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63화 (163/200)

[외전] 종말전야. 13. 격노.

13. 격노.

그랜저를 도로에 버린 한건은 녹양역 물품보관 락카에 배낭을 넣었다. 돌아서면서 수첩에 의지를 적었다. 황당무계하고 만화 같은 바람이다.

‘이제부터 나 한건은 어떠한 영상장치에도 모습이 포착되지 않는다.’

마침표를 찍자마자 전신에 오로라빛이 출렁였다.

그 빛을 한건은 분명히 보고 느꼈다.

보고 느끼자마자 스며들 듯이 사라진 빛, 이젠 확신한다.

이 빛이 운석의 의지를 발현하는 증거라는 것, 이렇게 되는 거다.

‘응상아……!’

친구 이응삼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건은 치를 떨었다.

낯선 남자가 비웃음을 흘리며 바꿔준 이응삼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부들거리고 있었다.

이미 폭력에 당한 거다, 고통을 참고 있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개새끼들……!’

정체 모를 적들에 대한 적의와 살의로 한건은 숨을 떨었다. 사제야상점퍼 안에 품은 권총 두정과 나이프와 삼단봉까지 무기를 확인하며 호흡을 다스렸다. 차가워진 새벽공기를 깊게 들이마셔 냉정을 다시 품었다.

‘운석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놈들.’

걸음을 내 녹양역을 빠져나오면서 한건은 적에 대해 가늠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를 했다.

운석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 즉시 이응삼과 송미진을 죽인다고 했다.

운석이 소지자의 의지를 실행해 준다는 걸 정확하게 아는 거다.

구체적으로 폭력이나 살인과 같은 방식으로 발현됨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의문이다.

그냥 그놈들 전부 호흡이 끊어져서 죽으라고 하면 안 될까?

‘여태 이뤄진 결과는……’

천변살인자는 경찰관들이 권총을 쏴 처리하는 거였다.

‘은혜아파트는 내부에 있던 극렬분자가 불을 지르고 소총을 난사해 유인건대표 일당을 죽이는 거.’

입양아를 잔혹하게 학대 살해한 정씨와 최씨부부는 차량사고로 죽게 하는 거였다. 조영철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과, 그것만이 조금 다르다.

‘조영철은 제 손으로 자살하는 방식, 굳이 비유하자면 주관식이고 앞선 세 건은 제 삼자가 나타나 해결하는 방식, 객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놈들에게도 조영철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한다면 되지 않을까?’

수첩을 꺼낸 한건은 볼펜을 쥐고 자살이란 단어를 쓰려다가 멈칫했다.

‘변질.’

운석이 그렇다고 했다. 운석의 괴이한 힘이 처음과 달라진다고 했다.

정말로 그런 것을 한건 자신도 느끼고 있다.

운석에 얽힌 내막을 알아서인지 모르지만, 처음 행운의 돌이라고 여겼던 것이 이젠 소름이 끼친다.

‘행운이 절대 아니야.’

이 현실로 확인하고 있다.

로또당첨과 같은 행운은 눈속임이었다. 그 돈은 이제 쓰지도 못 한다.

북극에선 운석 때문에 피바다의 실종만 남았다.

운석을 가진 자에겐 결국 불행이 오는 거다.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내 속에서 내 의지를 침습하고 있는……!’

폭력과 살인에 대한 의지로만 운석의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 아니 강렬하게 느낀다. 그러니 이응삼을 잡고 있는 놈들을 향한 의지가 이뤄질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 범위 안에 이응삼과 송미진도 들어갈 수 있다.

‘예감이……!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면……!’

한건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깊고 깊은 어둠의 속에서 누군가 웃고 있는 것 같다. 무섭고 끔찍한 미소로 한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날 보고 웃으면…… 낯짝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도로의 어둠을 향해 한건은 으르렁거렸다.

그 순간 어둠이 출렁거렸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일어났는지 아닌지는 모를 변화.

한건은 걸음을 냈다.

수첩과 볼펜은 다시 포켓에 넣었다. 소음기달린 권총을 움켜잡았다.

* * *

“녹양역 배후지의 원룸오피스텔에 송미진이 살고 있습니다. 이응삼의 핸드폰 신호가 거기서 나옵니다. 회룡역 인근 부모님 집에는 안 갔습니다.”

팀원의 상황보고를 받으며 윤지희는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이응삼.’

그 인물에 대해선 이미 파악하고 있다. 한건의 돈을 사기로 날리고 도망 중이던 자다. 그걸 한건의 힘으로 되찾았고 육억이란 거금도 손에 넣었다. 지금 약혼녀 송미진의 원룸에 있다. 부모에게는 아직 안 찾아갔다.

