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49화 (149/200)

황혼의 살인자. 149. 여름은 간다.

149. 여름은 간다.

“후아, 지독하게 덥네.”

옷자락을 털며 흐르는 땀을 닦는 유지건, 바로 옆 조수석의 송치호를 뒤에서 보던 최재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문을 열었다. 차 밖도 뜨겁고 덥긴 매한가지지만, 한증막이 저리 가라인 한여름 차안 보다는 낫다.

“팀장님, 죽것슴다. 아이스커피라도 사다 먹죠.”

애원하는 어조의 유지건을 돌아본 최재우는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복근무하다가 돌아가시겠다.”

신이 난 얼굴로 유지건은 후다닥 사라졌다. 그 꽁무니를 바라보던 송치호는 트라팔가가 보이는 대로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봄에 마약사건으로 사장과 지배인을 수갑 채웠던 곳, 그러나 마약은 근절되지 않았다.

“밤이 낫지 않겠습니까?”

“시원하기야 하겠지만, 저 새끼들도 대가리가 있는데 밤이 더 주목 받을 시간이란 걸 모르겠냐? 하 대담한 새끼들, 잡아갈 테면 그러라는 거지.”

클럽 트라팔가를 중심으로 한 마약유통의 흐름은 점점 더 대담해지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중이다. 말한 것처럼 대가리가 있어서 그런 건지 수법도 교묘해졌다. 이젠 가정에까지 마약류가 침투하는 상황, 위험하다.

“에어컨을 켜지 않는 이상 차 안에서 잠복은 무립니다.”

송치호의 불만스러운 얼굴을 응시한 최재우는 같은 눈으로 차를 봤다.

에어컨만 켜만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소리를 내는 차, 손을 봐야 하는데 이러고 있다. 다른 차량으로 교체라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홍형사더러 바꿔가라고 전화할까요?”

그 생각을 안 한 게 아니어서 최재우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라고 말하려는 데 전화가 운다.

‘응?’

박인수다. 서울청 광수대 책임자로 승진해 간 그가 웬일로 전화했나.

“여보세요?”

-여 최팀장, 오랜만이야.

정말 그렇긴 하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도 거의 끝물이니까. 그런데 시간으로 따지면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잘 지내시죠?”

-뭐 광수대 일이 그렇게 두나. 최팀장은 어때, 잘 지내지?

“저야 뭐 별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도 잠복중입니다.”

-그래, 들었어. 그래서 지금 내가 가는 중이야.

“예?”

이게 무슨 소린가 눈을 크게 떴던 상황을 알았다.

최재우는 우회전 해 빌딩 사이로 들어오는 차량의 운전자를 확인했다.

통화상대방 박인수다.

-짠.

웃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외마디를 뱉으며 차를 세운 박인수가 내린다. 손에는 시원은 음료가 들려 있다. 송치호가 반색하며 다가가 받는다.

“어이구 감사합니다요.”

“수고가 많아 송형사.”

송형사가 유지건에게 급히 돌아오라고 전화를 거는 동안 박인수는 최재우에게 용건을 밝혔다.

“최팀장이 보고 있는 저기 트라팔가, 저 새끼들 때문에 왔어. 쟤들 마약을 대주는 중간업자 새끼를 털었는데, 편도진이라고 우리가 잡으려던 살인자새끼가 얽혀 있더라고. 아무래도 공조수사를 해야겠지? 괜찮지?”

얼떨떨한 표정이던 최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뭐……”

“후아 덥다 더워.”

빌딩과 빌딩 사이의 골목 같은 공간, 벽 아래 놓인 에어컨 실외기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숨이 막힌다. 박인수는 자신의 차로 들어가며 손짓한다.

“들어와, 거기 서 있다간 쪄죽겠다.”

송치호가 낼름 먼저 차에 올랐다. 최재우가 조수석에 오르는 데 유지건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송치호가 내미는 커피음료를 받으며 뒷자리에 탄다. 그렇게 시원한 차안의 에어컨 냉기 속에서 모두가 음료를 마셨다.

“모르지?”

생뚱맞게 나온 박인수의 말, 최재우는 미간 좁히고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박인수의 눈을 보고 직감했다. 귀신 장철, 그와 관련된 이야기다.

“뭐 아시는 거 있습니까?”

되물음을 던진 최재우는 시원한 커피음료를 넘기며 기대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귀신은 공식적으로 죽었다. 그렇지만 그가 살아 있다는 설이 온오프라인을 장악했다.

