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72화 (172/200)

[외전] 종말전야. 22. 구분.

22. 구분.

pc방에서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한건은 민원24사이트에서 필요서류를 출력했다. 그래봐야 등본 한통이지만, 떼어보니 정말로 다른 신분이 실감난다. 원래 주민증이 변환한 새 신분의 이름 원지훈은 일인가구 청년이다.

‘원지훈, 나이 34세.’

한건 자신과 같은 나이인 미상의 인물, 더 자세히 알 필요 없다.

현재로선 알 수도 없다.

황당괴이한 일을 만드는 운석이 택한 인물이니 하자는 없을 거다.

그렇다는 걸 믿는 것 자체가 웃기지만 그게 현실이다.

‘됐어.’

pc방을 나온 한건은 빌라로 돌아가며 주인에게 다시 연락했다. 역시 금세 나타난 주인과 계약서를 작성하고 보증금과 월세를 치렀다. 이천에 오십, 이런 외곽에서 싸다고 할 수 없지만 부동산이 올라 시세가 그렇다.

아니 이전부터 통상 이정도 가격은 형성돼 있었다는 걸 안다. 게다가 방 세 개짜리 집이다. 솔직히 원룸도 상관없으니 다른 걸 구할까 하는 마음도 있지만, 번거로운 일은 넘기고 간편하게 받아들이자는 마음이다.

“잘 하신 거요. 요샌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르는 세상 아니요? 이 금액으론 어딜 가도 이런 투룸을 못 얻지. 자, 주민센터는 내일 가시고, 그럼.”

확정일자를 받자면 월요일인 내일 해야 할 일, 주인은 그걸 말하고 웃으며 돌아섰다. 건네받은 보조키를 들고 배웅한 한건은 비밀번호부터 바꿨다.

띠리리 하면서 번호가 변경된 도어락의 문을 닫은 한건은 자문했다.

‘확실하게 한 게 맞지?’

다시 하번 계약과정을 복기하며 계약서를 살핀 한건은 피식 웃었다.

‘뭐, 최악의 경우 보증금 이천 날리는 거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집주인의 신분을 확인했고 등기부등본까지 확인했다. 빌라에 선순위 대출 같은 제한물권이 아무것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예측 못할 일로 경매 같은 일을 당해도 우선변제권이 있다.

‘남양주시는 천오백인가 이천인가?’

좁혔던 미간을 풀며 다시 피식 웃은 한건은 집안을 살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당분간 살 집이다. 가장 급한 것이 최소한의 생활도구다.

‘침구, 세면도구.’

구해야 할 것들을 떠올린 한건은 수첩을 꺼내 적었다. 그러다 눈동자를 강하게 응축했다. 수첩에 적어 운석의 의지를 발현했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운석의 힘을 사용한 경우는……’

좁힌 미간을 꿈틀거리며 지난 일들을 더듬은 한건은 거실 바닥에 앉았다.

‘정리할 필요가 있어.’

맨 처음 운석의 힘을 사용한 것은 천변의 살인자였다.

pc에 연재글을 작성하다 창밖의 그 광경을 봤다.

산책 나온 사람들에게 일본도를 휘두른 살인자다.

충격 속에서 마음속에 일어난 바람을, 의지를 자판에 두들겼다.

“경찰의 추적으로 도주로가 차단돼 고립된 범인은 일본도를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출동한 경찰관 여섯 명이 쏜 총격을 받고 즉사하고 만다.”

그날 한글파일에 써버린 내용을 한건은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 바로 이렇게 기록했다.

그 기록이 현실로 일어났다.

즉각적이었다.

‘그 다음은……’

은혜아파트다.

뉴스를 보다가 치밀어 오른 분노를 그대로 pc에 적었다.

“교회내부의 극우인물이 불을 지르고 소총을 난사하여……”

한글원고에 적었던 내용을 한건은 다시 읊조렸다.

새삼스럽게 오한이 일어난다.

적어 내려간 그대로 일이 일어났었다. 생중계로 그 일을 봤다.

‘원고 마침표를 찍고 다시 뉴스를 띄우자마자……!’

현장에서 생중계 중이던 상황, 기자가 교회를 배경으로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그때 폭발이 일어났다. 붉은 화염이 교회 밖으로 퍼져 나왔다.

‘그다음엔……’

뜨거워진 침을 삼키며 한건은 기억을 더듬었다. 가장 강렬했던 기억이다.

‘로또.’

20억을 수령했다. 그 돈은 그림의 떡이 됐지만, 그일 역시 pc원고에 기록한 대로 이뤄졌다. 그리고 그다음은 입양아를 학대 살해한 정씨와 최씨다. 그들 역시 기록한 대로 일일 일어났지만 로또의 경우는 달라졌다.

‘직접적이고 금전적인 행운은 연속되지 않는 다는 것.’