‘자식새끼 키워봐야 다 헛일이라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쉰 윤지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2시 20분을 지나고 있다.

이제 곧 녹양역이다. 이응삼을 확보하면 한건을 잡는 일이 쉬워질 거다.

그런데 만약 한건이 이응삼에게로 이동한 거라면 골치 아프다.

“서둘러.”

윤지희의 명령을 받은 차는 있는 대로 속도를 높였다.

* * *

LH에서 지은 아파트단지들이 멋스럽게 늘어서 있다. 그 거리를 한건은 당당하게 걸었다. 이 거리의 cctv들이 자신을 포착할 수 없다는 자신감에서다. 황당하고 괴이한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이제 궁금하지 않다.

‘몇 놈이나 있을지……’

이응삼과 송미진을 잡고 있는 놈들을 생각하며 한건은 빠르게 걸었다. 아파트단지를 지나 주택과 상가들도 지나 오피스텔에 다다랐다. 송미진이 사는 9층을 올려다봤다. 불 켜진 창가에 누군가 있다. 아래를 본다.

‘저놈!’

한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자, 전화를 받은 놈이란 걸 알겠다.

잔인하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한건 자신이 뭘 가졌는지 아는데도, 그것의 힘을 알고 있는 데도 저런다.

그만큼 스스로의 능력을 믿는 거다.

‘진짜 전문가라 이거냐?’

위를 올려다 본 한건은 오피스텔 정문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좌우에서 두 놈이 다가온다. 날선 칼날 같은 놈들, 아무 말도 안하고 뒤따른다.

‘일단 세 놈.’

눈으로 확인한 놈들의 숫자를 세며 한건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9층을 누르는데 두 놈이 따라 탔다. 놈들의 예리한 시선을 무시하고 앞만 봤다.

‘최소한 두 놈이 안에 더 있겠지.’

송미진의 집 901호 복도에든 집 안이든 그럴 것이다.

그냥 봐도 강인함이 철철 넘치는 이런 놈들을 다수로 상대해야 한다는 현실에 한건은 이를 물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하겠지만, 아무리 자신이라도 무리 같다.

‘현역시절이라고 해도 이런 놈들 대여섯은……’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한건은 침과 함께 삼켰다.

일단 이응삼과 송미진을 구하는 거다.

운석을 넘겨줄 테니 풀어달라고 하는 거다.

당장 줄 수 없지만 한건 자신을 잡으라고, 응할 수밖에 없는 거래를 해야 한다.

땡, 9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소리에 한건은 현실로 돌아봤다.

복도로 나가니 아무도 안 보인다. 그런데 901호 현관문이 스르르 열린다.

걸음을 재촉해 가보니 현관 안쪽에 역시 두 놈이 있다.

놈들 사이로 들어갔다.

등 뒤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놈이 창에서 돌아섰다.

“한건, 이렇게 얼굴을 보니 반가운데?”

좁은 거실에 당당히 서 있는 놈, 그러나 이응삼과 송미진은 안 보인다.

원룸이라지만 정확하게 1.5룸 형태의 집, 방 안에 있는 거다.

그들의 억눌린 숨소리가 들린다. 그렇다면 그들 곁에 또 다른 한 놈이 있는 거다.

“친구를 향한 우정이 정말로 뜨겁군.”

잔인하다고 느껴지는 미소를 풀어내는 놈, 창 앞에 선 놈을 향해 한건은 말했다.

“안전한지 봐야겠다.”

일곱 놈의 리더, 창 앞의 사내는 고개를 순순히 끄덕인다. 그러나 눈을 번득인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무기는 내려놓고.”

좌우로 선 두 놈이 겨누는 권총 앞에서 한건은 두 팔을 벌렸다. 두 놈은 품을 뒤져 권총 두 정과 나이프와 삼단봉을 빼 식탁 테이블 위에 놨다.

“저런, 준비가 꽤 철저했군.”

무기들을 보며 리더놈은 다시 미소 지었다. 그리곤 턱짓으로 방을 가리킨다. 한건은 바로 움직였다.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전신을 경직했다.

‘이!’

이응삼이 피투성이다. 송미진은 잠옷차림으로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다. 역시 피투성이에다 잠옷은 여기저기 찢어졌다. 고개도 못 들고 있다.

“거, 건아……!”

엉망이 된 얼굴로 부르는 친구 이응삼, 그 눈을 본 한건은 으스러지게 이를 물었다. 겨우 자신의 이름만을 부른 친구의 목엔 개목걸이 같은 게 채워져 있다. 셋톱박스처럼 푸른 불빛이 들어와 있다. 뭔지 알겠다.

‘폭탄.’

리더놈이 리모컨을 들고 있을 거다.

버튼만 누르면 이응삼과 송미진의 목에 채워진 저것이 폭발하는 거다,

모가지만 날려버리는 잔인한 무기다.

