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56화 (156/200)

[외전] 종말전야. 6. 다시 뛴다.

6. 다시 뛴다.

“후우, 후우.”

천변을 달리며 한건은 벅찬 희열을 만끽했다. 어제 다리가 정상이 됐다는 기쁨을 못 이겨 뛰었던 것과는 또 다른 오늘의 감흥이다. 하지만 체력이 바닥수준이라 30분이상 뛰는 건 아직 무리다. 여유를 가질 일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니까.’

속도를 줄이며 속보로 전환한 한건은 집 쪽으로 돌아가며 주변을 돌아봤다.

가을빛이 더 짙어가는 천변산책로엔 새벽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라는 난데없는 재앙 때문에 마스크를 썼지만 다들 열심이다.

‘살인사건도 금세 잊히는 분위기네.’

이혼한 아내와 아들을 살해하고 이곳에서 세 사람을 일본도로 더 해친 살인자, 그가 경찰관 여섯 명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은 벌써 지난주 금요일의 일로 흘러가 버렸다. 그 현장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다.

“자 이젠 근력운동으로 들어가 볼까.”

옅은 흥분이 든 미소로 한건은 운동기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헬스장에 있는 기구들과는 다른, 주로 노인들이 이용하는 운동기구들이 잘 돼있다. 하지만 그걸 지나쳐 철봉에 매달렸다. 턱걸이, 풀업을 시작했다.

“후욱, 흡.”

호흡을 하며 열두개씩 5세트의 풀업을 한 한건은 스쿼트로 이어갔다. 다리운동은 정말로 희망을 버렸던 것, 벅찬 감정과 흥분이 말할 수 없다.

‘좋아! 바로 이거지!’

다리의 자극과 근육의 펌핑감에 희열을 삼키며 한건은 런지로 이어갔다. 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5년간 불구로 지낸 몸이고 다리였다.

욕심을 낼 일이 아닌 거다.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는 건 담금질과 같다.

‘하루하루.’

마지막을 버피로 마무리한 한건은 흥건한 땀을 씻어내며 수통의 물을 마셨다. 운동시작하고 중간 중간 마셔댄 물은 어느새 거의 바닥이다.

‘뭐 오늘 운동은 끝냈으니까.’

개운한 마음으로 벤치에서 돌아서던 한건은 멈칫했다. 젊은 여자 때문이다. 도발적인 몸매를 드러낸 레깅스차림으로 운동기구에 붙어 있다.

실내체육시설에서나 할 법한 복장, 아가씨는 하등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대담한 건지……’

그렇다고 한건은 결론 냈다. 자신도 젊은이지만, 요즘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마인드다. 저런 걸 불편해 하거나 다른 마음과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욕먹는 일이다. 해 묶은 남녀 간의 논쟁도 그래서 빈발한다.

‘이상하다고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게 맞겠지.’

고개를 끄덕인 한건은 정말로 집에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움직임을 다시 멈췄다. 몸매를 과시하는 운동복차림의 아가씨가 엎드려서다. 정확하겐 허리를 굽혔다. 그 뒷모습을 주변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

‘저런 동작들은 실내에서나 하지.’

민망하다고 여길 스트레칭 동작들을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남의 시선을 즐기며 하고 있었다. 그런 아가씨와 한건은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 얼굴에 미소가 스쳐갔다, 마스크를 썼지만 분명하게 보인다.

저 미소가 비웃음인지 유혹인지 모르겠다.

뭐가 됐든 한건 자신과는 상관없다.

‘음.’

된숨을 내쉬며 한건은 몸을 돌렸다. 그런데 숨이 뜨거워진다. 아름다운 젊은 여자로 인한 자극이다, 다리가 불구가 되면서 사라졌던 본능이다.

의료진도 원인을 알 수 없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절망보다는 그냥 잊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왔다는 걸 확인했다. 다리처럼 온전해졌다.

‘정말로 건강해 졌다는 증거.’

당혹감에 이은 흐뭇함으로 한건은 걸음을 냈다. 집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이보세요.”

낭랑한 목소리에 반응하며 한건은 고갤 돌렸다. 그렇게 옅은 놀람의 반응을 삼켰다. 목소리는 여자였고, 들은 순간의 예감대로 아가씨가 불렀다.

“운동 다 하고 돌아가시나 봐요?”

생긋 웃는 아가씨는 마스크를 내렸다.

누가 봐도 눈길을 거두지 못할 미모다.

무엇보다 시선을 잡는 건 저 탄력 있고 균형 잡힌 몸매, 도발적이다.

그렇다는 걸 이 아가씨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움직임이 그렇다.

