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138. 악마와의 계약.
138. 악마와의 계약.
CIA, 그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곳의 누군가와 만나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적 없다. 위태롭던 나라, 여든 여덟을 살아오는 동안 많은 일을 겪고 흘려보냈다. 그렇지만 미국의 그림자인 CIA와 엮인 적은 없다.
‘생각을 잘해야 해, 정말로 잘해야 해.’
빅터 차가 앉았던 소파 건너편을 바라보며 김호는 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그가 저 자리에 앉아 담담한 얼굴로 말하던 이야기들이 생생하다.
‘날 선택했다…… 대한민국의 안보와 미래를 위해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선택이란 의미를 안다.
대한민국은 이제 미국이 공작한다고 정권이 바뀌는 나라는 아니지만 가능은 하다.
정권을 바꾸겠단 소리 같은 건 아니다.
김호 자신도 대통령 같은 건 할 생각이 없다.
‘지금처럼 무대 뒤에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
미국이 원하는 건 그거다, 김호 자신이 바라고 그리며 이뤄온 것과 같다.
미국은 김호 자신을 정말로 실질적인 권력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거다.
그러기 위해 함인건 같은 놈을 치워주겠다는 것, 상호이익의 추구다.
‘한국 정부가, 특히 국정원이 제어되지 않는 상황을 없애겠다는 거지.’
미국이 원하는 건, CIA가 이루려는 건 그거다. 그 일을 함에 김호 자신은 선택한다는 거다. 결정을 빨리 하라고 말하고 빅터 차는 돌아갔다.
그런데 이건 시간을 준 게 아니다. 거절한다면 CIA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지독한 것들.’
CIA는 그런 존재다.
그들이 만든 지구촌의 사건들은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역사를 만든 자들이다.
우리 현대사에도 그들의 자취가 드리웠다.
OSS를 전신으로 한 그들의 숨결은 지금도 이어짐이다.
“허상이란 말이지?”
생각의 갈래가 한 점으로 모여 김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 중얼거렸다.
빅터 차가 말한 존재, 함인건의 모시는 선생님이란 인물은 없단 거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받아들일 수 없었다. CIA의 반간계라고 여겼다.
‘정말로 없다……!’
빅터 차는 담담한 미소 속에 확신과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자신은 CIA이며 미국이라는 눈동자로, 우리가 말하면 진실이란 얼굴로, 선생님이란 허상에 대해 얘기했다. 함인건이 만들어낸 가짜 인물이라고.
‘그랬던 거야, 그래서 아무리 선생님이란 존재를 찾으려 해도 못 찾은 거지.’
이제 전후가 이해된다. 함인건 몰래 선생님이란 존재에 대해 조사하고 찾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만 했었다. 소득에 전혀 없는 결과였다.
선생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거다.
함인건은 가상의 인물을 내세웠다.
‘제 놈 얼굴 하나만으론 부족한 부분을 그렇게 메운 거지.’
김호는 문득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함인건의 능력에 대해 생각하니 그렇다.
이제 마흔 여덟의 젊은 놈이다. 국정원을 장악하고 장막 뒤의 실세로서 행세하고 있다.
그게 놀라운 건 그놈이 혼자 이룬 것이란 거다.
‘갑툭튀로 튀어나온 놈.’
금수저가 아니다. 중학생 때 고아처럼 돼 혼자 살아온 놈이다.
자살한 아버지의 친척들이 양육을 맡겠다 했지만 거부하고 고학으로 큰 놈이다.
그때 그놈이 주장한 것이 독지가의 후원을 받는다는 거였다. 선생님의.
‘그때부터 지금을 계획했다고? 아니, 그건 아니겠지. 시작이 그렇게 된 것일 뿐이야. 빅터 차의 말대로 미국유학시절 뭔가 변화를 겪은 거고.’
CIA는 함인건에 대해 세밀하게 조사했다. 그가 워싱턴대학 유학시절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 사귀던 여자들까지, 언제 어떤 파티에 가서 누구와 어울리고 도서관에 드나든 시간이 어떠했는지까지, CIA다운 능력이다.
‘사회주의 급진 모임에 잠깐 드나들었다?’
아주 잠깐이었다고 한다.
그때를 계기로 함인건의 뭔가 제 정체성을 갖춘 건 아니라고 빅터 차는 말했다.
그러기엔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그럴만한 역량의 모임이 아니었단 거다.
함인건은 역사에 몰입했었다 한다.
‘미국의 역사. 그들이 아메리카대륙을 어떻게 차지했는지, 지구를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그로인해 흘린 피가 얼마인지, 논문을 썼단 말이지.’
