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04화 (104/200)

황혼의 살인자. 104. 어제와 다른 오늘은.

104. 어제와 다른 오늘은.

“고초희?”

눈썹을 있는 대로 곤두세웠던 최길준은 묵묵히 듣다 통화를 끝냈다.

폰을 쥔 채로 큰 숨을 거듭해서 들이 내쉬었다.

지금 파악한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무거운 가슴,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호텔에 고초희가 나타났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다. 경찰로부터 나온 정보이니 확실하다.

‘정말로 살아 있었고, 이젠 모습을 드러냈구나.’

고초희에 대한 추측과 이야기들, 한데 뭉뚱그려 곱씹고 생각하던 최길준은 고갤 돌렸다. 길한수가 바디백에 들어간 부하들을 차에 싣고 있다.

정확히 차에 싣는 걸 지켜보고 있다. 저들은 이 산에서의 흔적을 지웠다.

‘인생 자체를.’

죽음을 맞았으니 그런 결과다.

저들이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고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니 특별한 감정은 없다.

그저 이 결과가 허무할 뿐이다.

‘죽으면 그냥 끝인데……’

명확하다. 아무것도 안 남는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원한도 전부 흩어진다.

그게 요동을 치는 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산사람에게만 영항을 미친다.

그러니 끝이 나려면 전부 죽어야 하는 걸까.

‘이미 죽은 자들처럼.’

끝난 이들이 떠오른다.

처음 시작이 된 윤완규부터 윤종대회장, 한대건회장과 한진수, 이제 고종환회장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죽었다.

누리던 것들 전부를 뒀고 죽음만 가졌다.

이게 진리인 거다.

‘그런데 난 뭘 하고 있는 건가.’

최길준은 끝을 더듬었다. 자신이 밟고 나가는 이 길의 끝.

‘귀신.’

그를 향해 가고 있다. 그 결과는 정해져 있다. 여태 경험했고 지금도 눈으로 보고 있다. 죽음이다. 죽기 위해서 한발 한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나친 망상이 아니다. 귀신이란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그렇게 될 거다.

‘자살미션인가?’

문득 든 생각에 최길준은 실소하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정해진 결과다. 그걸 두려워하는 이는 없다.

그렇기에 귀신을 두려워 할 게 없다는 게 아니라 안 두렵다.

하지만 허탈한 건 맞다.

‘내가 알고 느끼는 걸 한용수회장은……’

어떨까, 라고 생각하던 최길준은 길한수와 눈이 마주쳤다. 분노와 원한으로 경직한 눈동자, 마치 백 년 동안 얼린 유리가 깨져 번득이는 것 같다.

“고초희가 살아 있다고 한 것 같은데, 무슨 상황입니까?”

길한수가 던지는 물음에 최길준은 현실로 회귀했다. 대답대신 폰을 들었다.

“예, 접니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한용수에게 전화하던 최길준은 그를 봤다. 경찰특공대 뒤로 몰려온 경찰병력 속의 인물, 강남경찰서의 박인수 경정이다. 그가 바라보고 있다.

* * *

“하……”

스스로도 의미를 정확히 알길 없는 숨으로 한용수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밤을 새운 피곤이 짓누르는 육신은 물먹은 솜 같다. 하지만 정신은 명료하다. 지금 최길준에게 들은 말이 더 그렇게 만든다. 그년이 나타났다.

‘고초희.’

호텔에 그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던 년이다. 장막 뒤에 숨어서 장난질 하던 년이다.

그런데 이젠 그럴 수가 없는 거다.

아버지 고종환이 죽었다. 그걸 알고 온 거다.

‘여태 장난질 칠 수 있었던 것도 고종환이 있었기 때문이지.’

보호막은 사라졌다. 냉엄한 현실과 마주쳐야 한다. 그년이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건 나중문제고 지금은 아비의 죽음 앞에 서야 한다.

‘호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겠지.’

그보다는 내부에 눈과 귀를 심어두고 있었다고 봐야 맞다. 여태 해온 짓이 그렇다. 고회장이 가진 힘 안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취한 거다. 그런 게 가능해야만 그년이 한 짓이 말이 된다. 문형철을 죽인 것 같은.

‘그놈의 동선과 일정을 파악해야만 가능했어.’

하루 종일 미행하고 뒤에 붙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닐 거다.

고초희는 분명히 고종환의 주변에 제 이목을 심어뒀다.

고종환과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니라면 그런 거다.