‘여름은 다 가고 이제 가을이 오는 데……’

그렇지만 귀신은 잊혀가고 있다. 그가 벌였던 사건들도 새로운 사건 사고에 묻혔다.

엄청난 내용으로 사람들을 들썩거리게 했던 채널링전쟁.

그렇게 명명되어진 엄청난 사건들도 흐려지는 중이다.

참 쉬운 세상이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살인사건이 있었어.”

무심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낸 박인수는 잠시 창밖 하늘을 보고 다른 소릴 한다.

“파랗고 높아지네, 확실히 가을이 오는 모양이야.”

뒷자리에서 빨대를 쪽쪽거리고 얼음을 아삭거리던 유지건이 끼어든다.

“태풍이 두어 번 와야죠.”

맞는 말이다. 가을이 되기 전에 태풍은 늘 찾아왔다.

반갑지 않은 불청객, 후유증을 주고 간다.

올해는 또 어떤 피해를 주고 갈지 걱정이다.

“피살자들이 하대근 하규진, 부자지간이야.”

미간의 선을 조금 더 선명히 하는 최재우를 힐긋 본 박인수는 계속 말했다.

“하씨 성을 가진 부자지간의 두 피살자, 그들은 하은주와 한때 가족이었지.”

하은주란 이름을 들은 순간 최재우는 경직했다.

귀신 장철의 여자, 장민지의 엄마였고 장영의 할머니인 여인이다.

그녀는 오래 전에 사망했다.

“하은주요?”

귀신의 아내를 말하는 겁니까? 그걸 말하는 거죠? 란 말은 눈으로 밖에 내지 못한 최재우, 박인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뒷말을 이어냈다.

“하은주의 인생을 망치는데 일조한 자들이지. 그래선지 부자가 그렇게 유복한 삶을 살고 있진 못했더라고. 그들에게 누군가 찾아갔지. 하규진이 살던 월세집에, 하대근이 근무하던 아파트에, 아주 잔인하게 죽였어.”

말끝에 박인수는 폰을 내밀었다.

사건 현장 사진, 끔찍한 최후를 맞은 두 피살자를 본 최재우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심하게 경직했다.

“보면 알겠지만 지독한 원한을 가진 자에 의한 살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살인이지.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빌라주변, 아파트안팎의 cctv와 블랙박스 카메라 등에 모습을 남겼어. 그까짓 건 개의치 않는 거지.”

그런 정도는 상관 안하고 일부러 남긴 것 같은, 그런 남자에 대해 안다.

‘그자!’

보광동에서 미국채널러들을 박살 낸 자, 대림동과 판교를 까부순 사내, 소공동 백화점과 동두천 염색공장을 문지른 자, 미중일을 희롱한 존재.

‘귀신……!’

귀신이라고 예감하는, 확신하는 남자다.

그가 하대근이란 노인과 하규진이란 중년사내를 살해했다.

살해된 자들은 하은주를 망가뜨린 자들이다.

‘복수, 아니 응징의 판결.’

그것임을 최재우는 깨달았다.

귀신이 아내의 복수를 한 것이다.

그 젊은 사내는 귀신이 확실하다.

그런데 귀신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사건사고들을 검토하다 알게 됐지. 워낙 참혹한 사건이어서 말야.”

다시 목소릴 낸 박인수는 냉기가 식어가는 카피음료를 한 모금 넘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보자마자 알았어. 귀신이라고, 그가 확실히 살아 있고 남은 일을 한 거라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쥔 박인수를 바라보며 최재우는 넋 나간 듯한 시선을 차 밖으로 돌렸다. 박인수 말대로 하늘을 파랗고 높게 펼쳐져 있다.

“귀신에 대해선 입에 담지 않는 게 금기 아닌 금기가 됐지. 채널링이란 단어는 더욱 그렇고 말야. 그렇게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는데 없던 것처럼……”

허탈하게 나오는 박인수의 숨소리에 최재우는 깊은 공감의 숨을 흘려냈다.

이젠 채널링전쟁이란 것이 없다.

그 후로 아무런 일도 생겨나지 않았다.

지독한 여름 더위에 실려 온 각종 사건 사고들이 기억을 덮어갔다.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선 전쟁을 하고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해.”

이어 나온 박인수의 확고한 음성, 최재우는 역시 깊게 동감했다.

‘귀신.’

