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종말전야. 20. 청록원.
20. 청록원.
한건은 본능적인 반응으로 주변을 살폈다. 괴괴한 야음이 내려앉은 채 아무런 동정이 없다. 시멘트 도로가 이어진 아래쪽으로 보이는 마을은 여린 불빛들뿐이고, 지나온 수목원 역시 산 그림자에 묻혀 잠들어 있다.
‘됐어.’
일단은 안심해도 될 상황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윤지희의 팀이든 청록원 놈들이든 달려 올 거다.
그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청록원의 기습으로 원래 계획과 틀어졌지만, 어쨌든 여길 벗어나는 게 핵심이다.
‘이런 모습으론 안 돼.’
미간을 옅게 찌푸린 한건은 사살해 버린 청록원 놈들을 살폈다. 미간에 구멍을 내버린 세 놈 중에 체형이 비슷한 놈을 찾았다. 야간 기습을 위해 착용한 게 분명한 검은색 특수전 복장이다. 빠르게 벗겨 갈아입었다.
‘다시 갈아 일을 옷이 필요한데……’
일단 이곳을 벗어난 후에 그렇게 해야 한다.
차를 돌아본 한건은 머뭇거리지 않고 뒤졌다.
피바다가 된 승합차 안, 배낭은 꺼냈지만 옷 같은 게 없어 suv로 갔다.
뒷문을 열고 잡다한 짐들을 뒤지다 소리를 들었다.
‘응?’
미약한 신음, 여자다. 누군지 알겠다. 윤지희다.
‘이건……’
순간적으로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살려야 한다는 것, 그러나 곧바로 든 확고한 의지는 죽여야 한다는 거다. 순간적으로 교차한 그 마음을 한건은 깨달았다. 전자는 순수한 한건 자신의 인간 의지, 후자는 운석이다.
강하게 미간을 구겼다 편 한건은 옆으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윤지희가 바닥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안전벨트에 매달려 있다.
차 앞머리가 배수로에 박힌 터라서다. 총격에 턱이 날아갔다. 참혹한 마지막 모습이다.
‘죽겠구나.’
아니 거의 죽었다. 마지막 숨만 흘려내고 있을 뿐인 거다.
그런데 이렇게 차문을 열고 이 여자를 보는 건 왜 일까.
한건 자신을 이용해 운석을 뺏으려 한 여자, 총을 겨누고 죽일 것을 불사하던 여자를 왜 일까.
‘난 운석에 지배당하지 않아.’
부득 소리 나게 어금니를 문 한건은 안전벨트를 풀고 윤지희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이 순간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과 결심 하나를 강하게 물었다.
‘살려보는 거야, 운석으로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것도 가능한지 해 보는 거야.’
나중에 다시 죽이더라도, 운석이 아닌 한건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건은 이를 악물었다.
‘이정도 부상자를 살리는 건……’
처참한 모습의 윤지희를 시멘트도로에 뉘여 놓고 한건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결심한 대로 폰을 꺼냈다. 작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녹음했다.
“윤지희는 살아난다. 원래대로 정상이 된다.”
녹음을 마친 한건은 기다렸다. 하지만 윤지희는 그대로다. 이젠 숨이 멈췄다. 역시 이런 건 안 되는 건가 하는데 손에 오로라 빛이 드러났다.
‘이 빛이……’
빛을 보는 순간 한건은 손을 뻗었다.
윤지희의 머리에 손바닥을 댔다.
빛은 출렁이는 것처럼 윤지희의 머리로 스며들어갔다.
짧은 순간이었다.
‘된다!’
윤지희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며 한건은 손을 떼고 물러났다. 하관이 사라지고 핏물만 흘려내던 턱이 복원되고 있다. 끊어졌던 숨도 돌아왔다.
‘이런 건 기록만으로 안 되고 직접적인 의지로 접촉해야 가능 한 거야.’
경험의 확신을 삼키며 한건은 일어섰다. 윤지희의 권총을 챙기고 소음기관단총도 챙겼다. 배낭을 멘 후에 기관단총을 담요로 감았다. suv뒤에서 찾아낸 건 이 작은 모포가 전부, 그나마 총을 가리는 데 유용하다.
‘뒷일은 너희끼리 알아서 해라.’
죽은 자들을 돌아본 한건은 달리기 시작했다. 옷을 뺏어 입은 놈의 주머니에 든 차 리모컨을 열심히 눌렀다. 분명히 마을 외곽에 세워놨을 거다.
‘거기 있구나!’
마을 옆을 지나는 하천변에서 불빛이 깜박인다.
달려가며 보니 구형트라제다.
그레이색의 차체인 별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고 지붕 위엔 루프박스가 달려 있다. 캠퍼들의 차처럼 보인다. 달려가 운전석에 올라 출발했다.
* * *
“무슨 헛소리야!”
폰에 대고 고함을 지른 현인규는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지금 이 심정을, 틀어진 일을 바로 잡을 수가 없다.
한건을 놓친 거다.
