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13화 (113/200)

황혼의 살인자. 113. 누가 무엇을 꿈꾸는가.

113. 누가 무엇을 꿈꾸는가.

“향이 좋군요.”

찻잔을 든 조중건은 그윽한 표정으로 향기를 먼저 음미했다.

카모마일 차다. 8가지 효능이 있다고 알려있다.

수면에 좋고 혈당조절에 좋고 소화기능에 좋고 심장에 좋고 등등, 고대로부터 애용하던 차라는 것이다.

‘술을 마셨어.’

한용수가 그렇다는 걸 조중건은 파악했다.

취할 정도는 아니지만 계속해서 마신 걸로 보인다.

식사는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랬을 거다.

‘광주시 소리봉에서 귀신에게 당한 결과가 정말 뼈아플 테니까.’

채널러 삼인을 귀신에게 보냈다.

결과는 죽음이다.

받아들이기 힘들 거다. 그동안 연구해 거둔 성과가 무너진 거다.

이제 그 부분을 파내야 한다.

“연구소 시설이 아주 좋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니기에 한용수는 눈썹을 꿈틀했다. 조중건이 지금 뱉은 말, 연구소 시설이 좋다는 건 다른 의미다. 정체성을 말함이다.

“그림자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한용수는 바로 치고 나갔다. 하루 동안 제대로 먹은 음식 없이 술로만 채운 몸, 알콜기운을 카모마일 차로 밀어내며, 눈과 혀에 힘을 주면서다.

“그렇겠죠. 송현아 그 친구가 말했을 겁니다. 뭐, 그 정도는 말해도 되지요.”

대수롭잖은 미소로 조중건은 다시 차를 넘겼다. 그 찻잔을 내리며 눈을 맞췄다. 한용수, 온누리자동차의 회장, 사십대후반의 복수에 찬 남자와.

“위험한 선을 밟고 계십니다, 회장님은.”

실룩 입가를 비틀었던 한용수는 대답했다.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있습니까? 안전한곳이 어딘지 알면 가르쳐 주면 감사하겠군요. 나 한용수, 위험과 안전을 구분하며 걸음을 내지 않습니다. 가야할 곳이 어디고 해야 할 일이 뭔지 분명히 압니다.”

느릿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조중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죠. 한회장님 강단이야 지구촌에서 다 아는 거니까요. 베를린이었던 가요? 박람회에서 발표할 신제품과 같이 납치되는 일을 경험하셨죠?”

유명한 이야기다. 범인들의 요구에 맞서 시간을 끌고 결국 일망타진되도록 했다. 범행의 배후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지만 경쟁사의 소행으로 세상은 짐작한다. 글로벌 가전시장을 선도하는 온누리를 공격한 거다.

“한회장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에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그럼 얘기가 쉽겠군요. 돌려 말하지 말고 핵심을 이야기 하죠.”

조중건과 한용수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눈싸움처럼.

“심안.”

조중건이 먼저 핵심을 뱉었다. 한용수도 바로 반응했다.

“국정원이 원하는 게 그것뿐입니까?”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닫고 서로를 응시 했다. 아니 노려봤다.

“채널링 연구를 하는 곳은 온누리정신연구소만이 아닙니다.”

드디어 나오기 시작한 조중건의 본론에 한용수는 귀기울였다.

“선발주자는 더욱 아닙니다. 국정원은 오래전부터 이 분야를 연구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온누리에서도 시작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가 물색한 대상자를 온누리에서 데려간 상황으로 인지했죠, 지켜봤습니다.”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한용수는 전후를 이해했다. 추정하던 부분이다. 국정원이 어떻게 알고 요원을 침투시킨 건지, 지금 들은 내용인 거다.

“확실히 한회장님은 남다른 분입니다. 다른 기업들은 채널링이란 분야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할 겁니다. 그런데 한회장님은 대단한 성과를 내고 계시죠. 심안이란 게 채널링 증폭장치가 아닙니까? 놀랍습니다.”

한용수는 이제 갈래를 확실히 잡았다.

조중건 국장이라고 자신을 밝힌, 눈앞의 인물은 원하는 건 그거다.

심안, 국정원은 아직 그런 걸 구현 못했다.

앞서 시작한 이들, 저들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가졌는지 모르겠다.

“정확하게 심안을 원하는 군요.”

명료한 목소리로 한용수가 대꾸하자 조중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거면 시간과 노력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한용수와 조중건,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시작했다.

* * *

어둠속에 동화된 움직임, 장철은 이 산에 살아가는 짐승의 하나처럼 이동했다.

