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107. 악의 꽃.
107. 악의 꽃.
원형 테이블을 둔 곳은 서재로 쓰는 공간이다. 원래는 정신병원에서 행동 치료를 하던 곳으로 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른다. 지금 마주 앉는 고초희, 저년이 어떤 년인지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것과 같다.
“먼저 애도를 전합니다.”
한용수는 깊은 목례로 고종환의 죽음을 위로했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추호도 흡혈귀영감의 죽음에 애도 같은 걸 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쾌재를 부를 심정이다.
그 악마 같은 늙은이가 죽었다는 게 기쁘다.
“냄새가 나네요.”
애도의 말에 답사가 아닌 다른 말을 고초희는 냈다.
‘냄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한테서 냄새가 난다는 소린가?
하긴 샤워한지가 이틀이 넘었다.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그것도 못했다.
그런데 그 야야기가 아닌 것 같다, 고초희는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했네요.”
거듭 이상한 말을 한 고초희는 창문을 응시한다. 정원 쪽으로 난 창문, 원래는 없던 거다. 벽으로 막혀 있던 것을 뚫어 빛이 들어오게 했다.
‘이년이?’
한용수는 미간을 깊게 좁혔다.
냄새가 나고 고통스러워했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 감이 잡혀서다.
본래 이 공간의 용도, 그 내력을 언급한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이곳이 원래 뭐하던 곳인지 알고 있다고?
‘정신병원이란 걸 알고 있겠지. 그래서 지껄이는 거고.’
판단을 내린 한용수는 고초희를 향해 다시 목소릴 던졌다.
“장례준비를 하자면 정신이 없을 텐데, 그보다 부친의 횡액으로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기도 힘들 텐데, 염려한 것보다는 나아 보여 다행입니다.”
시선을 맞추는 고초희를 똑바로 응시하고 한용수는 핵심을 뱉었다.
“그런데 만나자고 한 용건이 궁금하네요.”
배시시, 고초희는 웃는다.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이십대중반의 젊은 아가씨, 어디 가서도 눈을 끌 미모가 피어난다.
‘이년……!’
치명적이라고 할 고초희의 미모, 뇌쇄적 미소에 한용수는 숨을 경직했다.
보고 있노라니 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할 수렁, 지옥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악마의 손 같은.
‘그렇구나.’
한용수는 깨달았다.
한진수와 윤완규 같은 놈들이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다.
고초희의 저 미소, 치명적인 미모에 홀린 거다.
식충식물의 화려한 자태에 홀려 버린 곤충들이 비참하게 잡혀 먹히듯, 고초희에게 먹혔다.
‘위험한 년.’
혀끝을 깨물며 스스로에게 경고한 한용수는 경시하는 마음을 버렸다. 고종환의 피를 이어 받은 존재, 그러나 이십대 중반의 여자, 그렇지만 밤의 여신으로 유희를 즐긴 사악한 년, 그러해도 여자라는 맘을 버렸다.
‘얕보면 절대로 안 될 년이야.’
고종환이란 거대한 산이 사라졌다고 해도 얕보면 안 된다. 비빌 언덕 따윈 고초희에게 필요 없다.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결과가 다 말해준다.
‘제 아비가 귀신에게 살해당한 날 아침에.’
맹수가 맹수를 알아보는 본능으로 한용수는 고초희를 다시 바라 봤다. 직전까지 아래로 보던 마음을 버렸다. 지금 본 저 미소, 그로인한 현실을 새삼 자각했다. 그렇지만 한용수 자신이 아우르지 못할 것은 없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확고한 불변의 자존위에서 한용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개 기업인들의 만남이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논의하는 법, 우리의 만남이 그러한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게 뭔지 자세히 들어 봅시다.”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한용수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네년의 미소 따위엔 흔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네년의 머리 위에 있다는 듯이.
“밤의 여신이에요.”
붉은 입술을 가볍게 벌려 낸 말, 생뚱맞으면서 흠칫하게 하는 말.
“내가 밤의 여신이에요.”
거듭 목소리를 던진 고초희는 또 웃었다.
아름답고 위험한, 마치 악의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 * *
소파에 함께 앉은 이영숙의 긴장한 숨소리를 조웅은 확실히 들었다.
tv에 눈을 박은 지금 상황, 현실이 그렇게 만든 거다.
정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귀신 장철을 테러범으로 규정, 충력검거에 나선 다는 거다.
‘정해져 있던 거야.’
어금니를 물었다 풀며 조웅은 현실을 받아 들였다.
