠 더 한층 빠르고 확실하게 나가고 있다. 뿌듯한 일이다.
‘우리 연구소와 같은 시스템에 의하지 않고도……’
길한수는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뒤돌아봤다. 자신이 탄 승용차의 뒤로 달려오는 밴, 저 안에 백경을 비롯한 접촉자들이 있다. 연구소의 일기다.
‘천미, 경일우.’
백경 외에 그들이 함께 가고 있다.
천미는 유일한 홍일점, 여자다.
여군하사관출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신병에 의해 무너져 가던 여자다.
결국 신내림을 받으려 큰 무당을 찾은 천미를 연구소가 품었다.
경일우는 온누리정신연구소의 전신이자 원형인 정신병원 입원자다.
환자들 속에서 찾아낸 존재다.
환영에 시달리고 환청을 드는 전형적인 조현병환자였다.
그런데 그 속에서 발현되는 특이 능력을 캐치해 만들었다.
‘얼음 땡.’
경일우는 그걸 그렇게 말한다.
황당무계한 소리고 능력이다.
정신병원 영상을 보면 경일우를 제압하던 남자 간호사들이 통나무처럼 돼 쓰러진다.
제 몸을 제가 움직이지 못해서다. 그런 일이 정확히 세 번 있었다.
‘경일우가 땡하고 풀어줘야만, 힘이 다해 늘어져야만 다시 운신이 가능한……’
기이하고 소름끼치는 일이다.
경일우는 일종의 사이킥 능력자인 거다.
사이커 사이키커라고 부르는 존재, 정확히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결과가 그렇다.
깊은 곳으로의 접촉을 통한 변화, 단학수련자였다.
‘개인적 성취.’
경일우는 그런 사례다. 단학수련이라는 방법을 통해 길을 열었다.
그런데 제대로 가지 못해 정신병원에 오게 된 거다.
그 병증을 연구소가 치료해줬다. 제대로 된 길로 더 깊게 내려갈 수 있도록 모든 걸 지원했다.
‘귀신,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저들에겐 안 될 거다.’
전방을 응시하며 길한수는 차가운 미소를 피워냈다.
R호텔은 이제 곧 도착한다.
진입해야 할지는 아직 한회장의 결단이 남아 있지만 정해진 일이다.
고회장측이 성공하는 일은 없을 터, 실패 뒤로 들어가는 거다.
“상대를 경시하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목소리를 낸 길한수는 미간을 찡그린 비웃음을 흘려냈다. 최길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다. 그가 말한 경시라는 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호텔에 모여 있는 놈들은 그야말로 조폭과 살인자들, 그것들을 중시해야 하나?
“모르니까. 모르는 건 죄가 아니야. 그런데 모르면 나서질 말아야지.”
다시 중얼거림을 뱉은 길한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긴장해라.”
무전기를 통해 부하들에게 짧고 강렬한 음성을 던진 김부장은 비상계단 앞으로 갔다. 최상층인 이곳 31층의 펜트하우스로 이어진 통로, 아직은 고요하다. 그러나 28층에선 전투가 시작됐다. 귀신과 맹수들의 싸움이.
‘후.’
소리 없이 큰 숨을 들이 내쉰 김부장은 쥐고 있는 소총의 무게를 새삼 느꼈다. 자신이 군생활을 할 때에 잡아봤던 카빈은 정말로 카빈이었다. 떨어뜨리면 자동으로 분해가 될 정도로 낡은 총, 그걸로 사격했었다.
‘그때도 그건 골동품이나 같았지만.’
주력총기는 M16이었다. 그것도 지금은 골동품이다.
지금 쥐고 있는 소총이 현재다.
M4A1카빈, 미군이 사용하는 소총, 신선한 신뢰감을 준다.
‘총을 쏴본지 오래됐지만.’
오늘은 쏠 일이 생길 거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거의 확실하다. 지금 태블릿으로 보고 있는 귀신, 저 존재가 일으킨 바람을 피할 수 없다.
‘응?’
진동하는 폰의 몸부림에 미간 좁힌 김부장은 폰을 귀에 댔다.
-김부장, 우리도 위로 올라가야 하지 않겠소?