로또 이후에 긁는 복권을 사서 확인했다. 그런데 엄밀히 지금 상황에서 판단하면 로또도 행운은 아닐 수 있다. 현혹시킨 미끼 같은 느낌이다.

물론 그 직전에 다리가 정상으로 돌아온 기적 같은 일이 생기긴 했다.

‘좋아, 어쨌든 그다음은 조영철. 아니, 아니지, 조영철이 두 번째였어.’

한건은 기억의 순서를 바로잡았다. 운석으로 이룬 천변살인자사건이후로 확인하기 위해 한 일이 그 일이었다. 한글문서에 쓴 내용이 또렷하다.

“조영철은 수감된 독방에서 자해를 시작했다. 제 손으로 눈알을 뽑고 숨겨둔 예기로 혀를 잘라낸 후에 생식기를 절단하고 할복하며 전신을 난자……”

그렇게 운석의 힘으로 만든 일들, 그 후에 몸에 이상반응이 있었다.

지독한 감기몸살 같은 거였다.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닐까 했는데 나았다.

그 증상이 운석의 힘을 사용한 대가 같은 거라고 짐작했지만 모른다.

‘공통점은 pc와 폰을 이용한 기록과 녹음…… 그에 비해 수첩에 기록했던 경우는……’

고양동에서 차를 훔칠 때였다.

차문이 열리고 시동이 걸리길 바랐고 주변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기를 바라며 수첩에 적었다.

그게 이뤄졌다. 그 후엔 녹양역에서다.

역시 cctv에 모습이 잡히지 않기를 수첩에 적었다.

‘투명인간처럼은 안되지만.’

그 일은 분명히 이뤄졌다. 그렇지만 이동경로를 따라 카메라들이 먹통이 되거나 노이즈를 일으키는 것이기에 애매하고 불완전한 방법이었다.

‘차이는……’

수첩에 적어 운석의 힘을 발현할 경우는 직접적이고 제한적인 경우였다. 한건 자신을 중심으로 근접한 공간에서만 이뤄진 일로 판단된다. 게다가 완벽하지도 않았다. 녹양역을 벗어나면서부터는 분명 카메라에 잡혔다.

‘자전거도로의 이동을 추적했어.’

현중그룹에서 꼬리를 밟아온 것은 그래서가 확실하다. 게다가 한건 자신의 모습이 폰 카메라에 잡혔다. 오피스텔에서 뛰어내리던 모습이다.

‘수첩에 적는 건 pc에 쓰거나 폰에 녹음하는 것보다는 약해서일까?’

pc방에서 뉴스기사를 검색해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한건 자신을 괴변의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있다. 9층에서 사람하나를 잡고 뛰어내렸으니 그럴만 하다. 그 순간을 건너편 상가옥상에서 촬영한 영상이라고 한다.

‘수첩에 적는 건 내 몸 주변에서…… pc나 폰을 이용한건 그보다 범위가 크고 먼 곳에서도…… 뭐가 됐든 기록해야만 되는 거야? 말로는 안 돼?’

화난 사람처럼 미간은 곤두세운 한건은 한 가지 변화를 떠올렸다.

‘피부에 자극처럼 느껴지는 각종 카메라들의 시선.’

그게 가능하다. 그래서 무수한 그 시선들의 사각을 찾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게 이곳으로 이동해 지금 여기 앉아 있다. 확실한 변화다.

‘함인호의 운석을 가진 후에 나타난 변화야.’

분명하다, 손바닥으로 박혀 들어간 운석.

그것과 원래의 운석이 어떻게 작용한 건지 모르겠지만 작용했다.

그 결과가 이런 변화다.

그렇다면 세 번째 운석을 가지게 되면 또 다른 변화가 생긴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운석…… 그걸 가진 사람들이 있을 거야.’

자신도 모르게 양 주먹을 움켜쥐었던 한건은 큰 숨과 함께 주먹을 풀었다.

‘필요한 것부터 구하자.’

배낭에서 돈을 뺀 한건은 문득 돈뭉치를 보며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돈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조차도 어처구니없다.

“뭐, 정말로 필요하면.”

중얼거림을 거실에 남기고 한건은 집을 나섰다.

* * *

아파트 거실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놀이터엔 아이들이 없다. 일요일이지만 코로나 때문에 나와 노는 아이가 없는 거다. 그렇지만 쓰레기는 산처럼 쌓여 있다. 놀이터 옆 재활용분리수거장은 저러다 정말로 산이 되겠다.

‘나부터도 배달음식만 이렇게 시켜먹으니까.’

복잡하고 상념과 감정을 삼킨 윤지희는 창에서 돌아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죽다 살아 돌아와 이렇게 대기 중인 자신의 처지에 자괴감이 든다.

혼자 살아서다.

1팀의 삼분지 일인 열 명이 죽었다.

팀장의 책임이다.

‘팀장 자격이 없어.’