그 논문에 함인건의 사상과 정체성이 드러나 있다고 빅터 차는 말했다. 그러나 미국 유학중인 한국학생의 일, CIA가 주목할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함인건이 한국으로 돌아와 국정원 기조실장이 된 것은 다르다.
무서운 놈이다. 군대를 다녀오고 사회생활을 공무원으로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국정원, 공채 시험을 합격해 발을 디딘 것이다. 그리고 하나씩 계단을 밟아 올라섰다.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기조실장까지 됐다.
‘제가 가진 걸 백이십분 활용하면서.’
김호 자신에게 건네준 무기들, 정치인들의 비리자료들과 같은 게 함인건에게 무수할 것이다. 그런 걸 제가 원하는 곳에 사용한 거다. 그건 국정원 내부에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그런 와중에 놈은 선생님을 내세웠다.
‘존재하지도 않는.’
김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고 엄청난 일이어서다. 함인건이란 놈의 능력에 감탄하는 동시에 어처구니가 없고, CIA라는 존재의 무거운 현실이 격하게 가슴을 누른다. 숨이 거칠어진다.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야.’
상대는 미국이다. 그들이 하고자 한다면 하는 거다.
절대 반기를 들 수 없다. 이렇게 올라타는 열차의 행선지가 어디일지 모르지만 가야만 한다.
기호지세,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정신을 놓치면 혼이 흩어질 것이다.
테이블 위의 놓인 폰, 빅터 차가 주고 간 폰을 김호는 잡았다.
* * *
7호실에 돌아와 쉬고 있는 장철을 함인건은 모니터로 바라봤다. 판교의 원소프트에서 아직 뒤처리 중인 2팀과 황철현의 종말팀을 비롯한 지원팀들의 분주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귀신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보인다.
‘일본 채널러 요원들을 그렇게 해치우고……’
원소프트 빌딩 내 10층 영상.
귀신과 일본 체널러 요원들이 싸우던 광경을 떠올린 함인건은 소름을 삼켰다.
그건 그냥 일방적이었다.
상대들도 채널러고 일본이 반격의 카드로 낸 자들이었다. 그런데 다 죽였다.
‘귀신……!’
모니터 속 장철을 바라보며 함인건은 뜨거운 숨을 거듭 삼켰다.
* * *
“후우.”
깊은 숨을 뱉어낸 황철현은 그래도 가시지 않는 가슴의 무게와 충격을 곱씹었다. 귀신 장철이 만든 결과를 보는 충격, 거듭해서 커져만 간다.
‘대림동에서도 그랬지만 이건……’
격투가 벌어졌던 10층 복도를 황철현은 새삼 바라봤다.
일본 요원들, 채널러들이 뿌린 피가 낭자하다.
그들의 시신은 바디백에 넣어져 차에 실렸다.
보광동 안가로 우선 가겠지만 새로운 g6 거점으로 옮겨질 것이다.
‘채널러들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귀신의 능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새로운 g6가 어딘지 아직 모르는 궁금함 보다 귀신에 대한 것이 더 크다. 귀신은 정말로 귀신인 것이다. 복도를 찍던 cctv의 영상에 다 담겼다.
‘저들의 충격은……’
2팀은 황철현 자신보다 더 충격을 받았다. 그래선지 표정과 눈빛들이 망연자실해 보인다. 자신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끝난 거다.
귀신 혼자서 끝냈다.
귀신이 기운을 숨기는 법도 알려줬다고 들었다.
‘이놈들도 방심하다 당한 거야.’
일본 채널려요원들은 귀신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거다.
10층으로 올라오는 자가 있다는 건 알았겠지만, 그게 채널러라는 건 모른 거다.
게다가 그 존재가 한국 사회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귀신임을.
‘계속 모를 거다. 귀신은 죽은 자니까.’
묵직한 숨을 내쉬던 황철현은 김충식의 무전통신 목소리를 들었다.
-팀장님, 이제 철수 합니까?
황철현은 현장을 다시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래 가자. 여긴 경찰이 마무리 할 거다.”
-좋네요, 컵라면이나 때려야겠습니다.
김충식과 다른 대원들이 철수하는 기척을 인지하며 황철현은 그들과 눈을 맞췄다. 2팀요원들 여섯 명, 눈빛으로 철수하자는 의사를 보냈다. 황망한 눈빛과 표정을 수습한 그들이 돌아서는 뒤로는 지원팀이 분주했다.
‘가자. 오늘 밤은 푹 좀 쉬자.’