구천동이다. 29층으로 올라온 놈이 다시 이곳으로 올라오겠다는 거다. 28층 상황 때문이지만 저의는 따로 있다. 고회장의 곁으로 오려는 거다.
-다 같은 생각인데, 우리가 여기 있는 것보단 그게 낫지 않겠소?
다 같은 생각, 오성파 전두칠과 남천파 지경호도 그렇다는 거다. 그리고 나머지 일일곱 조직의 보스들도 같다는 거다. 그들을 휘어잡았으니까.
“그럽시다.”
김부장은 수월한 목소리로,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반응으로 수락했다.
‘오너라.’
소총을 강하게 움켜잡은 김부장은 태블릿을 무섭게 들여다봤다.
* * *
가슴의 답답함이 심해지는 걸 느낀 고종환은 시스템섀시창을 열었다.
수영장을 지나온 바람이 확 들어온다.
강남거리를 훑어온 바람, 31층의 호텔 꼭대기를 할퀸다.
삼분의 일정도만 연 안으로 밀고 들어오며 울어댄다.
가파르게 위험한 소리가 실내에 가득 찬다.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 난도질해 갈라버리는 것 같은 울림이다.
그 소리에 고종환은 흠칫했다.
흡사 어린 시절 듣고 두려워하던 귀곡성 같아서다. 애장터의 처절한 소리다.
‘무슨!’
거칠게 미간을 뒤틀며 고종환은 창을 닫았다. 귀곡성은 바로 사라졌다. 그러나 마음엔, 가슴 속에선 여전히 울고 있다. 처절하게 슬픈 울음이다.
‘제기랄……!’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고종환은 소파로 돌아갔다.
머리를 잡으며 생각을 떨쳐내려 하지만 이미 솟아난 기억은 떨어지질 않는다.
아홉 살 그때, 할아버지가 거적에 말아 지게에 싣고 간 동생, 그날 들은 울음이다.
‘이게 무슨……!’
잊었던 기억을 밀어내려 애쓰며 고종환은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이름도 제대로 지어주지 못했던 동생, 개똥이라고 해야 오래 산다던 그 아이는 죽었다.
사흘밤낮을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리고 버려졌다.
애장터로 지게를 메고 가던 할아버지 모습이 선연하다.
거적 밖으로 동생의 발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렇게 멀어져 나는 할아버지를 지나온 바람이 있었다.
몸을 흔들고 귀를 파고드는 그 바람은 울음, 동생의 것이었다.
그날 밤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애장터엘 갔었다.
뒷산 여우골 자락에 있던 애장터, 죽은 아이들을 버리는 곳이다.
그곳에 발을 들이고 들었다.
여우골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울음, 죽어버린 아이들의 귀곡성을.
“이건 그게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왁하고 소리친 고종환은 소파에 앉아 부들부들 떨었다.
* * *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은 도신의 정글도, 무섭고 강력한 그 칼날들 속으로 장철은 들어갔다. 피부를 면도칼로 저미는 것 같은 첨예한 감각을 받아들이며, 살인마들의 숨소리 속에서 깊은 곳의 울림을 들었다.
바람의 노래를 따라.
그렇게 장철은 움직였다.
야락칭들이 그어대는 정글도의 궤적사이로, 이어지는 도끼날의 흉악함 곁으로 흘렀다.
그런데 그자의 손이 다가왔다.
무예자, 뻗어내는 손에 강철고리가 보인다. 그것이 휘돌며 울어댄다.
흘러.
깊은 곳의 울림, 그 이전에 장철은 반응했다.
쇠파이프를 후려쳤다.
민음서란 이름을 모르는 무예자의 손을, 강철고리를 강타했다.
쨍하는 그 소리가 퍼지는 순간, 무예자의 다른 손이 휘돌아 나올 때 회칼을 뻗었다.
무예자가 눈을 부릅뜬다.
칼날이 강철고리와 손목사이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반응하는 찰나, 동시에 장철은 칼을 후렸다.
무예자는 손에서 피를 뿌리며 물러선다. 그러나 그 순간 야락칭들이 뒤와 옆을 친다.
디딤 발을 중심으로 장철은 돌았다. 시커먼 정글도들을 후려쳤다.
연속적이고 동시인 소리가 터지는 가운데 회칼을 던졌다.
도끼를 후려치며 나오는 놈에게다.