온누리정신연구소의 뒤, 펜스가 보이는 곳까지 다가갔다.

위험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전신에 느껴진다. 그 속엔 카메라의 시선도 있다.

‘사각지대는……’

펜스에 설치된 카메라의 시선을 피해 장철은 움직였다.

펜스와 펜스사이, 카메라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에 이르렀다.

겨우 일미터 남짓한 공간.

잡목과 수풀들이 웃자란 곳이다. 그 속에 몸을 들이고 안쪽을 봤다.

‘악귀들이 웅크린 곳이구나.’

연구소의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 확연하다.

장철 자신과 같은 존재들, 소리봉에서 처치한 삼인보다 훨씬 위험하고 강한 자들이 있다.

그런데 절제되지 않는 위험인 것 같다.

폭주하는 위험으로 느껴진다.

‘확인하면 확실하겠지.’

붉은 눈빛을 흘려내며 장철은 기다렸다. 연구소 안쪽의 경비원들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들이 서로를 지나쳐 돌아가는 때 펜스를 넘어갔다.

* * *

“어, 수경씨 괜찮습니까?”

한경석의 부축을 받으며 민수경은 펍을 나왔다.

왜 그런지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겨우 흑맥주 몇 잔에 이렇게 취한다는 게 이상하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한경석이란 남자에게 취해서 이러는 걸까?

정말 잘생겼다.

‘아 이래가지곤 오늘 밤에 역사를……’

걱정으로 얼굴을 찡그린 민수경을 한경석은 깊게 부축했다.

“나한테 기대요.”

민수경은 얼씨구나 하며 한경석에게 온몸을 맡겼다. 이순간은 뽕브라가 탄로나든 어쩌든 상관없다. 계획대로 된다면 어차피 탄로날 진실이다.

“아무래도 어디서 술을 좀 깨야 할 것 같은데요?”

“아, 그래야겠어요.”

속으로 환호를 부르면서도 민수경은 불안한 걱정을 품었다. 몸 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해서다. 이정도로 못 가눌 상태라는 게 그렇다.

‘왜 이러지? 머리는 왜 이렇게 아파?’

대리를 부른 한경석의 부축을 받으며 민수경은 차로 갔다. 대리기사가 운전석에 오르는 걸 보며 뒷자리에 올라탔다. 한경석은 바싹 붙어 앉았다. 부축을 받던 상태였고 바라던 상황이지만 뭔가 위화감이 생긴다.

“가.”

한경석의 짧은 말, 대리기사가 뒤를 돌아보고 씩 웃는다. 그걸 민수경은 봤다.

‘뭐지 이거?’

정상적이지 않은 광경이다.

한경석은 처음 본 대리기사에게 명령하듯 출발을 말했다.

아는 사람에게 하듯이다.

돌아본 대리기사의 웃음도 그렇다.

제대로 잘했구나, 하는 듯한 눈빛과 웃음.

한경석을 아는 것 같다.

“자, 잠깐만요, 화, 화장실 좀 가야겠어요.”

민수경은 시트에 눕듯이 있던, 제어되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그냥 싸.”

귀를 파고든 한경석의 목소리, 차갑고 날선 반응에 민수경은 경직했다.

‘뭐?’

의문은 이제 깨달음으로 바뀐다.

멋진 미소와 매력적인 매너로 가슴을 부풀게 한 남자, 한경석은 그런 자가 아닌 거다.

지금 저 얼굴이 진짜다.

“싸고 또 싸게 해줄 테니까 그냥 싸란 말이야.”

징그럽고 음험한 웃음을 흘려내는 한경석, 그에게서 벗어나려 민수경은 몸부림쳤다. 그러나 생각뿐, 말을 듣지 않아 꿈틀대는 몸에 충격이 왔다.

“싸라고!”

한경석의 주먹을 맞으며 민수경은 출렁거렸다.

* * *

“협력을 제안합니다.”

확실한 결론을 뱉은 조중건을 응시하며 한용수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닥쳐온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다.

상대는 국정원인 것이다.

이들을 적대하는 건 바보짓, 그렇다고 달라는 걸 내줄 수도 없는 거다.

“기업간의 인수 합병과 공동연구개발은 흔한 일이죠.”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연 한용수는 카모마일 차를 한 모금 넘기고 이어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득이 있어야 이뤄지는 겁니다. 온누리가 국정원과 협력한다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뭘까요? 기업은 이익추구가 전부죠.”

