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40화 (140/200)

황혼의 살인자. 140. 팍스아메리카나.

140. 팍스 아메리카나.

“으……”

가는 신음을 흘리며 함인건은 눈을 떴다. 형용하기조차 힘든 고통이 가슴과 팔다리에서 피어나고 있다. 아니 고통이 아니라 불같은 뜨거움이다.

“바로 죽지는 않을 거야.”

선명하게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 함인건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상대를 봤다.

누군지 알아봤다. 미국대사관의 2등서기관이다.

저들에 대해선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안다. 그런데 저자는 그냥 서기관이 아니다.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구나……!’

빙긋이 미소 짓는 자, 목소리를 던졌던 남자는 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다.

직전에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약물을 주입해 함인건 자신이 아직 죽지는 않을 거란, 이렇게 깨어났다는 소리다. 하지만 결국 죽는다.

‘시간이……’

없다. 함인건 자신이 알지 못할 이런 장소에 끌려왔다는 걸 아는 이들이 없다. 총격을 맞아 위중한 상태라는 건 더욱이나 모른다. 경호팀은 전멸한 거다. 그런 상황을 국정원 내에서 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계획된 일.’

원장 차승환과 만나던 자리였다. 그런데 이렇게 됐다.

미국이 행동에 나섰다.

예상하던 대로다. 하지만 이렇게 전격적으로 공격할 거라곤 생각 못했다.

더군다나 원장 차승환을 엮어서다, 이어지는 게 그것뿐일까?

“대강 눈치 채는 눈인데?”

미소로 다시 말을 낸 자, 빅터 차라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함인건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현재의 몸 상태로 인한 고통이 겹쳐진 얼굴이다.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 궁금하지?”

비정한 미소를 흘려내는 남자,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빅터 차다. 너희가 파악하지 못한 CIA 에이전트지. 이번 일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자야. 아마 다음엔 극동지부장 자리가 내 것이 돼 있겠지?”

고통의 열기와 분노 속에 부들거리던 함인건은 이어지는 말이 얼어붙었다.

“네가 부리던 비밀조직은 이제 사라질 거다.”

g6를 말함이다.

황철현의 종말팀을 포함해 그들은 보광동 안가에 있다.

그곳을 이들이 공격할 거란 이야기다.

그럴 수 있는 기반을 함인건 자신이 제공한 거다.

카페 앞에 세워둔 자동차, 내비의 기록을 안 지웠다.

“정말 쉽게 찾았다.”

상대, 빅터 차의 미소와 말처럼 아주 손쉬웠던 거다. 함인건 자신의 차가 이동한 경로와 위치를 파악하면 나오는 거다. 그러니 기록을 매번 지웠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시간이 없단 건 핑계, 안일했던 결과다.

“보광동 거점에 잠시 후면 큰일이 생길 거다.”

다시 입을 연 자, 빅터 차는 미소를 지운 얼굴로 강렬한 눈빛을 냈다.

“거기 채널러들이 있잖아, 그렇지?”

함인건이 고통에 겨워 부들거리는 앞에서, 응급처치만 받은 상태로 의자에 결박된 모습을 보면서, 빅터 차는 미국의 위대함에 대해 말한다.

“미국에 의한 질서, 미국의 주도하는 세계평화는 불변의 가치인 거다. 미국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 가치를 이루고 수행하기 위해 모든 걸 다할 거야. 너희 같은 것들이 끼어들어 설치면 절대 안 되는 거야.”

불을 토할 것 같던 빅터 차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어 내는 목소리도.

“대단하다는 말은 해줘야겠구나.”

무엇을 대단하다고 하는 것인지 함인건을 알아들었다. 채널링연구, 채널러들을 양성한 결과다. 하지만 지금 말했듯이 미국 앞에 고개를 들었으니 대가를 준다는 거다. 한국 따위는 다신 그러지 못하게 한단 거다.

“고초희를 귀신이 죽였지.”

담담하지만 묵직한 무게가 실린 목소리로 빅터 차는 계속 말했다.

“장례식장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초희 때문에 말이야?”

무슨 소린지 안다. 고초희는 엄청난 파워의 염동력을 발휘했다. 그건 숟가락을 구부리거나 하는 수준이 아닌 거다. 주변 사물을 무기화해 적에게 날려 보내는, 벽과 천장의 콘크리트를 떼어내 날리는, 무서운 힘이었다.

“그런 수준의 채널러가 한국에 있었다는 것에 정말 놀랐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고초희를 죽인 자였어. 귀신 장철, 그자는 이해불가 한 존재야.”

