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54화 (154/200)

[외전] 종말전야. 4. 행운의 룰.

4. 행운의 룰.

일요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은행을 나서는 지금 이 순간을 상상하면서 보냈지만 현실이 된 월요일의 지금 이순간은 정말로 짜릿하다.

‘이십억이 넘는 돈이 통장에, 내 통장에 들어 있는 거야!’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환희를 삼키며 한건은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불편한 걸음과 남들의 눈길 따위 지금 이 순간 하나도 의식되지 않는다.

로또에 당첨돼 세금을 제하고 20억이란 거금을 수령해 돌아가는 길이다.

‘세금을 엄청 떼긴 하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며 한건은 그 부분을 생각했다. 일등이 둘이라 분할된 담청금은 삼십억이 넘는 액수였다. 거기서 30프로를 세금으로 떼니 거의 십억이 날아갔다. 불로소득이니 할 말은 없지만 아깝긴 하다.

‘어쨌든 내게 행운이 찾아온 건 맞아.’

주먹을 움켜쥐고 승강장에 선 한건은 새삼스레 주변을 돌아봤다.

‘이런 시간에 서울시내에 들어온 건 처음인가.’

월요일 오전시간이 다 가지 않은 지금 서대문역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도 한주를 시작하며 제 할 일을 좇아 움직이는 사람들은 분주하다.

‘휴가 나와서 응삼이와 병철이 만날 때를 제외하곤 그렇군.’

물론 그 이전엔, 부모님과 살던 어린 시절엔 서울 안에 있었다. 학원에서 돌아와 집이 불타고 있던 걸 보던 그날까지는 서울 시민, 그렇게 살았다.

“후우.”

옛 기억에 깊은 한숨을 내쉰 한건은 지금 이순간의 현실을 다시 만끽했다.

‘이제 돈 걱정은 안 해도 돼.’

이십억이 통장에 있다. 엄청난 거액이다. 물론 사람들 표현처럼 강남의 아파트 한 채 살돈도 안 되지만, 보통사람들은 평생 일해도 못 만질 돈이다. 일해서 집사고 저축해 돈을 모으고 한다는 소리는 이젠 헛소리다.

‘주식에 빠지고 코인에 올인하고.’

그런 세상이 됐다. 그래야 하는 세상인 거다. 그러지 않으면 미래를 꿈꿀 희망이 없기에 그렇다. 도대체 누가 이따위 세상을 만든 건지 모르겠다.

‘응?’

개탄스러운 세태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던 한건은 수상한 남자의 시선을 느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데 힐긋거리다 눈을 돌린다.

‘혹시?’

이야기로만 들었던 일이 아닐까 한건은 불안을 삼켰다. 로또 일등 당첨자를 노린 일, 조직폭력배부터 각종사회단체까지 달라붙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일은 실제로 없다고 한다. 대부분 과장된 이야기란 거다.

‘내가 로또 당첨자인 걸 어떻게 알고?’

그런데 그건 새어나가자면 방법이 없진 않을 거다.

‘정말 그렇다면……!’

한건은 점퍼 안쪽에 착용하고 온 삼단봉을 어루만졌다.

성할 때 같으면 네댓이 덤벼도 물리칠 테지만 불구가 된 몸으로는 무리다.

그래서 삼단봉을 지니고 왔다.

이걸 사용해야 할 상황이 안생기기를 바랄뿐이다.

‘물리력을 쓰는 일이면 으슥한 곳에서 할 거고, 기부를 부탁하는 일이라면 집에 쫓아오겠지.’

상황별로 예상하며 대응을 그리던 한건은 전철이 들어오자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수상한 젊은 남자를 봤다.

역시 확실하게 이쪽을 곁눈질한다.

‘응?’

남자가 갑자기 이쪽으로 다가온다. 빠른 걸음으로 온다.

한건은 점퍼 속으로 손을 넣었다. 물리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닥쳤다는 판단에서다.

그런데 남자는 곁을 지나쳤다.

돌아보니 젊은 여자에게 다가가 팔을 잡는다.

“미애씨.”

어머 하며 놀라는 젊은 여자에게 남자는 애원하듯이 말한다.

“사랑합니다. 제발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때마침 전철이 멈춰 문이 열렸다.

전철에서 내리고 오르려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봤다.

남자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간절히 구애한다.

여자는 당황해 얼굴이 발개졌고, 승강장의 남자 몇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받아줘! 받아줘!”

전철역 안을 울리는 그 소리는 다른 이들의 입에서도 터져 나왔다. 젊은 여자는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돌아서 달려갔고 남자는 그 뒤를 쫓아갔다. 그 광경을 지켜본 한건은 허탈한 숨으로 미소 지었다.