그는 전쟁 중인 거다. 국정원 그림조직과 하나가 되어서, 나라 안이든 나라 밖이든, 그가 있어야 할 곳에서, 치러야 할 전쟁을 수행중인 거다.

“여름이 되면서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말이야.”

다시 귀를 파고든 박인수의 말, 최재우는 고개 돌려 시선을 맞췄다.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의 간부회의에서 일어난 대량살상사건, 그가 했다고 봐. 외국 범죄조직이나 경쟁조직의 암살자라고 하지만 개소리지.”

최재우는 눈 밑을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경련 같은 그 반응 속에 뜨거운 숨을 삼켰다. 누가 했는지도 모를 사건, 일본열도를 발칵 뒤집은 학살, 그걸 귀신이 했다는 거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감했던 일이.

“세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일을 품고 흘러나는 거니까.”

귀에 박히는 박인수의 뒷말에 최재우는 소름을 피워냈다.

‘알지 못하는.’

귀신은 싸운다.

미국에선지 일본에선지 중국에선지 모르지만 싸운다.

보이지 않게 벌어지고 있는 그 전쟁은 언젠가 결과를 맺을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떠할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겠다.

“이렇게 사는 거죠.”

중얼거리듯 흘러나온 최재우의 대답 아닌 대답, 박인수는 피식 웃는다.

“맞아. 이렇게 사는 거지.”

남은 커피음료를 마시는 박인수와 최재우의 뒤에서 유인주와 송치호는 서로를 돌아봤다. 그러다 히죽거리는 유인주를 송치호가 쥐어박았다.

하늘은 파랗고 높게 가을을 풀어내고 있었다.

* * *

-버지니아 랭글리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지명입니다. CIA 본부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해 다수의 인명피해가 생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 정부는 사태와 관련해 비상 대응조치를……

화초에 물을 주던 유인주는 TV를 힐긋 돌아봤다. 뉴스채널에서 흘러나오는 미국 사건 뉴스는 생뚱맞은 동시에 별스럽다. CIA에 불이 난 거다.

“뭔일이래?”

마뜩찮은 표정으로 TV를 돌아봤던 유인주는 다시 베란다 창밖 하늘을 봤다. 푸르고 높은 하늘은 천고마비의 계절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다. 이런 계절에 잘 섭생을 잘해야 한다. 살만 쪄서는 안 되고 정말 실하게.

‘장어 재 놓은 거 구워주면 효과 있겠지?’

헤헤 웃으며 유인주는 남편 최재우를 떠올렸다. 오늘 저녁 특식이 준비 돼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런데 그거 먹고 확실히 해야 한다. 이번 해를 넘기기 전애 아이를 갖는 거다. 내년엔 마흔 셋이다.

‘으이그, 꼰대가 돼 가고 있으니.’

남편의 나이를 생각하면 서둘러야 한다. 그래서 불안증에 검사를 해 봤지만 둘 다 이상 없다.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거다. 그러니 좋은 거 먹이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면 된다. 내년엔 꼭 아기를 안고 있을 거다.

“헤헤헤.”

머리에 꽃 꽂은 여자 같은 웃음을 흘려내던 유인주는 TV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각에서 제기 되고 있는 주장, CIA가 공격당했다는 이야기는 점점 더 확산되는 중이라고 합니다. 공격당한 배경으로 채널링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CIA가 주체가 되어 비밀리에 해온 채널링 연구가 사건의 도화선이라는 주장입니다. 타국과 보이지 않는 경쟁으로 막후전쟁상태……

채널링이란 말에 반응한 유인주는 TV앞으로 홀리듯 다가갔다.

-채널링과 관련한 사건은 국내에서도 세상을 놀라게 할 절도로 크게 발생했었습니다.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잊히던 일, 채널링이란 말이 다시 현실로……

유인주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귀신 장철.’

그는 죽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귀신처럼 움직이고 있다. 그게 어딜까.

뉴스화면 속 불타는 CIA본부를 보며 유인주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미간을 좁히게 하는 뉴스가 이어 나온다.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이번 화재 사건으로 CIA의 극비정보들이 유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중엔 북극의 빙하가 녹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그로 인한 괴변사건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은 상황……

좁힌 미간으로 TV를 보던 유인주는 현실로 돌아왔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고 이해도 못할 사건이야기를 털어내고, 다시 베란다의 화초들에 물을 줬다.

푸르고 높은 하늘 속의 가을 해는 따사롭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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