그렇다, 이건 피할 수 없게 정해진 흐름이다.
한대건회장을 죽였을 때 확실히 정해진 거다. 그러니 동요할 것 없다.
정부에서 무슨 시늉을 해도 시늉일 뿐이다.
‘결과를 내기 위해서 무섭게 덤벼들긴 하겠지만.’
귀신 장철이 잡히는 일은 없을 거다.
여태도 그랬지만 장철은 목표를 제거할 거다.
고초희, 그년만 남았다.
그년은 언론에 얼굴을 드러냈다.
‘밤의 여신.’
장철과 자신이 이야기 한 끝에 내린 결론, 그것을 확인했다.
고종환의 입에서 답을 들은 거다.
고초희는 밤의 여신, 이제 그년이 놀겠다 한다.
‘보통 년이 아니야, 아니 정상적인 년이 아닌 거야.’
새삼 등골에 소름이 돋아 조웅은 움찔했다. 왜 그러는 건지 힐긋 돌아봤던 이영숙은 다시 tv에 눈을 박았다. 뉴스 스튜디오에 출연한 자들이 지껄이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다. 그 와중에 고초희 사진이 나왔다.
‘저년……!’
백운호수에서 제 죽음을 위장한 년이다.
장철이 머리에 칼을 박은 것은 저년이 아니라 연은수라는 여자다.
그렇게 자신을 감추고 밤의 여신이 됐다.
온라인에 진실의 파편들을 흘려 혼란을 조장하며 즐거워했다.
‘남규덕을 죽이고 문형철을, 제 오빠부부까지 죽인 년.’
고초희의 얼굴, 오늘 아침 호텔 앞에서 찍힌 모습을 바라보며 조웅은 헤아렸다.
과연 저 젊은 여자의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 지다.
누구나 혹할 미모의 저 아가씨는 보이는 모습이 진짜가 아니다.
악마가 속에 있다.
‘사악한 년,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야. 결국 죽게 될 거다.’
장철이 만들 결론을 확신하며 조웅은 일어섰다. 냉장고로 가 냉수를 꺼내 벌컥 대고 마셨다. 그런 조웅의 모습을 이영숙이 말없이 돌아다 봤다.
* * *
고초희가 이어내는 이야기를 한용수는 굳은 얼굴로 들었다. 표정에 변화가 생기는 것 같아 최대한 억제하면서, 무표정을 꾸며내며 귀기울였다.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 고초희가 살인을 저지른 내용이다.
“짐작하고 계셨죠?”
배시시 웃는 고초희, 저 아리따운 얼굴이 섬뜩해 한용수는 눈밑을 움찔했다.
“민이사가 애를 썼어요. 아버지 곁에서 티 나지 않게 행동하느라 고생했죠.”
민이사, 민승환 변호사다.
짐작대로 고초희의 눈과 귀 역할을 수행한 거다.
그 인간 자체가 가진 능력도 있을 테지만, 고회장 곁에서 취한 핵심 정보들을 전달했다.
고초희는 그걸 기반으로 사냥감들을 처리한 거다.
‘문형철 검사 같은 놈.’
고초희의 이복오빠 고재춘 사장 내외를 뒤이어 떠올린 한용수는 뜨거운 침을 삼켰다. 경찰내부를 통해 알아낸 바에 의하면 참혹하단 말이 모자란 사건이었다. 고초희가 한 짓, 제 입으로 자랑스럽게 시인한 일이다.
‘왜?’
그게 핵심이다. 어째서 지금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지다.
밤의 여신이 자신이란 것을 밝히면서 이어낸 이야기, 진실한 내막이다.
그걸 한용수 자신에게 들려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야기하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기 와서 확실히 알았어요.”
여전히 위험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흘려내는 고초희,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 나온다.
“보고만 계시지 않았잖아요? 그렇죠?”
뭘? 이라고 물으려던 한용수는 깨달았다.
귀신이 만든 결과, 호텔의 사건이다.
처음부터 지켜보지 않았냐는 거다.
귀신을 기다리는 자들을, 귀신이 올 걸 기다리지 않았냐는 거다.
기다리기만 한 게 아니지 않냔 거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
“아버지가 죽었어요.”
탁 자르고 나온 고초희의 말, 고종환의 죽음이란 결과에 한용수는 흠칫했다. 변명이라고 할 것도 없는 반응을 이어내려던 목구멍이 막혔다.
“귀신이 죽였죠.”
고초희의 얼굴엔 이제 미소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눈동자가 빛을 냈다.