그런 면을 보면 분명 흡혈귀의 딸년이다.

‘여태 한 짓이 고회장도 모르게 혼자 꾸민 짓이라면……’

분명 보통 년이 아니다. 그렇기에 죽은 걸로 위장했을 터다.

명확하겐 귀신에게 당해 산시체가 된 것이었지만, 연은수란 인형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년인 거다. 사람을 잔혹하게 죽인 년이다.

‘오늘 아침은 확실히 어제와 다르겠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한용수는 창밖을 봤다.

연구소의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새벽도 물러가고 아침이 밝아온다. 이 아침의 무게가 느껴진다.

세경개발 고종환회장이 살해된 사건, 아침을 뒤흔들 터다.

‘어떻게 대응하고 수습하려나.’

그래야 할 자들, 힘들을 떠올리고 더듬으며 한용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저 자가 온누리전략기획실장이야.”

박인수가 눈으로 가리키는 인물을 최재우는 봤다.

승합차 앞이다. 경찰의 차량이 아니다. 저 차에 바디백 세 개를 실었다.

분명 사체들이다. 저 광경이 말해주는 건 분명하다.

이곳 소리봉에서 귀신에게 당한 죽음들이다.

“같이 있는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군.”

가라앉은 숨을 뱉어내듯 다시 목소릴 낸 박인수, 그의 의문을 최재우도 씹었다. 그런데 짐작이 든다. 온누리정신연구소, 그곳의 인물이란 추정.

“바디백에 든 사체는 분명 온누리정신연구소와 관련이 있을 거야.”

이어 나온 박인수의 추론에 공감하며 최재우는 새삼 주변을 돌아봤다. 이곳 광주시 퇴촌면의 소리봉까지 이동해온 경찰력 속에 있는 현실이다.

“우릴 이대로 두는 이유가 뭘까요?”

제지하거나 쫓아내지 않고 있다. 이렇게 지켜보도록 놔두고 있다.

“글쎄.”

모호한 눈빛을 보인 박인수는 제 짐작을 말한다.

“그럴 필요가 없어서겠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최재우의 눈빛 물음에 박인수는 답을 낸다.

“고종환도 죽은 마당이잖아.”

최재우는 음 하는 숨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 수뇌부의 현재 상태인 거다.

‘좌지우지하던 압력이 사라진 상태. 예상 못한, 갑작스러운 공백.’

현황을 곱씹으며 최재우는 그들을 다시 응시했다. 온누리전략기획시장과 온누리정신연구소로 추정되는 인물, 그들이 이편을 보고 돌아선다.

“갑니다.”

“그러네, 가네.”

승합차가 떠나가는 걸 바라보던 최재우와 박인수는 동시에 서롤 돌아봤다.

기묘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교환했다.

현장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 무기력함, 귀신이 만든 엄청난 결과, 현실을 씹으면서다.

“응?”

박인수가 폰을 들며 미간을 좁혔다. 본청 정보과의 친구가 보내온 게 확실한, 메시지로 들어온 내용을 보고 눈을 치뜬다.

“뭐, 뭐야?”

“왜 그러십니까?”

묻는 최재우의 눈을 응시하고 박인수는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고초희가 호텔에 나타났어.”

최재우는 숨을 멈췄다. 박인수의 눈을 마주 바라보고 아무 반응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 돌아섰다. 차를 향해 달려가는 그 뒤를 박인수가 좇았다.

* * *

황철현은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고초희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 때문이다.

잔혹한 범죄현장을 재미난 현장학습체험을 하는 아이처럼 보고 있다.

‘웃는 거야, 그게 맞아.’

고초희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그렇다는 걸 황철현은 확신했다.

그래서 드는 결론은 하나, 저 여자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다.

부친의 죽음 앞에서 저럴 수는 없다.

피바다 속을 저렇게 거닐고 있는 거다.

‘저러도록 용인한 이유가……’

고초희를 호텔 안으로 들인 결정, 그건 경찰 수뇌부의 것이 아니다.

황철현 자신으로 하여금 이렇게 지켜보도록 한 힘이다.

그렇다, 지켜보는 거다.

고종환이란 존재의 유일한 혈육, 저 여자가 어떠하며 어떠할지를.

‘저자가 민승환 변호사.’

고초희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은 양복쟁이가 있다.

평범한 얼굴과 평범한 몸태를 가진 중년남자다.

저자가 세경 법무실을 책임진 자다.

이제 확실히 알게 된 정체는 고초희의 눈과 귀란 거다. 그리고 이인자가 됐다.

