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95. 누구나 가야 할 곳이 있다.
95. 누구나 가야할 곳이 있다.
불에 덴 것 같은 오른 손목의 감각을 무시하며 민음서는 상대를 주시했다.
귀신, 장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다.
저자와의 공방에서 당하고 말았다.
찰나에 주고받은 한수 나눔의 결과, 손목이 갈라진 패배다.
‘어처구니없어.’
패배, 정확하게 현재 상황이 진 것은 아니지만 일수공방의 결과는 그렇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런데 저자를 보면 변명할 결과가 아니다.
야락칭 네놈을 한순간에 박살내버린 존재인 거다.
‘저놈들도 그렇겠지.’
죽여 버리라는 최고한의 성난 외침, 저 반응은 충격과 두려움이 깃든 것이다.
여태 귀신과 같은 존재를 만난 적이 없을 것이다.
야락칭 자신들이 귀신과 같은 존재였는데, 저희가 죽여 온 자들처럼 당하고 만 결과다.
‘귀신,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워볼만한 상대, 인정한다.’
차갑게 빛나는 눈으로 귀신과 음혜군의 격돌을 바라보던 민음서는 격한 기합처럼 소리쳤다. 물러서, 라는 짧은 호통과 더불어 손을 뿌렸다.
대포가 터진 것처럼 소리가 터진 순간 음혜군이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로 민음서가 휘두른 손에서 이탈한 것들이 날아갔다.
강철고리, 은빛 섬광처럼 변한 그것들이 귀신을 강타했다.
귀신은 휘청거리며 물러난다.
벽과 천장에 박혀 들어가는 강철고리들, 귀신이 반응하며 쇠파이프와 회칼로 쳐낸 결과, 그 속으로 민음서는 달려 들어갔다. 팔괘장을 뻗어냈다. 그와 동시에 멈췄던 음혜군도 공격했다. 작두칼의 바람을 일으켰다.
* * *
“이제 제대로 하고 있어!”
흥분한 전두칠은 주먹을 손바닥에 때리고 있다. 자칫하면 태블릿을 대주고 있는 부하를 후려칠 기세다. 그렇기는 지경호도 마찬가지, 31층까지 수행해온 심복부하와 같이 태블릿에 눈을 박았다. 어깨를 부들거린다.
“죽여라, 제발 죽여 버려……!”
신음인지 기원인지 모호한 중얼거림을 흘려내는 자, 구천동에게 김부장은 시선을 돌렸다. 지경호 전두칠과 같이 28층 상황을 태블릿 화면으로 보며 흥분상태다. 귀신이 밀리며 구르기 때문,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본색을 드러낼 때가 됐는데.’
소총을 고쳐 잡으며 허리를 편 김부장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게 신호였는지 변화가 일어났다.
31층 펜트하우스의 모든 창들에 강철셔터가 내려왔다. 고종환회장이 있는 저편 공간을 제외한 모든 창들이.
“어?”
변화를 인지한 지경호가 흉터를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전두칠도 미간을 확 좁히며 반응했고 구천동은 핏발선 시선을 김부장에게 돌렸다.
“총을 사용해도 외부에선 안 보일 거요.”
묻지 않았지만 나온 김부장의 대답, 구천동은 뒤를 돌아봤다.
호텔의 31층 전체 공간에 꾸며진 펜트하우스, 복도 저편에 고종환이 있는 글라스하우스가 따로 있다. 유리온실과 같이 만들어진 공간, 별을 보는 곳이다.
‘수영장 앞에서 현재 상황을 보고 있겠지.’
고종환이 현재 그러고 있음을 확신하며 구천동은 현황을 더듬었다.
펜트하우스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금이 처음, 그러나 고회장이 영상으로 보여준 적이 있다. 글라스하우스의 수영장 앞에 고회장이 있는 거다.
‘설마?’
자신의 계획, 그것이 벽에 부딪치는 예감을 구천동은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김부장이 두 번째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다른 놈들이 나타난다.
총 가진 놈들, 김부장의 부하들이다. 열 놈이 포위하듯 벌려 선다.
* * *
망원카메라에 고종환회장이 잡혔다.
31층 텐트하우스다.
유리온실처럼 외벽과 천장이 꾸며진 공간, 항공사진을 보면 저곳에 수영장이 있다.
31층의 반은 저 공간이고 나머지 반은 부속시설과 룸으로 꾸며진 거다.
‘뭘 하는 건가 영감?’
망원카메라가 잡은 고종환의 모습을 모니터로 보며 황철현은 물음을 던졌다. 귀신이 오길 기다리며 기원이라도 드리는 건지 고종환은 석상같다.
그런데 창문을 연다. 하지만 잠깐, 왜 그런지 바로 닫고 돌아서버린다.
‘안 보여.’
고종환의 모습은 더 안 잡힌다.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 앞쪽에 서 있을 때 잡혔지만 위치상 더는 안 된다. 이쪽이 더 높은 위치여야 가능하다.