새삼 감탄을 삼킨 얼굴로 빅터 차는 물었다.

“귀신 장철의 시체를 너희가 가져간 걸로 안다. 그는 정말로 죽었나?”

함인건은 고통 속에 신음만 흘렸고 빅터 차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죽었겠지, 죽었어. 그렇게 무지막지한 총격을 맞고 살 순 없지. 아무리 채널러라고 해도 그건 안 돼. 그래서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죽였을 거야.”

자신들이, 미국이 귀신을 죽였을 거라는 소리다. 그렇게 흘러갈 결과였단 거다. 그 흐름이 지금 눈앞에 있다. g6의 모든 것이 사라질 위기다.

“너희가 대단한 능력의 채널러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안다.”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 빅터 차는 함인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중국과 일본, 제대로 했더구나.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한국이 우수한 채널러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함인건의 비밀조직이 그렇다는 인정이다. 하지만 그 우수함도 미국의 힘 앞에서는 소용없다는 눈빛을 빅터 차는 흘려낸다. 이어내는 이야기는 가슴 속의 의문이다.

“내가 정말로 궁금한 건 말이지……”

제대로 눈을 뜨고 버티기도 힘든 함인건, 그 얼굴 앞에 빅터 차는 얼굴을 디밀었다.

“함인건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

부들거리는 안면에 힘을 준 함인건은 빅터 차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렇게 지금 들은 말의 진정을 인지했다. 이자는 정말로 그것이 궁금한 거다.

“국정원을 장악한 젊은 기조실장, 미국에서 공부한 엘리트, 네가 꿈꾸고 원하는 건 대체 뭐야? 오성회를 이용해 뭘 하려던 거야? 존재하지도 않는 선생님을 내세워 노리던 게 뭐야? 설마 정말 그런 건 아니지?”

정말 그런 거, 그게 뭔지 빅터 차는 제 입으로 말한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 진정한 민주주의, 의로운 대한민국의 번영.”

함인건은 눈가를 떨었고 빅터 차는 디밀었던 얼굴을 뒤로 물렸다.

“정말로, 진짜로 이해가 안 돼.”

함인건을 보는 빅터 차의 눈에 복잡한 분노가 어린다.

“그런 생각을 갖는 거 자체를 이해 못하겠어. 대체 이 나라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뭘 해줬다고? 함인건 너도 나랑 다를 게 없잖아? 억울하게 자살한 아버지 복수를 꿈꾸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데 이건 뭐냐는, 함인건 네가 하려는 일이 뭐냔 거다.

“진짜 목적은 다른 거지? 이 나라의 정권을 좌우하는 힘을 갖고 이익을 취하려던 거지? 오성회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할 만큼 해먹고 누리다가 가는 거였지? 엄청난 돈을 끌어 모아서 해외로 튀는 시나리오지?”

연이어진 물음은 빅터 차의 진심의 발로이기에 강한 힘이 실렸다. 하지만 그런 거지? 라고 거듭 눈으로 묻던 빅터 차는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함인건의 눈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이없고 황당한 분노가 치민다.

“넌 바보냐?”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겼다. 세상 이라는 현실과 그에 맞서는 가치관에 관한.

“이제 다 끝났다.”

체념의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빅터 차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네가 꿈꾸던 모든 것이 사라질 거다. 비밀리에 연구한 자료들은 미국이 가지게 될 거야. 물론 우리입장에선 그다지 가치 있는 게 아닐 수 있지. 그래도 중국과 일본을 주물러준 힘이니까, 심안이란 것도 흥미롭고.”

섬뜩하게 차가운 미소를 피워낸 빅터 차는 결론을 뱉었다.

“너희는 죽는 거다. 그걸 지켜보던 너도 죽을 거고.”

빅터 차는 태블릿을 테이블에 올려 함인건의 앞에 들이 밀었다. 영상이 흘러나온다. 보광동 안가로 접근 하는 미국요원들이 보내는 영상이다.

‘제발……’

흐려져 가는 시선에 힘을 실으며 함인건은 간절하게 기원했다.

저 기습을 인지하고 부하들이 파하기를, 대응하기를.

그런데 그럴 가능성이 없다. 저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정말로 다 사라지는 거다.

‘아니야, 귀신이라면……!’

함인건이 눈을 갑자기 부릅뜨는 이유를 몰라 빅터 차는 미간을 좁혔다.

* * *

“이상한데, 너무 텀이 긴데……”

미간을 깊게 좁힌 조중건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저녁시간도 지나 밤 9시가 되고 있다. 그런데 함인건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다.