윤지희 팀은 청록원에게 당했다.
청록원은 한건에게 당했다.
“이동경로 파악하고 잡아!”
소리치고 통화를 끝낸 현인규는 쥐고 있던 폰을 던지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데스크를 돌아 나와 벽장에서 위스키병을 꺼냈다. 잔에 가득 따라 단숨에 비웠다. 식도를 훑고 내려가는 불같은 그 감각으로 정신을 잡았다.
‘한건……!’
이젠 함인호의 운석까지 가진 놈, 그놈이 계속 말썽이다.
그런데 이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윤지희 팀이 한건을 확보해 돌아오려던 때에 청록원의 기습을 받은 거다. 그랬는데 한건이 놈들을 해치웠다.
‘m4a1소총으로 무장한 여섯 놈을……’
윤지희와 팀원들 열 명을 단번에 끝장내버린 놈들을 한건이 해치웠다.
세 놈은 격살했고 세 명은 사살했다.
정확하게 미간에 한방씩 박아줬다.
이결과를 놓고 보면 한건은 잡힌 게 아니다. 그런 척 했던 게 분명하다.
‘청록원, 너희도 많이 당황하고 있겠구나……!’
분노의 숨을 씹어 삼키며 현인규는 다시 위스키를 따라 마셨다. 술기운이 확 올라오지만 이성은 또렷하다. 그래야 한다. 청록원 놈들이 대놓고 이빨을 드러낸 상황이다. 한건을 확보하지 못하면 결국 물어 뜯긴다.
“우리 숨통을 물어뜯으려 한다만, 물리는 건 너희가 될 거다.”
창문을 응시하며 현인규는 나지막하게 그 말을 던졌다.
차가운 의지가 서린 중얼거림, 청록원과 시작된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결의다.
그들은 확실하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건 정부의 뜻이 아니다.
청록원의 의지다.
‘정부는 아무것도 몰라.’
진실한 정보는 청록원에서 가지고 있다. 그걸 쥐고 정확하게 뭘 하려는 지는 그들만이 알겠지만, 이 행위의 방향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게 아니란 것은 자명하다. 청록원, 그들은 저희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우리 현중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 이겨야 한다, 이기는 자가 영광을 갖는 거다.
운석으로 인한 영광.
그것이 무엇이 될지 명확하지 않지만 대단한 것이 될 것이란 건 분명하다.
아니 더 정확하겐 운석을 가지고 대단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현재까지 파악한 운석의 힘. 그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렇다. 운석은 추측불가 한 힘을 가졌다. 그 결과 중엔 윤지희도 있다.
‘한건이 살렸어.’
청록원 놈들의 총격을 받고 윤지희는 죽었다.
3팀장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대로라면 윤지희는 정말 죽었다. 턱이 날아간 죽음이었다.
그런데 산 거다. 한건이 도주하기 전에 살렸다.
왜 살렸는지 이유를 떠나서 정말 대단하다.
‘타인의 목숨을 살리는 것도 가능하단 말이지?’
윤지희가 완전히 죽었었는지 아닌지, 그런 결과가 영향을 미친 건지 어떤 건지 모른다. 그런 것도 운석을 손에 넣고 알아내야 한다. 이결과는 또 새로운 것, 어쩌면 함인호의 운석까지 한건이 가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한건……’
사진으로만 본 그 얼굴을 떠올리던 현인규는 다시 폰을 들었다.
“어떻게 돼 가고 있나?”
4팀장의 목소리는 긴장한 가운데 차분하게 귀를 파고든다.
함인호와 같은 경우가 또 있을 가능성의 체크, 아직까지는 없다는 보고다.
그런데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기수처럼 북극에서 돌아온 인물이 아니라도 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살펴라. 신속하고 정밀하게 해야 한다.”
운석 소지자를 찾는 일, 만전을 기하라는 당부를 하고 현인규는 폰을 내렸다. 그렇게 바라보는 창밖의 강남대로는 화려하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또.’
기시감이 또 있다. 어디선가 다른 세상에서 자신처럼 강남대로를 보는 존재의 느낌.
* * *
수습팀의 차에 오르며 윤지희는 입술을 물었다.
새삼 그 느낌을 오롯이 삼켰다.
턱이 날아가 죽어가던, 아니 죽었던 자신이다.
이렇게 숨 쉬며 입술을 깨물 수 있는 건, 그 감각을 인지하며 살아 있는 건 그의 덕이다.
‘한건.’
그가 살려줬다.
운석의 힘을 이용한 거지만 그가 살리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살아난 거다.
왜 살려줬는지는 모른다.
윤지희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라는 생각은 안 든다.
그의 눈동자엔 차가움뿐이었다.
‘운석을 차지하기 위해 총을 겨눈……’
윤지희 자신은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다.
한건에게서 필요한 것을 빼앗기 위해 현중그룹이 던진 장기판의 말일뿐인 거다.
그런 존재인 윤지희 자신을 한건은 살렸다.
살린 이유로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건 하나다.