“한대건회장님을 죽인 귀신이, 내 아버지까지 죽였어요.”
한용수는 부친 한대건의 얼굴을 떠올리고 숨을 경직했다. 고초희의 말을 계속 들었다.
“귀신은 또 올 거예요. 날 죽이러 오겠죠.”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고초희의 눈동자는 다시 흐릿한 미소를 풀어냈다.
“죽여야 하잖아요? 귀신을 잡아서 복수해야 하잖아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꿈틀한 한용수 앞에서 고초희는 진한 미소를 피워냈다.
“그 일을 같이 해요.”
* * *
호텔 앞 강남대로를 떠나며 황철현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봤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R호텔의 모습과 주변정경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그렇지만 다르다. 저 안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저곳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채널링이라니……’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내용.
귀신을 처음부터 추적해온 최재우 팀장의 이야기다.
장철이 채널링이란 실험을 통해 지금의 존재가 됐단 거다.
중요한 내용이라 판단, 일단 위에 보고를 하긴 했지만 난감한 상황이다.
‘미친놈 소릴 듣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
고개 돌린 황철현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재우가 관련자료들을 주는 대로 다시 보고를 올릴 생각이지만 잘하는 짓인가는 의문이다.
미신, 무속과 같은 이야기다.
미지의 존재와 접촉한다니, 그런 실험이라니.
‘아니, 확인해 봐야해.’
미국이 개입된 정황이 있다.
귀신 장철이 여릴 적 형제보육원에서 당한 비밀실험은 분명 미국인들이 개입했다.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밝혀봐야 한다.
미국은 세상 모든 곳에서 상상이상의 짓을 한다.
‘최팀장 말대로 비대칭 전력의 일환으로 그런 걸 연구했다면……’
음모론으로 치부되는 이야기들이 실재인 경우가 왕왕 있다.
황당한 소리지만 다 거짓이 아닌 거다.
이것도 그런 경우라면 귀신은 정말 위험하다.
그런 자가 국가 지도자들을 노리고 덤벼든다면 진짜 큰일인 거다.
‘적성국에 보낸다면 대박이겠지만.’
북한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던 황철현은 폰의 몸부림이 흠칫했다. 점퍼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귀에 댔다. 짧고 명료한 명령의 목소리를 들었다.
-g6로 이동해라.
폰을 내린 황철현은 미간을 가득 좁혔다. g6가 어딘지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다. 하지만 생각해 냈다. 듣기만 한 곳, 한 번도 가본 적 없다.
‘이게 뭐……?’
의문을 더듬던 황철현은 운전하는 팀원에게 지시했다.
“g6로 간다.”
힐긋 뒤를 돌아봤지만 의문을 표시하지 않는 조수석의 팀원처럼, 운전대를 잡은 팀원은 군말 없이 지시를 따랐다. 차는 오전의 강남을 달렸다.
* * *
“욕먹겠네요, 이제 가 봐야겠습니다.”
의자를 말고 일어서는 최재우를 박인수는 붙잡지 않았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업무를 봐야 할 시간에 이렇게 나와 있는 거다.
귀신사건에 관여할 위치가 더는 아닌데도 이러고 있으니 욕먹을 거다.
“그래, 어서 들어가 봐.”
최재우를 배웅하며 커피숍을 나선 박인수는 문득 하늘을 보고 눈을 찡그렸다. 유난히도 푸르게 맑은 봄하늘이다. 눈이 시려 제대로 보기 힘들다.
‘하늘은 저렇게 푸른데……’
호텔을 돌아본 박인수는 피 냄새를 맡았다.
저곳을 참혹하게 물들여 버린 피, 그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어디서 얼마나 더 흘러나올지 모르겠다.
“그래, 모르지, 정말로 몰라.”
넋두리 같은 중얼거림을 흘려낸 박인수는 돌아섰다.
* * *
그들이 와.
울림이 머리에 퍼진다. 명확하고 확고한 의미다.
‘그들.’
장철은 눈을 떴다.
가부좌를 푸고 벽을 보던 눈을 천장으로 올렸다.
민무늬의 천장벽지가 생경하다. 그런 마음속으로 울림의 매시지가 다시 퍼진다.
그들이 온다는 거다.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이 오는 거다.
어떻게 오는지 안다.
온누리정신연구소의 존재들, 장철자신과 같은 접촉자들인 거다.
‘그들을 통해서.’
그들이 온다. 장철 자신에게 들어온 붉은 외눈과 같은 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