이유를 불문하고 그렇다.

팀원들을 죽게 하고 혼자 산 팀장은 팀을 이끌 수 없다.

그건 윤지희 자신의 생각과 가치이기도 하지만 기획실의 판단도 그런 거다.

이제부터는 뭘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교관은 시켜줄까……’

기획실 산하 아카데미, 그곳에서 훈련생들을 육성하는 일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일 거다. 그런 그 일도 위에서 용인하고 결정해야 가능하다.

‘당장은……'

윤지희 자신의 상태를 정밀하게 점검하는 일이 우선일 거다.

총격을 받아 사망 직전까지 갔던 몸이 회생한 거다.

한건이 운석의 힘으로 살렸다.

그에 대한 감정과 판단은 차치하고, 회생이 이뤄진 결과를 파악함이다.

‘그런 일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어.’

거듭된 놀람을 넘어선 일이다.

그룹산하 병원에서 일차적으로 검진을 마쳤지만 아무 이상이 없는 걸로 나왔다.

죽음을 맞기 전과 동일한 상태다.

더 무슨 검사를 해서 알아낼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복원이다.

‘원래대로.’

아무 이상 없이, 달라진 것 없이, 윤지희 자신은 살아났다.

‘한건, 그 사람이 살렸어……’

그가 왜 그랬는지는 이미 짐작한 대로가 맞을 거다. 살릴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본 거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했다는 게 의미롭다.

“하아.”

복잡한 생각과 감정들이 밴 숨을 내쉬며 윤지희는 tv 리모컨을 눌렀다.

-화재는 진화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현재 소방서에서 출동해 애쓰고 있지만 저택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저택 내부엔 심인구 회장과 가족들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심회장의 칠순을 맞아……

눈을 크게 뜬 윤지희는 등골에 스며드는 예감을 삼키며 뉴스를 봤다.

* * *

침낭과 코펠과 버너와 소형 아이스박스, 필요한 물품들을 산 한건은 두 손으로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삼 차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는 중이다. 아니 이전 집에서 빌려 타던 주인집 자전거가 그립다.

‘우선 라면부터 끓어 먹어야겠다.’

등산용품점 옆 편의점에서 산 라면, 아이스박스 안에서 달그락거린다. 그 냄새가 벌써 맡아진다. 점심은 라면을 먹고 저녁은 사먹을 생각이다.

‘괜찮아 보이는 음식점들이 제법 있네.’

눈도장 해 놓은 음식점들을 돌아보며 한건은 빌라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한숨 돌린 후 코펠을 씻고 물을 끓였다. 소형버너는 성능이 좋다, 앞으로도 가스를 연결할 필요는 없을 터다.

‘물 끓을 동안 뉴스 좀 볼까.’

추적당할 걱정이 없는 폰, 새삼스레 응시하며 한건은 기사를 검색했다.

‘어?’

미간 좁힌 한건은 기사 제목을 바로 클릭했다.

[씨마운틴그룹 심인구 회장 저택 화재.]

기사 본문에 첨부된 영상이 바로 나온다.

역삼동 중심지에 위치한 심인구회장의 저택이 불타고 있다.

소방관들이 물을 뿌리며 진압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딱 봐도 화재는 강력하다.

저 안에 남을 것이 없어 보인다.

‘씨마운틴이라면 그 리조트인데?’

두 해전, 코로나가 퍼지기 전에 큰 사건이 있었다.

화성 제부도 인근의 리조트에서 화재가 났다.

리조트라고 부르기도 뭐한, 합숙소라고 해야 맞을 시설에서 큰 불이 난거다.

당시 화재로 유치원생 23명이 죽었다.

[씨마운틴그룹은 서해 화성일대와 동해 양양 일대에 복합숙박시설을 운영하는 리조트그룹이다. 2년 전 화성 씨마운틴리조트화재사건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시 엄청난 사회적 반향과 공분을 불러일으킨 사건으로 희생자가 23명이나 되는 참화였다. 그 책임소재를 놓고……]

한건은 선명한 기억을 떠올렸다.

법정에서 당당히 나오던 씨마운틴그룹 심인구회장의 모습이다.

유치원생 23명이 희생된 사건이지만 자신은 책임이 없다며 당당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유족에게 최선의 보상을 하겠다는 뻔뻔한 얼굴이었다.

바로 그자의 집이 불타고 있는 거다.

‘대법 판결을 기다리는 중인 걸로 아는데……?’

그렇지만 역시 유전무죄가 될 거라는 사건이다. 그런데 그 장본인 집에 불이 났다. 불법 증축과 용도변경을 위시해 무수한 위법사항이 있었지만 다 피해나간 심인구 회장과 씨마운틴그룹, 지금 화마에 먹히고 있다.

‘인과응보인가……’

기묘한 예감을 삼키던 한건은 라면물이 끓는 소리를 듣고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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