“집이 이 근처세요?”

다시 묻는 아가씨의 친근한 미소에 한건은 대답을 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근첩니다.”

“그러시군요. 딱 봐도 운동 잘하시는 분 같은데, 뭐하시는 분이세요?”

초면인 남자를 이 아침에 천변 산책로에서 불러 세워놓고 여자는 거침없다. 이런 걸 묻는 건 다분히 다른 의도가 있다고 누구라도 여길만하다. 하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는 눈빛과 미소로 아가씨는 말한다.

“운동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임 만들어서 운동 같이 하는 건 어때요?”

뭐하냐는 말에 대답하기 전에 아가씨는 또 뒷말을 냈다.

말을 붙인 진정한 본론이다. 그런데 지금 말이 핵심이 아니란 걸 안다.

이건 꼬리치는 거다.

하지만 그런 말도 요새는 성차별이다.

자신이 좋으면 하는 거다.

‘여자라도. 그런데 나 같은 남자를 뭘 보고? 이렇게 예쁜 여자가?’

요즘 여자들의 마인드는 이런 건가 하던 한건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봤다. 체격은 일단 괜찮고 빠지지 않는다. 특수임무를 수행하던 군에서 단련된 몸이다. 오년간 망가지긴 했지만 근본이 어디 가진 않는다.

‘얼굴은……’

괜찮다고 봐줄 만한 수준이다. tv에 나오는 꽃미남들과는 거리가 있지만 호쾌한 호남형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그런 소리는 자기합리화를 위한 것이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평범하다는 거다. 물론 취향 따라 다르지만.

‘나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는 여잔가?’

한건이 생각만 하고 있자 여자가 시니컬한 미소로 다시 입을 연다.

“자신 있으신가 봐요?”

이건 무슨 소린가 한건은 미간을 좁혔고 여자는 이어 말한다.

“마스크 쓴 윤곽으로로 보이는 건 여자들이 꽤 붙는 남자일거라는 생각인데, 그렇다고 이렇게 눈앞에 있는 여자를 무시하는 건 비매너잖아요?”

뭐? 여자들이 꽤 붙어? 한건은 황당함으로 눈을 키웠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우리 사귀어요.”

한건은 흠칫하며 눈동자를 경직했다.

지금 귀를 파고든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다.

아니 안다.

이 여자가 지금 자신에게 사귀자고 한 거다.

“그래요, 생각해 보세요, 전 매일 운동 나와요.”

생긋 웃으며 여자는 윙크를 날리고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한건은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데 옆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할아버지가 중얼댄다.

“줘도 못 먹는 놈이 저기 있네.”

멀어져 가는 할아버지와 아가씨를 번갈아 보며 한건은 황담함만 삼켰다.

‘매일 운동 나와?’

그러니까 다시 볼 때 결정한 답을 하라는 거다.

* * *

거울을 보며 한건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매일 보던 그 얼굴인데 뭔가 달라져 보여서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느낌이 달라졌다.

아니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할까, 아무튼 잘생겨 보인다.

‘그래서라고?’

아침에 천변산책로에서의 아가씨, 그 대담하고 놀랍던 대쉬의 원인이다.

한건 자신에게 뭔가 변화가 생긴 거다.

변화라면 물론 엄청난 변화가 있다.

단적인 예로 불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남자의 본능도 그렇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닌 거다.

‘행운의 돌, 그걸 먹은 후로.’

외모가 달라진 거다, 아니 생긴 모습은 달라진 게 없는데 달라졌다. 그걸 분위기라고 할지 매력이라고 할지, 아무튼 그런 뭔가가 달라졌다. 그런 게 여자의 눈에 확 띈 거다. 정확히 자극을 줬다. 그렇게 생각된다.

“하, 이거……”

어처구니없는 숨을 흘려낸 한건은 화장실에서 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pc를 켜고 메일창을 열었다. 그렇지만 친구 최병철에게 메일을 보내진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너는 아냐고, 뭘 보낸 거냐고 묻지 않았다.

‘병철이도 모르는 거야.’

분명하다, 알면 보냈을 리가 없다. 이런 엄청난 내용을 안다면 국가적 사안으로 취급했을 거다. 최병철은 연인을 만나게 해준 행운의 돌로만 아는 거다. 그 행운을 한건 자신에게 주기 위해 보냈다. 그것이 전부다.

“병철아……”

북극 연구소에 있는 친구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른 한건은 또 다른 친구도 불렀다.

“응삼아, 이 새끼야……!”

복잡한 감정을 삼키며 고개 숙인 한건은 잠시 동안 그렇게 호흡만 골랐다.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친구 이응삼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나타나게 쓰는 거야!’

