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84화 (184/200)

[외전] 종말전야. 34. 춘천.

34. 춘천.

소양강이 흘러나가는 곳, 봉의산은 난데없이 우뚝 솟은 것 같다. 구시가지인 후평동을 바라보며 강줄기를 등으로 품은 산자락의 작은 아파트는 한림대학교와 유봉여자고등학교를 향해 서서 아침 해를 맞고 있다.

‘봉의아파트.’

두 동짜리 낡은 아파트를 바라보며 유한기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8시다.

기다리라고 한 선배 연우진은 아직이다.

춘천경찰서도 다른 곳처럼 늘 바쁘고 정신없는 곳일 거다. 뭣보다 부탁한 정보를 알아오는 거다.

폰이 몸부림치는 진동을 느끼자마자 확인한 유한기는 귀에 댔다.

“형님, 오는 중입니까?”

-그래, 3분만 기다려라. 거의 다 왔다. 야, 그런데 아침은 먹었냐? 안 먹었지? 어디 가서 아침부터 먹자, 아니면 내가 뭐 좀 사가지고 갈까?

“형님, 시간이 없습니다.”

-하 새끼 성격 여전하네, 알았다. 우선 달려가마.

통화를 끝내고 정확히 3분이 지나자 연우진이 왔다. 두동짜리 아파트의 좁은 주차장에 차를 대는 그에게 유한기는 다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무슨 일인데 이 아침부터 지랄이냐?”

스스럼없이 짜증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연우진, 마흔 넘은 돌싱형사의 얼굴에 깃들기 시작한 주름을 유한기는 봤다. 새삼 측은하고 안타깝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을 품을 때가 아니다. 정말로 시간이 없다.

“부탁한 건 됐습니까?”

“그래, 알아보기는 했다만, 너 무슨 일인데 그러냐? 표정은 왜 그렇게 굳었어? 형수 안 만드냐고 놀리기부터 할 놈이 왜 이렇게 심각한데?”

유한기의 표정을 살피면서 연우진은 점퍼에서 가져온 걸 꺼냈다.

서류봉투, 그 안에 든 a4용지를 유한기는 급하게 꺼냈다. 사건기록이다.

역시 예감대로 그들은 사연이 있다.

삼각관계의 치정폭력으로 기록돼 있다.

“김철기란 놈이 일 년 복역하고 최근에 나왔더라.”

연우진이 말한 자, 김철기는 상봉역전철사건 피해자인 진명희와 안상진에게 폭력범행을 저지른 자다. 원래 김철기는 진명희와 사귄 사이였다. 그런데 진명희가 안상진이란 남자로 갈아탄 거고, 김철기는 폭주했다.

“진명희와 안상진에게 흉기를 휘둘러 상해를 입혔지.”

연우진의 말대로 기록돼 있다. 현행범으로 체포 돼 재판을 받았고 구속돼 복역했다. 김철기가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이를 갈았을지 짐작된다. 두 년놈을 죽이고야 말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거다.

‘그런 자의 손에 운석이 들어갔다는 건데……’

안면의 흉터를 꿈틀거리며 생각을 곱씹는 유한기, 저 얼굴이 저렇게 된 게 자신 때문이라는 걸 새삼 기억한 연우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강력계초짜시절의 일이다. 유한기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죽었다.

“한기야 너 정말 별일 없는 거냐? 무슨 일인데 그래?”

달래듯 말을 꺼낸 연우진은 결의 가득한 눈을 뒷말을 이어냈다.

“옛날 그때, 네가 나대신 칼빵 맞은 걸 잊은 적이 없다. 언제든 갚을 준비가 돼 있다. 언제든지.”

유한기는 연우진의 진심 가득한 눈동자를 응시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의심하지 않는다. 연우진은 정말로 그럴 사람이다.

그래서 여길 온 거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연우진은 더 이상 개입돼선 안 된다. 절대로.

“형님……”

연우진을 부른 유한기는 새삼 치밀어 오르는 감정과 지난 기억들에 젖어 들었다. 자신이 병원신세를 진 그날, 동료가 둘이나 희생된 사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조폭들의 칼에 피 흘리던 동료형사들이 생생하다.

“한기야……”

유한기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 연우진은 흐릿한 미소로 뒷말을 이어냈다.

“네가 정부기관에 특채됐다고 말할 때가 떠오른다. 그때 넌 이미 결심하고 있었어. 경찰도 찔러 죽이는 새끼들을 때려잡을 수 있는 길을, 방법을 찾은 얼굴이었지. 그때 너는 병원 신세지는 환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무서웠다는 말을 연우진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날은 정말로 무서웠다.

쓰러진 동료들의 피흘림이 무서웠고, 칼을 맞으면서도 조폭놈들을 때려잡던 유한기가 무서웠고, 배를 움켜잡은 자신이 죽을까봐 무서웠다.

“그래, 넌 원래 출신이 그런 놈이었으니까.”

피식 웃으며 연우진은 유한기의 어깨를 쳤다. 처음 동두천서 강력계에 왔을 때도 유한기는 화제의 대상이었다. 특수부대출신, 강인해 보였다.

그렇다는 걸 증명하듯이 강력범들을 잡았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졌다.

“그래서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던 네가……”

오늘은 아닌 걸로 보인다는 연우진의 미간 찌푸림.

“형님……”

“네가 부탁한 내용을 서울청에서 온 놈이 먼저 훑었다.”

유한기는 표정을 경직했고 연우진은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그사이 해는 계속 올라갔다.

* * *

남춘천역 주변을 거닐던 한건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꼴이 바보 같아서다. 한양에서 김서방 찾기와 다를 게 없다. 범위를 좁히고 단서를 찾아 좇아가야 하는데, 신원조차 모르니 그게 안 된다.