‘응?’
또 다른 변화를 감지한 황철현은 눈썹을 세웠다.
펜트하우스의 나머지 공간, 호텔의 꼭대기 층 창문들이 닫히고 있다.
내부의 셔터가 내려오는 거다.
그 결과로 펜트하우스는 암흑덩어리가 됐다. 모든 창을 가렸다.
‘뭐지 이건?’
불안한 예감을 삼키며 황철현은 폰을 잡았다. 보고를 위해서다.
* * *
호텔에 도착했다. 하지만 진입할 수가 없다. 원래 있던 손님들도 다 내보냈고 투숙객은 받지 않는다. 호텔직원들도 거의 다 철수시킨 상태다.
외부를 경찰이 지키고 있는 상황, 온라인엔 온갖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우선 지켜보자.”
길한수는 승합차 조수석에 오르며 그들에게 말했다.
접촉자들, 천미와 경일우와 백경에게다.
셋의 눈동자는 각자의 생각으로 번득인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용수회장의 명령을 기다릴 뿐이다.
“편하게들 기다려.”
셋에게 말한 길한수는 조수석 등받이를 뒤로 더 눕히고 밖을 봤다. 대로 건너편 R호텔, 맞은편빌딩의 자동차대리점인 이곳에서 잘 보인다. 등받이를 눕혀서 호텔 위까지 다 보인다. 그런데 최상층에 뭔가 변화가 있다.
‘응?’
팬트하우스가 있는 꼭대기, 그곳의 창문들이 가려지고 있다.
* * *
옆구리로 휘어져 들어오는 상대의 손을 막지 못했다.
바람의 소리를 따라 흐르면서도 그랬다.
그건 상대의 움직임이 그만큼 위협적이고 강력해서이기도 하지만, 작두칼을 휘두르는 자의 공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호흡으로 흘려 내기를.
울림의 권고대로 장철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바람의 울음이 공명하며 내부의 충격을 걷어내 준다.
무예를 수련한 존재의 공격, 내부로 충격을 주는 힘을 훑어냈다.
막혔던 숨을 그렇게 이으며 방어했다.
바닥을 굴러 튕겨 일어난 장철은 벽을 차며 휘돌았다.
그 공간에 음혜군의 작두칼이 날아와 난도질을 했다.
착지하며 물러나는 곳엔 민음서의 팔괘장이 엄습했다.
그의 공격을 피하다 보면 원형으로 휘말려버린다.
팽이처럼 휘돌아 구르면서 장철은 깨달았다.
팔괘장의 특징이다.
원형의 움직임, 공방의 핵심이 그것이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고 막힘이 없다.
저런 경지로 오르기 위해 얼마나 고련했을지 짐작이 간다.
‘좋아, 정말 좋아.’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희열에 장철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대들과 싸울 수 있다는, 싸우고 있다는 희열이다.
그건 복수라는 목표를 잊게 할 만큼 강렬하다.
그래서 온정신과 몸이 집중된다. 이 순간의 싸움에.
같은 순간 민음서와 음혜군의 눈이 새파랗게 빛을 냈다.
귀신이란 존재가 웃고 있기 때문이다.
팔괘장을 옆구리에 맞고 굴렀는데도, 작두칼에 스치는 팔과 다리에서 핏물이 튀는 데도, 저렇게 미소를 품고 있다.
“포를 떠버린다!”
공방 속에 물러나는 장철의 배후를 최고한과 야락칭들이 막았다.
* * *
기묘한 가운데 불안한 위험을 내포한 분위기, 그걸 걷어내듯 구천동은 말했다.
“우리도 총을 주면 좋겠소만.”
김부장은 구천동의 눈을 응시하며 지경호와 전두칠을 눈에 넣었다. 그러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게 승낙의 의미이니 뭔지는 알 길이 없다.
“탓하지 않아.”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말, 김부장은 총구를 위로 하며 뒷말을 이어냈다.
“누구나 가야 할 곳이 있지.”
미간에 내천자를 그리기 시작한 구천동을, 지경호와 전두칠을, 그 뒤로 들쥐들처럼 모여 선 열일곱 조직의 보스들을 바라보며 계속 이야기 했다.
“반드시 가지 않으면 안 될 곳, 발을 들인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길이 있지. 세상을 사는 게 그런 거라고 생각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잖아? 지금 같은 일 말이야? 어때? 아직도 될 것 같은가?”
구천동은 이제 미간의 내천자를 가늘게 떨었다.
전두칠은 무거운 숨으로 시선을 내렸고 지경호는 흉터를 부들거렸다.
이제 확실해진 것이다.
“고회장은 우리 생각을 다 들여다보면서 웃었겠지.”
구천동이 입을 열었다. 김부장의 시선을 받아내며 구천동은 이어 말했다.
“맞다, 우린 혁명을 꿈꿨다.”
구천동의 시선은 지경호와 전두칠에게로 돌아갔다.