곧바로 한글창을 띄운 한건은 자판을 두들겼다.

* * *

“흡, 후욱.”

쇠고기를 먹어선지 몸에 셍긴 변화 때문인지 체력이 넘친다. 아침에 운동을 했는데도 에너지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저녁 운동까지 나왔다.

‘이러다 오버트레이닝으로 탈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과거의 경험으로라면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예감한다. 어제 오늘 이틀 운동했는데, 그것도 무리하지 않으려고 예전수준의 오분의 일도 안했는데, 몸은 확실히 반응하며 벌써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한테 일어난 일 자체가 그러니까.’

푸쉬업을 하며 생각하던 한건은 숫자 세는 걸 잊었다. 거의 이백 개까지 한 것 같다. 더할 수 있지만 마운틴클라이밍으로 넘어갔다. 숨이 차오르는 짜릿함을 만끽하며 미친 듯이 무릎을 차올렸다. 그리고 일어섰다.

“후아!”

커다랗게 숨을 내쉰 한건은 옥상에서 보이는 천변과 그 건너 아파트 단지의 불빛을 바라봤다.

잠시 동안 말없이 응시하다 다시 움직였다.

주먹과 발차기를 뻗어냈다.

엘보를 후려치고 점프하며 니킥도 허공에 박았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작은 토네이도처럼 한건은 움직였다.

가상의 적과 전투를 벌였다.

공간을 때리는 손과 발의 느낌, 다시 찾은 이 감격을 만끽했다.

그렇게 무섭게 움직이던 몸을 멈춰 세웠다.

폰이 울어대서다.

‘응?’

번호를 본 한건은 미간을 좁혔다. 처음 보는 번호여서다. 스팸전화라면 모를까, 저녁 8시가 넘은 이런 시간에 모르는 전화가 올 곳이 없다.

“여보세요?”

폰을 귀에 댄 한건은 무거운 숨소리를 들었다. 뭔가 기묘한 느낌이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하셔야죠?”

기묘한 예감으로 한건은 다그쳐 물었다. 하지만 다독이듯이다. 그 답이 넘어왔다.

-건아……

귀를 파고든 목소리, 한건은 눈썹을 확 세웠다.

“응삼아!”

* * *

거실에 마주 앉은 친구 이응삼을 바라보며 한건은 복잡한 숨을 내쉬었다. 한글창에 쓴 대로 이응삼은 이렇게 나타났다. 오전에 썼는데 저녁에 나타났다. 이건 직접적이지만 금전적인 경우가 아니라 된 걸로 보인다.

‘저 꼬라지를 보니 돈을 찾긴 글렀어.’

시종 고개 숙이고 눈도 못 맞추는 이응삼, 집 앞 골목에서 용기 내 전화를 한 저 놈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이렇게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부른 거지만.’

한글창에 그렇게 안 썼으면 평생 안 나타났을까 생각하니 화가 치민다.

“너 이 새끼……”

한건이 입을 열자 이응삼은 기다린 듯 고개를 들고 말한다.

“나도 당했다. 사기 당한 거야.”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란 얼굴을 하면서도 한건은 이응삼의 이야기를 들었다. 들을수록 화가 치미는 이야기, 결국 이응삼에게 버럭 소리쳤다.

“새꺄! 내 돈 갖고 가서 코인에 몰빵을 해! 그게 어떤 돈인지 몰라서 그러냐!”

이응삼은 다시 고개를 박고 사과했다.

“미안하다, 내가 뭐가 홀렸었다, 건이 네 목숨 값인데, 그 피 같은 돈을 내가……!”

벌떡 일어선 한건은 좁은 거실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다시 물었다.

“그 자식들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고?”

“어, 그게…… 알아내긴 했는데……”

고개 든 이응삼은 미간을 좁혔다. 친구 한건이 멀쩡하게 서 있는 것 같아서다.

“건아 너……”

“그놈들 어딨는데?”

멱살을 잡을 듯이 확 다가선 한건, 그 움직임에 절름거림이 없다는 걸 이응삼은 확실히 알았다.

‘뭐야?’

이응삼은 눈을 부릅떴다. 집으로 들어오란 말을 듣고 들어왔다. 한건이 거실에 앉아 있는 것만 봤기에 몰랐다. 그런데 지금 보니 다리가 정상이다.

“거, 건아? 너 다리가?”

“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새꺄.”

“어? 어어, 그놈들 말이지……”

“어딨는데? 너한테 코인투자사기로 싹 빨아먹은 새끼들, 어딨는 거야?”

이응삼은 한건의 다리를 보면서 우물우물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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