“용기가 좋네……”

남자를 오해했다. 한건 자신을 노리는 자가 아니라 여자에게 사랑을 구해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장소에서 저럴 수 있다는 게 보통 용기 가지곤 안 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스토킹이나 성희롱으로 몰릴 수도 있는 거다.

“사랑…… 좋지.”

부러움과 감탄이 든 미소를 흘리며 한건은 전철에 올랐다.

* * *

현관문을 잠그고 거실에 발을 들인 한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은 안 생긴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던 불안이다. 서대문역에서 남자를 오해했던 것처럼 상상과 억측이 만든 불안이었다.

‘한건, 정말 많이 약해졌구나.’

피식 웃은 한건은 점퍼를 벗고 삼단봉케이스를 내려놨다. 끓여놓은 보리차를 따라 단숨에 마시고 앉았다. 거실 벽을 등지고 앉아 생각했다.

전철을 타고 오면서 한 생각, 이 행운이 연속해서 행운을 주는 지다.

‘쓰는 대로 이뤄지니까, 그게 법칙이라면……’

로또당첨을 또 쓰는 거다. 그러면 다음 주에 또 당첨이다.

그런데 다음 주까지 기다릴 거 없다.

이번엔 즉석복권을 긁는 거다. 당장 해보는 거다.

“까짓 거.”

방으로 들어간 한건은 pc를 켜고 한글을 띄워 내용을 썼다. 바로 집을 나가 편의점으로 향했다.

* * *

“안녕하세요, 어젠 감사했습니다.”

편의점 알바아가씨의 진심어린 미소를 보며 한건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요.”

“그래도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시죠?”

“아네, 괜찮습니다.”

대답한 한건은 알바아가씨의 시선이 불편한 왼다리를 훑고 가는 걸 느꼈다. 그게 동정이나 다른 감정이 아니라 저런 몸인데도 잘 싸웠네, 하는 감탄이고 감사라는 걸 알겠다. 아가씨는 준비한 건지 선물을 꺼냈다.

“제가 달리 감사할 방법이 없어서요.”

예쁜 포장지로 싼 선물상자, 그걸 내미는 알바아가씨의 진심을 한건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아 말없는 미소로 받아 개봉했다.

“와, 올 겨울은 따듯하겠네요. 고맙습니다.”

체크무늬 목도리다. 그걸 목에 두르고 한건은 웃었다. 정말로 좋아하고 이편을 배려하는 반응과 미소, 그 진심을 느낀 아가씨도 수줍게 웃었다.

“오늘은 뭐가 필요하세요?”

“아예, 다른 게 아니고…… 음 즉석복권 한 장만 주십시오. 아니 다섯 장요.”

알바 아가씨는 기묘한 눈빛을 냈지만 이내 감췄다. 어제도 강도와 그렇게 격투를 벌이고 로또를 사갔다. 천원어치 한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즉석복권이다. 늘 식료품만 사가던 사람이었기에 이 변화가 안타깝다.

‘이런 거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군.’

나름의 짐작과 안타까움을 삼키는 알바아가씨, 그 속생각을 짐작하며 한건은 즉석복권을 받았다. 한 장 사려다가 다섯 장을 샀다. 이젠 이걸 긁어 행운의 크기와 연속성을 시험해 보는 일이 남았다. 심장이 뛴다.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알바 아가씨의 인사를 받으며 돌아선 한건은 부지런히 집을 향해 걸었다.

* * *

“음.”

된 숨을 내쉬며 한건은 마지막 복권을 긁었다. 하지만 역시 꽝이다.

다섯 장 모두 꽝이다.

이결과로 알 수 있는 건 행운이 연속되진 않는 다는 거다.

이 건은 돈과 관련된 것, 이미 겪은 사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천변 산책로 범인과 은혜교회 사건, 조영철은 연속해서 됐어. 아, 연재글도.’

그렇다, 하루의 시간차가 있었지만 쓴 대로 이뤄졌다. 그 흐름대로라면 이것도 돼야 한다, 로또는 토요일이었고 즉석복권은 월요일이니 그렇다.

그런데 안됐다. 이게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법칙인 거다.

‘행운의 룰.’

꽝이 된 즉석복권을 들고 한건은 허공을 노려봤다.

‘나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되는 일에는 제한이 있다……’

그런 것 같다, 물론 짐작이지만 예감이 강렬하게 든다. 로또와 같은 이득은 네 번의 사건과는 다르다. 한번은 주지만 화수분처럼 주진 않는 거다.

‘연재소설이 일등 한 것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고 봐야하겠지. 아무튼 이런 직접적인, 금전적 행운은 한번 뿐인가? 다시 되나? 된다면 언제 또 가능한 거지? 일주일이나 한 달?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야 되나?’

알 수 없다. 어쩌면 두 번은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더 큰걸 생각하고 쓰는 건데 하는 아쉬움도 없다.

애초에 한건 자신은 빈털터리였다.