“나만이 아니라 저 새끼들도 그랬어.”
안면을 꿈틀하는 둘을 무시하고 구천동은 다시 김부장에게 눈길을 돌렸다.
“각자가 같은 자리에 누워서 같은 꿈을 꾼 거지.”
구천동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났다. 이를 갈아대는 숨과 함께.
“저 새끼들이 날 죽이려고 한 짓을 내가 잊을 것 같아? 그 일을 고회장이 시켰다는 걸 모를 것 같아? 언제까지, 내가 언제까지 흡혈귀영감에게 머릴 조아리면서 살아야 하는 데? 죽을 때까지? 그건 절대 아니지.”
처절한 원한, 그 감정을 실은 구천동의 눈빛과 소리 없는 웃음을 김부장은 바라봤다. 반응 없던 그 시간이 짧게 흐른 뒤, 시선을 돌려 말한다.
“너희 선택에 달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구천동은 눈을 치뜨며 그들을 봤다. 이제 자신이 움직이면 함께 행동할 자들, 열일곱 곳의 조직 보스들이다. 각자 총 가진 놈들 한놈씩을 맡으면 되는 거다. 자신은 김부장을 상대하는 거다.
기호지세, 백척간두, 이 상황을 뭐라고 하든 그것 밖에 없는 거다.
그래야 할 순간이다.
그런데 김부장은 다른 조직 보스들에게 선택하라 했다.
‘뭘?’
안다, 이 순간 확연하게 깨달아진다.
자신이 한편으로 포섭한 보스들, 저들은 고회장에게 넘어갔다.
막강한 힘에 굴복한 거다.
이제 선택하라는 거다. 이대로 구천동 자신과 총 맞아 죽을지, 아니면 구천동을 죽일지.
“이 새끼들이……!”
구천동은 부들거렸다.
열일곱조직의 보스들이 각자의 연장을 꺼내들고 다가와서다.
저들은 선택했다. 구천동 자신을 죽이는 거다.
그런데 그 안에 지경호와 전두칠도 있다. 당황하고 분노한 두 놈은 나이프를 꺼냈다.
“가는 거야. 각자 가야 할 길로.”
귀를 파고드는 김부장의 목소리, 구천동 소리치는 것보다 보스들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 찰나에 구천동은 결정했다. 최후의 한수를 던지기로.
“전부 뒈져라!”
한 박자 늦은 고함을 터트리며 구천동은 부하를 앞에 세웠다. 달려드는 보스들의 칼을 막으려는 게 아니다. 부하의 등허리 속 격발끈을 당겼다.
섬광, 펜트하우스 복도를 삼키며 폭발이 터져나갔다.
* * *
정글도가 닥쳐오는 뒤로 장철은 돌아섰다. 그 순간 무예자의 손이 등을 강타했다. 그 충격을 바람의 울음이 공명하는 숨으로 토해내며 나아갔다.
최고한, 한국이름을 가진 놈이다.
그런데 다른 놈들을 몽골인이다.
놈이 내리치는 정글도를 어깨로 흘리며 옆으로 돌았다.
바로 뒤의 놈의 목에 회칼을 쑤셔 넣었다.
번개가 치는 것 같은 그 공격을 놈은 경악해 했다.
칼을 뽑으며 옆으로 돌아나간 장철은 회전하는 발차기의 궤적 속에 정글도를 걷어내고 또 한 놈의 목을 갈랐다.
그 순간 공격해온 두 놈의 정글도를 쇠파이프로 받아쳤다.
불꽃이 튈 때 두 놈의 겨드랑이를 그었다.
“죽여!”
최고한의 다급한 경악이 깃든 외침.
다른 한 놈과 최고한이 닥쳐오는 찰나 장철은 두 놈의 사이를 지나갔다.
쓰러지는 놈들의 목이 쩍 벌어진다.
최고한과 남은 한 놈이 달려들고 주춤했던 음혜군과 민음서가 움직이는 그때.
28층 공간을 강타하는 충격이 모두를 덮쳤다.
천정과 벽이 흔들리고 먼지가 떨어진다.
누구라도 알 상황, 위에서 폭발이 일어난 거다.
“으아아!”
최고한이 발악 같은 소릴 지르며 장철을 공격했다.
폭발이고 뭐고 이 순간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처절한 원한으로 정글도를 휘둘렀다.
같은 순간 마지막 남은 한 놈이 도끼를 던졌다. 장철의 가슴으로 들어갔다.
흐릿한 잔상의 흐름처럼 장철은 움직였다. 날아오는 도끼를 회칼로 받으면서. 그것을 휘돌려 돌아가는 손과 몸의 움직임 속에 되날려 보냈다.
도끼를 던진 놈의 미간에 도끼가 받혔다.
그 순간 장철은 최고한과 충돌했다.
바로 그 순간, 생사를 가르는 찰나 뒤로 민음서와 음혜군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