수시로 상황을 체크하고 지시를 내리던 상황이었기에 이건 좀 불안한 상태다.

‘국정원에선 외부로 나갔다는 건데……’

이런 때 이편에서 연락할 수 있는 몇가지 다른 수단을 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또 든다. 귀신 장철의 영상을 보낸 폰은 이미 없앴는지 불통이다. 함인건이 다른 폰으로 연락해 와야 소통이 가능하다.

“불안하십니까?”

황철현이 묻자 조중건은 미간을 진하게 찌푸렸다.

“음, 왜 그런지 자꾸 불안해.”

“피곤하셔서 그런 거 같습니다. 부상 중인데도 제대로 쉬질 못하셨잖아요?”

“후, 피곤하긴 하지.”

깊은 숨으로 피곤을 몰아내려는 듯 조중건은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런데 그 순간 황철현이 눈을 꿈틀한다. 모니터 속 귀신이 일어섰다.

“귀신이 할 말이 있나 봅니다.”

카메라를 향해 손짓하는 귀신 장철, 조중건과 황철현은 바로 움직였다. 부하요원들로 하여금 할 말이 뭔지 듣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갔다.

7호실 앞에 선 두 사람은 서로를 본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물음을 던진 조중건은 바로 대답을 들었다.

“적의를 품은 자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황철현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달려갔고 조중건은 뒷말을 들었다.

“채널러들이 있습니다. 기운을 숨기는 자들, 무섭게 강한 자들입니다.”

경직한 표정을 깨고 바로 돌아서려던 조중건은 귀신의 요구를 들었다.

“무기를 주십시오. 전에 쓰던 칼 같은 거면 좋겠습니다.”

전에 쓰던 거, 조중건은 기억 속에서 찾아냈다. 귀신이 휘두르던 작두칼이다. 그런 건 없다. 하지만 비슷한 건 있다. 특수전용정글도, 분명 있다.

조중건이 황철현처럼 달려가는 뒤에서 귀신 장철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

* * *

“시작해.”

폰에 대고 명령을 던진 빅터 차는 차가운 미소를 안면 가득 피워냈다. 의자에 묶여 곧 죽을 모습으로 부들거리는 함인건을 돌아보고 다시 태블릿을 봤다. 공격팀이 보광동 안가로 치고 들어가는 광경이 선명하다.

“진짜 채널러들의 힘이 뭔지 알게 될 거다.”

진한 향을 풍겨내는 커피를 음미하며 웃는 빅터 차, 지금 뱉은 말의 의미를 알기에 함인건은 더욱 더 부들거렸다 미국의 보유한, CIA가 보낸 채널러들이 있다. 그들은 분명 고초희에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자들이다.

“아쉽단 말이지. 귀신이란 자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 체널러요원들과 파워를 비교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그래, 아쉬운 마음은 접고 잘 보도록 해라. 우리가, 미국이 가진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함인건은 경련하는 시선을 경직하며 봤다. 보광동 안가가 공격당하는 모습을. 그러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귀신이 사신이 돼 저들을 죽이기를.

* * *

폭발음이 들리고 건물이 진동한다.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충격이다.

그런데 지진이 아니라 적의 공격의 의한 것임을 안다.

적들이 진입했다.

‘누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장철은 생각했다. 대림동에서 당한 중국의 반격인지, 판교에서 당한 일본의 소행인지다. 그런데 그렇다기엔 너무 빠르다.

“받아요!”

조중건이 소리치는 복도반대편으로 돌아선 장철은 날아오는 물건을 받았다. 반팔 길이의 특수전나이프 두 자루다. 케이스를 버리고 양손에 쥐었다.

“2팀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황철현이 외치는 목소리에 반응하며 장철은 바로 움직였다.

벼락같은 스피드로 조중건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철현과 김충식등의 종말팀이 총을 겨누고 있는 위치도 지나갔다.

불길이 덮은 계단에 2팀이 싸우고 있다.

귀청을 찢을 듯한 괴성이 울린다.

적들, 스토퍼들의 파워가 엄청나다.

2팀이 제대로 움직이질 못한다. 여섯 명 중에 두 명은 벌써 당했다. 일반요원들이 쓰러진 건 말할 필요 없다. 장철은 고함치며 달려 올라갔다.

“물러서!”

2팀장과 네 명의 채널러요원들이 다급하게 길을 내주는 속으로 장철은 폭발하듯 치고 올라갔다. 괴성으로 스토퍼의 능력을 퍼붓는 자와 충돌했다.

장철은 스토퍼를 충돌하고 나갔고, 스토퍼는 두 동강이 된 채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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