조중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익추구, 기업의 존재이유죠. 그런데 한회장님이 현재 하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질 않습니까? 귀신, 그 존재를 잡아 이루는 복수가 더 크지 않습니까? 그 일은 어떻습니까? 원하는 대로 이뤄지고 있습니까?”

담담하던 얼굴의 미간에 선을 그은 한용수.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온누리의 능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귀신이란 존재가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로 힘든 인물이죠. 그런 자를 잡자면 자신만의 힘으론 힘들 겁니다. 도움을 받는 다면 가능하겠지만.”

국정원의 힘, 그건 검경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정말로 국정원이 귀신을 잡고자 움직인다면, 총력을 다한다면 귀신은 잡힐 것이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한용수의 눈을 보며 조중건은 다시 입을 열었다.

“궁극의 목표가 있지 않습니까? 채널링을 재미삼아 연구하고 개발해 나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최종의 목표는 완성에 있지 않습니까? 비대칭 전력, 휴먼웨폰, 그런데 그걸 이뤄서 온누리만 과실을 먹겠습니까?”

국정원에서 이미 하던 일이다.

이렇게 찾아왔다.

과실은 결국 국가와 나눠야 한다.

어차피 예정된 일, 그 순서가 닥쳐온 거다.

이젠 답해야 한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결정을 내리는 게 현명하겠지요.”

대답을 낸 한용수, 그걸 들은 조중건, 둘은 서로를 응시하다 동시에 일어섰다. 그러자고 말한 바도 없건만 이동했다. 연구소의 핵심시설인 지하로.

* * *

‘뒤탈 안 나게 제대로 한 건지 모르겠네.’

민승환은 걱정을 삼켰다.

끌고 온 여자가 경찰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고초희의 가다리는 저 놈들이 걱정이다.

물론 고초희를 생각하면 헛된 걱정이다.

그녀가 믿고 맡긴 놈들이다.

꼬리가 드러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불안해.’

두근거리며 조여지는 심장을 어루만지며 민승환은 그녀들를 봤다. 공교롭게도 같은 민씨 성을 가진 여경, 결박된 그녀 앞에 선 고초희다.

“약을 너무 먹인 거 같은데?”

고개 떨군 민수경의 머리채를 잡아 세운 고초희는 미간을 찡그린다.

“술하고 같이 먹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민수경을 데리고 온 놈, 한경석이란 이름을 가진 놈이 바로 대답한다.

‘저 새끼.’

이유모를 증오 같은 걸 삼키며 민승환은 한경석을 봤다. 여자라면 다시 돌아볼 만한 잘생긴 낯짝을 가졌다. 허우대도 좋다. 저 몰골로 여경을 후렸다. 오늘 밤의 화끈한 정사를 기대했을 여경은 이제 죽을 것이다.

“이대론 안되겠어. 깨워.”

고초희는 손을 놓고 돌아섰다. 흥미가 사라져 짜증이 난 모습이다.

한경석이 즉각 여경에게 달라붙는다. 주사기를 팔에 꽂아 약물을 주입한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냐……!’

새삼스럽게 현실을 자각하며 민승환은 진저리를 쳤다. 거부하고 밀쳐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 거대한 족쇄에 잡혀 허우적거리고 있다.

* * *

“지금쯤이면 뜨밤을 시작했으려나?”

속삭이는 목소리로 등을 안아오는 아내 유인주, 그 손길에 최재우는 흠칫했다.

‘아 피곤한데.’

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 유인주는 숨이 뜨겁다.

“수경이 그 기집애 은근히 밝히거든, 아주 좋아 죽을 거야.”

아내의 손길에 반응하기 시작한 몸을 돌리며 최재우는 힘껏 안았다.

“아침에 못 일어나면 책임져.”

“흥, 그러면 죽어야지. 이제 마흔 넘은 사람이 할 소리야?”

섬뜩한 아내의 말에 다시 잦아들던 최재우의 몸은 이어진 말로 깨어났다.

“마님을 위해 봉사해.”

최재우는 온힘을 다해 불길을 피워 올렸다.

* * *

쉐퍼드가 아니다, 그보단 털이 길고 많다. 잘 모르지만 벨지안 테뷰런이란 견종인 것 같다. 충성심이 강하고 영리해 군견으로 많이 쓴다고 안다.

바람이 되는 거야.

울림을 따라 장철은 동화했다. 어둠속에서, 건물측벽의 그림자 속에서 존재를 지웠다. 경비원들과 함께 움직이던 개들은 그 곁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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