“응삼아. 이제 괜찮을 거다. 날 믿고 기다려.”

친구 이응삼에게 그렇게 말한 한건은 송미진을 돌아봤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도 못 드는 그녀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그대로 거실로 돌아섰다.

“풀어줘라.”

방문이 닫히는 걸 느끼며 한건은 요구했다. 창가의 리더놈에게 확 다가서며 거듭 말했다.

“당장 풀어줘.”

두 놈이 공격할 것처럼 좌우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리더 놈이 손을 들었다. 그 손짓에 두 놈은 움직임을 멈췄고, 리더 놈은 한건을 응시하며 말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을 내야지.”

살의를 인내하며 눈동자를 응축한 한건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준다. 그런데 내 친구와 약혼녀가 안전해진 다음이다.”

리더 놈의 눈매에 날이 서는 걸 바라보며 한건은 뒷말을 던졌다.

“내가 지금 너희 손 안에 있다.”

뒤로 이어져야 할 말을 한건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더 놈은 알았다.

한건으로선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것, 어차피 운석을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주겠지만 그전에 친구와 약혼녀를 풀어주라는 요구다.

“당당하군.”

잔인한 미소로 짧게 반응한 리더 놈은 한건을 응시하며 아무 말도 안했다. 과연 이놈에게 무슨 수가 있어서 이러는 것인가, 있다면 그게 뭘까 하는 눈이 빛을 냈다. 그 끝에 다시 미소 짓는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다.

“받는다.”

리더 놈은 손가락을 튕겼다.

곧바로 방문이 열리고 이응삼과 송미진이 끌려나왔다.

방문 바로 앞에 무릎을 꿇게 한 두 사람에게 리더 놈이 말했다.

“친구를 잘 뒀어.”

이응삼이 한건을 보며 희망품은 눈빛을 내는 그때, 리더 놈이 손을 움직였다. 뭔가를 누르는 것 같은 미세한 움직임, 그 순간 송미진이 터졌다.

* * *

오피스텔 앞 도로에 차를 세운 윤지희는 차문을 박차고 나갔다. 가죽점퍼 안에서 꺼낸 글록을 양손으로 쥐고 오피스텔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유리문 안쪽에서 그림자가 움직인다.

두 놈, 적이란 걸 직감했다.

“제압해!”

윤지희가 소리치자 팀원들이 바람처럼 달려 들어갔다. 비상계단으로 물러나며 총격을 가하는 두 놈을 쫓아갔다. 윤지희는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여기까지……!’

정체모를 적이 또 끼어들었다. 가능성을 예상한 부분이긴 하지만 이놈들의 움직임은 정말 빠르다. 동시작전을 수행하는 것만 같다. 한건을 노리면서도 이응삼도 노린,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대응한 것 같다.

‘한건, 안 뺏긴다!’

권총을 더 강하게 움켜잡는 윤지희 앞에서 엘리베이터는 입을 벌렸다.

* * *

한건은 경직했다. 송미진의 목에서 스파크가 피어났다.

그것이 만든 결과가 영혼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송미진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무릎 꿇은 앞으로 떨어져 구른다. 이응삼의 무릎에 부딪쳐 멈췄다.

“어……”

이응삼이 괴이한 외마디를 흘려냈다. 자신의 무릎에 부딪친 게 송미진의 머리란 걸 보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 못하겠다는, 영혼의 숨이다.

“미진아……”

이응삼은 다시 목소릴 냈다. 부들거림이 삽시간에 화산처럼 솟구쳐 오르는,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원통함이 한데 섞인, 울부짖음으로 소리친다.

“미진아! 으아아아!”

이응삼이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방에서 나온 놈이 권총으로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한건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 찰나 리더 놈이 경고한다.

“친구도 저렇게 될 거다!”

리더 놈의 얼굴에 걸린 잔인한 미소를 보며 한건은 부들거렸다.

타협 따위는 없다는 눈동자, 저 눈알을 파내고 싶다. 전신을 조각조각 내고 싶다.

“네가 가진 걸……”

말하던 리더 놈이 미간을 좁혔다. 귀에 걸린 리시버를 통해 바깥 놈들의 보고를 듣는 것 같다.

“이!”

리더 놈이 인상을 쓰는 그 순간이다.

“악!”

이응삼을 때려 쓰러뜨리고 제압하던 놈, 방안에서 나온 놈이 손을 잡고 물러났다. 이응삼이 물어서다. 손가락 하나가 이응삼의 입에 물려 있다.

“퉤!”

손가락을 뱉은 이응삼은 창 앞의 리더 놈을 향해 왁 하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다른 놈들의 총구가 이응삼을 겨눴고, 한건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