‘고종환이 죽어 없어진 세경은 고초희의 것, 그 바로 아래.’

그렇게 돼버린 현실을 더듬던 황철현은 미간을 강하게 좁혔다. 글라스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고초희의 행동 때문이다.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고 있다. 아침 해가 들이치는 걸 받아내며 즐기는 모습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살해된 현장에서……!’

황당한 충격 속에서 황철현은 계속 지켜봤다. 돌기를 멈춘 고초희가 수영장 물을 살피고 강남대로를 내려다본다. 그렇게 한 후에 죽음을 본다.

아버지 고종환의 죽음, 이제 바디백에 들어가 실려 갈 사체, 바라본다.

“아빠.”

고초희의 낭랑한 음성이 죽음으로 물든 공간을 울렸다. 그 뒷말도.

“나 왔어. 그런데 아빠는 가네?”

고초희는 웃었다. 소리 없이. 그 모습을 황철현은 숨죽이고 바라봤다.

* * *

뒷문을 통해 소리 없이 들어온 장철을 향해 조웅은 입술을 움찔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만 눈에 담았다. 이내 다시 나와 욕실로 들어가는 것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tv를 켰다.

-R호텔은 경찰이 포위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귀신은 호텔로 침투해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충격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세경개발 고종환회장이 피살됐습니다. 그밖에 다수의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호텔 앞은 취재진으로 아수라장이다. 국내 언론만이 아니라 해외언론들도 달려왔다. 왜 아니랴, 이 엄청난 사건은 국외에서도 관심이 뜨겁다.

‘온누리그룹 한대건회장이 살해됐으니까.’

그리고 이젠 세경개발 고종환이 죽었다. 일본언론들은 한대건이 죽었을 때부터 대서특필하고 있다. 일본 사회에도 그만큼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제 더는 뭉개고 있을 수 없을 텐데.’

정부의 대응이 나올 거다. 그래서 걱정이 된다.

이미 수배령이 내려진 장철이지만 뭐가 더해질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곤 생각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대한민국이 귀신을 잡겠다고 달려드는 게 된다.

“그래도 안 잡혀, 너희는 못 잡아.”

소리 내 냉소를 던지던 조웅은 바로 입을 닫았다.

안방에서 이영숙이 나온다.

아침준비를 하기 위해 나온 그녀는 눈인사를 하고 싱크대로 간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안전하고 펀하게 해줘야 하는데……’

이영숙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조웅은 무거운 숨을 삼켰다.

* * *

“헤, 이건 뭐……”

TV를 바라보며 선 유지건은 손에 든 커피를 전달할 생각도 못하고 있다. 그렇기는 송치호와 홍인구도 마찬가지, R호텔상황에 혼을 빼앗겼다.

-호텔 안에는 수도권 제일 폭력조직 해오름파 보스 구천동과 부산을 대표하는 조직인 오성파와 남천파의 보스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예 조직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귀신을 당해내지 못……

유지건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신이 누군지 제대로 알면 그런 소리 못하지.”

송치호는 고개를 끄덕이는데 홍인구는 주변의 동료형사들을 돌아봤다. 모두가 자신들처럼 사건결과에 충격 받은 얼굴들, 그러나 진실은 모른다. 귀신이란 존재가 뭔지, 어떻게 저런 결과가 나는 건지에 대해서.

‘솔직히 우리도 아는 건 별로 없어.’

뜨거워진 숨을 달래며 홍인구는 다시 뉴스를 봤다.

-정부는 긴급회동에 들어간 걸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현재 사안을 단순한 살인과 폭력사건이 아니라 국가적인 테러상황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그럴만한 일이다. 온누리그롭 한대건회장의 피살 뒤로 세경개발 고종환회장까지 살해됐다. 고회장에 대해선 세간이 한회장만큼 알지 못하지만 아는 이들은 안다. 그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그 부재가 어떠한지.

“태풍이 불겠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릴 낸 홍인구는 송치호와 유지건의 시선을 받았다.

둘 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지는 않았다.

더듬어 헤아리고 있어서다.

정관계와 재계, 우리 사회의 권력층에 들이친 파도가 너울을 만들 터다.

“오늘 아침은 확실히 어제와 다르네요.”

들고 있던 커피를 송치호와 홍인구에게 전하며 입을 연 유지건은 작게 더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은 또 어떠려나.”

신명서를 비추며 올라가는 해는 봄의 기운을 맘껏 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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