이십억이란 거금은 늙어 죽을 때까지 못 모을 행운이다.

‘제어하지 못하는 욕심은 화를 불러.’

늙은이 같은 소리지만 그게 맞다고 확신한다.

옛날이야기나 고전에서 나오는 사례는 그저 교훈이 아닌 거다.

감당하지 못할 욕심은 끝내 제 자신을 잡아먹게 되는 거다.

칸다하르에서 그 진리를 뼈저리게 느꼈다.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소대원들과 떨어져 자히르를 잡으려고 달려갔다.

부대원들을 살해한 놈, 잡을 수 있었다.

놈의 은신처를 습격해 거의 잡았었다. 그런데 그게 함정이었다.

폭발물을 설치해 놓은 놈의 덫에 걸려 이런 꼴이 된 거다.

‘소대원들이 뒤따라오지 않았더라면……’

그보다도 폭발이 절반밖에 이뤄지지 않아서 목숨을 건졌다.

그 대신 다리를 잃은 거다.

절단은 하지 않았지만 파편들이 근육의 주요부위와 신경을 손상해 불구가 됐다.

그때 분노와 만용을 다스렸다면 결과는 달랐다.

“어?”

한건은 갑자기 드는 생각에 눈썹을 확 곤두세웠다.

‘내 다리……’

쓰는 대로 이뤄지는 거다.

로또도 당첨돼 이십억을 수령했다.

다리라고 안 될 거 없다.

아니 안 될 수도 있다. 이게 개인적인 이득과 같은 궤라면 안 될 거다.

하지만 이건 금전이득과 다르다. 일단은 써보는 거다.

‘해 보자!’

시큰 거리게 어금니를 물었다 푼 한건은 자판을 두들겼다.

* * *

“우웅.”

두 팔을 위로 뻗으며 한건은 몸을 뒤틀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는 아침에 이렇게 기지개를 켜지는 않는데 오늘을 저절로 이렇게 하고 있다. 서대문까지 전철타고 다녀온 게 피곤했는지 일찍 잤고 깊게 골아 떨어졌다.

“어으, 잘 잤다.”

개운한 느낌으로 이불을 걷은 한건은 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6시다. 어젯저녁에 9시에 잠들었으니 꽤 잤다.

개운함을 느끼며 매트리스를 짚고 일어섰다.

하품을 하면서 방을 나가 주방에서 보리차를 마셨다.

“많이 자서 그런가 몸이 개운한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물컵을 싱크대에 놓고 돌아서던 한건은 문득 멈춰 섰다. 저절로 좁혀지는 미간에 힘을 주며 시선을 내렸다. 다리를 봤다.

“다리…… 내 다리……!”

걸음이 온전하다.

방금 전 방을 나와 물을 마시고 돌아서던 이 순간까지 제대로 걸었다.

꿈이 아니다.

균형을 맞추려 절름거리던 걸음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걸음이었다.

오년 전에 잊어버렸던, 제대로 된 걸음이다.

“으허, 우하하.”

괴이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제대로 웃는 얼굴이 아닌 얼굴로, 한건은 걸음을 다시 냈다. 좁은 거실을 지나 방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그렇게 집안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리고 환호했다. 소리 없는 환호, 전율했다.

‘다리까지 됐어!’

행운의 돌이 해줬다.

불구였던 몸을 정상으로 만들어줬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따위는 이제 알 바 아니다.

원했고 이루어졌다.

이거면 됐다.

‘하루만에……!’

환호의 전율 속에서도 한건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어제 오후와 저녁시간 내내 다리의 변화를 지켜보고 기다렸다. 그러다 졸음이 밀려와 잠이 든 거다. 그렇게 자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됐다. 자는 사이 정상이 됐다.

‘갑작스러운 그 졸음이 관계가 있는 걸까?’

그런 것도 같다. 자는 사이에 몸에서 뭔가 변화가 생긴 거다. 그 여파로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켠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든 아니든 다리가 정상이 됐다는 이결과가 핵심이다. 이젠 남들처럼 걷고 뛸 수 있는 거다.

‘나가자, 걷고 뛰는 거야!’

흥분한 웃음으로 한건은 옷을 갈아입었다. 트레이닝복차림으로 집을 나서려다 문득 떠올렸다.

‘글로 쓰는 것만 되는 건가? 말하는 건 안 돼? 기록이 필요한 거라면 녹음은?’

떠오른 생각들을 곱씹던 한건은 뒤로 밀어냈다. 지금은 나갈 때인 거다.

“후아, 공기 좋네.”

천변 산책로를 향해 걸어간 한건은 가볍기 뛰기 시작했다.

오년 전에 영원히 잃어버렸던 달리기, 그래서 왼다리가 힘겨워 하지만 달렸다.

숨이 차서 가슴이 터지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아침 해가 환하게 비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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