놈이 미간으로 칼을 받아내는 찰나에 점프하며 돌았다.
자주포가 터지는 것처럼 터진 뒷차기, 야락칭 또 한 놈의 안면에 꽂힌다. 놈이 넘어가는 순간 착지한 장철은 쇠파이프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콰훅, 소름끼치는 소리는 한 박자 뒤다.
정글도로 막은 놈의 칼날을 부수고 머리통까지 부숴버린 쇠파이프는 다시 돌아간다.
뒤로 물러나는 또 한 놈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놈의 턱을 팔꿈치로 올려칠 때 그가 왔다.
수박이 터지는 느낌을 팔로 받아내며 장철은 휘돌았다.
등 뒤에서 닥쳐온 위험, 장철 자신과 동류인 자, 그가 휘두르는 작두칼을 피했다.
미친바람처럼 터져 나오는 두 자루 칼날의 폭풍, 장철은 상대의 눈을 봤다.
‘웃는 구나.’
상대, 하얀 얼굴에 쓰고 있던 은테안경을 던진 젊은 남자는 웃고 있다.
이 상황이 더 없이 즐거운 거다.
장철 자신과 같은 자를 만나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게 좋은 거다.
다른 자들의 안위는 상관없다.
“죽여 버려!”
최고한이라고 제 이름을 밝힌 자가 소리친다.
그야말로 창졸간에 동료들 넷이 쓰러진 거다.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 겪는 것일 터다.
그렇다, 아락칭이란 이름으로 공포를 발산하던 존재들, 상상조차 못한 일이다.
‘나는 계속 달라지고 있어.’
시릿한 번개가 작렬하는 것 같은 작두칼의 궤적 안에서 장철은 음미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렇게 된 원인인 변화를, 깊은 곳의 울림을.
* * *
“미친!”
지경호가 발작 같은 반응을 냈다. 태블릿으로 보고 있는 28층의 상황 때문이다. 귀신이 야락칭들 넷을 쓰러뜨렸다.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인 거다.
“개 같은……!”
지경호는 분노와 충격으로 부들거린다.
야락칭들이 어떤 존재들인가?
어마무시한 살인마들이다. 저들은 귀신이 이전에 죽인 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다를 바 없는 꼴이다.
아홉 중에 넷이 쓰러졌다.
한순간에다.
“민음서……!”
부들거리는 충격의 숨을 흘려내는 자는 또 있다.
구천동이다.
그가 대륙에서 들여온 자, 민음서가 낭패한 꼴로 물러섰다.
귀신의 칼에 당했다.
“저런 게 팔괘장이군.”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림을 낸 자, 전두칠은 그럴만 하다. 음혜군이 귀신을 몰아붙이고 있어서다. 유일하게 대적상대인 것 같다.
‘아니, 귀신의 수작이야.’
김부장은 확신했다. 그 확신이 어금니의 통증으로 곤두서는 것도 잊은 채 태블릿을 봤다.
귀신 장철, 저 존재가 밀리는 광경인데 눈동자가 고요하다.
허둥대거나 위태로운 모습이 아니다.
저건 의도하는 게 있는 거다.
‘경고를……’
움찔하며 움직이려던 몸을 김부장은 멈췄다. 뭐가 유리한 건지를 따졌다.
‘같은 공간에 들어온 이 자들의 의도를 부수자면……’
미간을 꿈틀거리고 있는 김부장에게 지경호가 거칠게 소리쳤다.
“총을 가지고 있으면서 뭐하는 거요!”
순간 미간을 경직한 김부장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뺨의 흉터를 실록거리며 분노를 발산하고 있는 지경호에게, 그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아니 나는, 그게 그러니까……”
지경호는 주춤거리며 우물거렸다. 이내 시선을 회피했다. 현재상황으로 인해 잠시 망각했던 부분, 김부장은 절대 함부로 대해선 안 될 존재다.
고종환의 그림자인 저자가 어떠한 자인지, 얼마나 많은 피를 냈는지 안다.
“됐다!”
구천동이 소리쳤다. 전두칠은 환호를 터트렸다.
왜 그런지 김부장은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신, 그가 바닥을 구르고 있다.
갈라진 손목을 쥐고 물러섰던 자, 민음서가 합세했다. 음혜군과 같이 공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