엘리베이터에 오른 황철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 *
먼저 돌아온 귀신 장철을 모니터로 바라보던 함인건이 그에게 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중건은 복잡한 상념을 삼켰다. 귀신이 일본의 거점을 박살낸 결과에 놀라고 짜릿하면서도, 앞으로 벌어질 싸움을 걱정했다.
‘함실장, 당신은 다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조중건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게 마음속에 든 우려와 걱정을 털어냈다.
함인건은 보통사람이 아닌 거다.
선생님이란 대단한 배후도 있다.
함께 하게 된 것은 행운이다.
정말로 역사에 남을 일을 하는 거다.
‘물론 기록으로 남진 않겠지만.’
사라진 오른 팔을 내려다본 조중건은 뺨에 주름이 지게 이를 물었다.
“내가 하는 일이 이런 거야.”
돈과 힘을 유혹을 물리치고, 편하고 달콤한 삶을 버리고 택한 길이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 일을 진정으로, 진짜로 하는 거다. 목숨 따윈 상관없다.
‘귀신, 당신에게는 무엇이 목표인지……’
그런 게 있었다.
손녀의 복수다.
그것을 이뤘다.
그럼 이젠 무엇일까.
* * *
침대에 누워 있던 장철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문을 돌아보자 열린다. 다가오는 기척을 이미 인지하던 차, 젠틀한 외모의 중년 남자가 들어선다. 테이블 앞의 의자를 끌어다 놓는다. 침대 앞에 마주 앉는다.
“함인건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밝힌 자, 눈앞의 이 사내가 누군지 장철은 알았다.
조중건 국장의 윗선이다.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 국정원 비밀조직의 보스다.
“이런 식으로 대면하게 됐습니다.”
모호한 의미의 말로 모호한 미소를 흘려낸 자, 함인건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명료한 목소리로 감사를 낸 함인건은 장철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선친께서 간첩누명을 쓰신 걸로 압니다.”
장철은 처음으로 얼굴에 변화를 만들었다. 눈 밑을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걸 봤는지 못 봤는지, 함인건은 하고자하던 말을 이어서 내놓았다.
“아버님도 그런 일을 당하셨습니다.”
누구의 아버지를 말하는 가, 함인건의 이야기란 걸 장철은 알았다.
“공무원이셨죠. 구청에서 일하는 걸 자랑으로 여기신, 누구보다 열심히 사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대가가 참 처참했습니다. 지역개발과 관련한 비리에 연루된 자로 몰리셨습니다. 주범은 구청장인데, 아버님은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신 것뿐인데, 거액의 뒷돈을 챙긴 비리공무원이 됐습니다.”
언제 내려간 건지 바닥을 보던 시선을 함인건은 다시 들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때, 아버지는 자살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눈 밑의 반응을 보였지만 장철은 묻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이러는 진짜 이유가 뭔지.
“나는 원합니다.”
다시 나온 함인건의 목소리엔 힘이 살려 있었다.
“잘못한 사람이 대가를 치르는, 잘못하지 않은 사람은 무사한 세상을 원합니다.”
정의 따위를 함인건은 말하지 않았다.
잘못에 대해서 말했다.
그래서 부질없는 꿈으로 들리지 않는다.
몽상이나 이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함인건이 품은 세상은, 추구하는 가치는 분명하다.
당한 건 돌려준다는 거다.
“끝까지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뜨겁게 반짝이는 함인건의 눈을 장철은 말없이 바라봤다.
* * *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미소로 대답하고 폰을 내린 빅터 차는 차 시트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새벽으로 달려가는 이런 시간에 이렇게 차에 앉아 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삶을 누리자면 해야 할 일이 우선이다.
‘함인건,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거냐?’
마음속으로 물음을 던진 빅터 차는 차가운 비웃음을 입에 물었다.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한줌 값어치도 없는 애국이니 애족이니 정의니 하는 사상이다.
그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숟가락까지 빼앗는다.
‘몽상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개처럼 죽는 거지.’
더 진한 미소를 흘려내던 빅터 차는 자신의 지난 삶을 떠올렸다. 보육원에 엄마가 버리고 간 아이, 일곱 살이란 나이가 많아 해외입양도 어려웠던 거지같은 삶, 운 좋게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거듭된 파양의 세월.
“한국, 너희가 나에게 준건 정말로 많다. 그걸 갚자면 끝이 없을 거야.”
한 맺은 중얼거림을 흘려낸 빅터 차는 다시 폰을 귀에 댔다.
“진행해.”
명령을 내린 빅터 차는 눈을 감았고, 운전자는 차를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