‘운석으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지……’
한건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된다. 그걸 성공했다. 함인호의 운석까지 가진 그가 그런 의문을 품고 결과를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덕에 살았다.
‘다 죽고 나만 살었어……’
열 명의 팀원들 전부 사살됐다. 청록원의 기습은 치밀하고 강력했다. 그런데 그들도 한건에게 죽었다. 한건은 그들의 차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이동경로가 곧 드러나겠지만……’
한건은 잡히지 않을 거란 예감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인 게 스스로도 놀랍다.
살려줬다는 존재에 대한 마음은 이런 건가?
어둠이 배경화면처럼 스쳐가는 차창 밖을 응시하며 윤지희는 또 입술을 물었다.
* * *
수동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면서 한건은 폰에 녹음을 했다.
“차에 장착된 gps발신기 같은 건 작동불능이 된다.”
순간적으로 오로라 빛이 손과 폰에서 빛났다. 확실하게 작용을 한 거다. 그러니 위치추적을 당할 염려는 없다. 그렇지만 도로 카메라는 다르다. 이전처럼 먹통을 만든다고 해도 그 방향성을 추적하면 말짱 황이다.
‘투명인간처럼 안보이게 해주면 정말 좋을 텐데.’
정말 황당한 생각이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타고 이동 중인 차까지는 무리일 거다. 어쨌든 운석의 힘이란 게 요술방망이 같으면서도 멍청한 구석이 있다. 엄밀히 힘이 미치는 범위가 살인과 폭력에 집중돼 있다.
‘소지자의 안전에 관한 것, 직접접촉의 경우이거나.’
이제 확신을 가진 짐작은 운석이 전류나 전파 같은 것에 명확하게 반응한다는 거다. 카메라가 그렇고 지금처럼 전자장치를 겨냥한 일이 그렇다. 폰에 녹음하고 pc에 기록한 일이 실현된 것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전류나 전파의 흐름을 타고.’
누구나 전자기기를 지닌 세상이다. 대표적인 게 폰이다.
한건 자신이 pc에 의지를 기록하고 폰에 녹음을 하면 그 대상자를 찾아가 발현되는 건지 모른다.
그렇다고 강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수첩에 기록한 건 다르다.
‘후, 모르겠다.’
한 가지 중요한 건 운석의 힘을 이용해 누군가를 죽인 게 아니라 살리기도 했다는 거다. 윤지희, 턱이 사라진 그녀를 살리고 안면도 복원했다.
‘황당한 거짓 같은 현상과 결과……’
이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함인호가 가졌던 운석까지 가졌다. 그런 한건 자신을 잡기 위해 현중그룹과 청록원이란 놈들이 달려들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한건 자신을 욕심내는 놈들, 친구를 죽인 놈들이 있다.
‘다 죽여 버린다……!’
불같은 분노와 살의를 삼키며 한건은 악셀을 밟았다.
차는 어느새 46번 도로에 접어들었다. 경춘가도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애인이 생기면 드라이브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도로다.
기묘한 비애가 돋아난다.
‘이도로 어딘가에서 바꿔야 해.’
결심을 굳힌 한건은 유턴했다. 맞은편에서 차가 안 올 때 불법으로 차를 돌리고 온 길을 따라 질주했다. 목표한 곳은 대성리역 인근, 그곳의 노지에 캠퍼들이 몰린 다는 걸 알고 있다. 친구 이응삼과 왔던 곳이다.
‘응삼아……!’
새삼 이응삼에 대한 감정이 치솟아 한건은 아프게 이를 물었다. 그렇게 감정을 제어하고 목표한 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대성리 국민관광지를 지나 지류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진행하니 역시 캠퍼들이 몰려 있다.
‘됐어.’
적당한 자리에 차를 세운 한건은 주변을 살피다 빠르게 내렸다. 조명이 거의 없는 곳이라 캠퍼들이 피운 불빛만 여기 저기 어른대는 어둠속이다. 트라제 뒷문을 열자 잡다한 것들이 있다. 다행히 옷도 보인다.
‘빙고.’
신속하게 옷을 갈아입은 한건은 검은색 특수전복을 벗어 배낭에 쑤셔 넣었다. 그러며 보니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배낭은 구멍하나 안 났다. 당연히 안에 들어 있는 현금도 무사하다. 목숨 값, 소중한 돈이다.
‘이제 여길 흔적 없이 벗어나면 되는데.’
모포로 감은 기관단총을 품에 쥐고 한건은 사방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 순간 몸에 이상한 감각이 피어나는 걸 느꼈다. 그 감각은 촉각으로 변했다.
‘어?’
희미하지만 분명히 인지되는 피부의 촉각, 그것의 원인이 뭔지 한건은 알았다.
지나온 대성리 국민관광지 쪽의 카메라다, 작동을 인지한 거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카메라 위치를 알겠다.
“하.”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 같은 걸 흘려낸 한건은 바로 움직였다. 피부로 느껴지는 전자파시선 같은 것, 카메라의 위치를 피한 사각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