‘경찰서로 찾아가서 직접 물어봐?’

황당하고 바보 같은 생각이다. 상봉역 전철 안에서 불덩이로 타죽은 남녀의 신원을 알려주십시오, 하면 경찰이 그러십시오 하면서 알려줄 리가 없다. 의심을 받는 건 둘째 치고 청록원과 현중놈들이 달려들 거다.

“춘천에 오긴 했는데, 어디서부터 더듬어야 하나……”

아침 해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던 한건은 결정했다. 어떻든 현재로선 아무 단서가 없는 상황, 앞서 움직이는 자들을 쫓는 거다. 그건 경찰서다.

‘현중이든 청록원이든.’

그들이 춘천에 온다면 경찰서에 들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사전에 전화 한통화로 내용을 다 파악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현제로선 더듬어 잡을 게 그것뿐이다. 그들이 춘천경찰서에 걸음 할 확률에 기대는 거다.

‘뭐든 해야지.’

결론을 잡은 한건은 춘천경찰서를 갈 택시를 잡았다.

* * *

봉의 아파트를 뒤로 두고 나선 유한기는 연우진의 걱정을 밀어냈다.

어차피 자신이 이곳엘 다녀갔다는 건 드러날 거다.

아직 버리지 않은 이 차의 도난신고가 들어갔을 테고, 청록원이 연우진을 놓칠 리가 없다.

‘대응 하는 거야.’

연우진은 이제 경찰서로 들어갈 거다. 하루 종일 그 안에만 있으라고 했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경찰서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 안에 일을 끝내야 한다. 그 후에 연우진은 자신과의 만남을 말하는 거다.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니까.’

징계는 피할 수 없을 거다. 사건기록을 외부인에게 넘겨준 벌을 받게 될 거다.

그런데 연우진이 빼낸 것도 아니다, 서울청에서 온 자가 요구한 걸 직원이 출력한 거고 그걸 연우진인 카피했을 뿐이다. 하지만 유출은 맞다.

‘서울청을 움직인 걸 보면 역시 청록원.’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이기에 그 능력과 행동패턴을 잘 안다. 역시 대응이 빠르다. 그러니 그들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김철기에게 가는 거다.

강한 눈빛을 흘려낸 유한기는 악셀을 거칠게 밟았다.

* * *

수사과장의 미소 속에 수컷의 욕망이 숨어 있음을 윤지희는 분명히 느꼈다. 그래서 일어나는 응징의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마주 미소 지었다.

“협조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요, 현중그룹에서 우리 경찰조직에 지원해 주시는 데 비하면 사소한 일입니다. 대외적으로도 그렇지만 내부적으로도요.”

은밀한 미소를 피워내는 수사과장, 춘천경찰서의 이 너구리같은 자를 보고 있는 게 윤지희는 참기 힘들다. 이자의 말처럼 그룹은 경찰에 지원하고 있다. 보이는 것 말고도 은밀하게다. 그 선을 잡고 여기 있음이다.

“부탁드린 걸 보고 싶습니다만.”

윤지희가 말하자 수사과장은 문서를 테이블에 올리고 윤지희 쪽으로 밀었다. 그런데 이어내는 이야기가 심상찮다. 아니 불길한 예감의 현실화다.

“서울청에서 직원이 왔습니다. 이 내용을 알아봤더군요.”

이 내용, 불타죽은 진명희 안상진과 얽힌 김철기란 인물에 대해서다.

“그렇군요.”

당면한 현실을 삼키며 윤지희는 일어섰다. 수사과장은 당황한 표정이었다가 따라 일어섰다. 바쁜 일이란 걸 이해 한다는 듯 바로 미소 짓는다.

“도움이 됐다면 좋겠습니다만, 더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윤지희는 미소로 목례하고 돌아섰다. 경찰서를 나가면서 짜증을 털어냈다.

‘저런 새끼, 대면 안할 수도 있었는데.’

어차피 춘천으로 이동해야 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저 너구리같은 수사과장의 미소도 마주 본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흐름상의 일이었다.

‘김철기.’

개략적인 내용과 김철기란 이름은 경찰서에 들기 직전에 전화를 통해 들었다. 방문과 목적을 알렸더니 너구리가 굳이 다시 전화를 해 온 거다.

어떻게든 잘 보이려는 수작, 어떻든 이제 주소지로 그를 찾아갈 때다.

‘김철기.’

그 이름을 다시 뇌며 윤지희는 차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대기 중이던 차는 윤지희가 오르자마자 경찰서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윤지희는 흠칫했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들어서다. 뭔지도 모를 느낌이다.

‘뭐지?’

피부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며 윤지희는 경찰서를 돌아봤다.

* * *

“저차 좀 쫓아가 주십시오.”

급하게 택시에 오른 한건은 운전시가가 흘긋 보는 룸미러를 무시하고 앞만 봤다. 경찰서에서 막 나온 차, 검정색 팰리쉐이드엔 윤지희가 타고 있다. 그녀가 경찰서 안에서 나오는 걸 봤다. 예감대로 예상대로다.

‘이제 줄을 잡았으니 반은 된 건가.’

춘천시 외곽으로 달리는 택시 안에서 한건은 느긋한 숨을 내쉬었다.

* * *

“신북읍 율문리란 말이지?”

전화기를 귀에 대고 부하직원의 말을 듣던 황윤성은 짧게 지시했다.

“접근 말고 동태만 살펴.”

이미 강조한 지시를 다시 던진 후 황윤성은 통화를 끊었다. 바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젠 행동할 때인 거다. 춘천으로 가서 운석을 찾는 거다.

물론 청록원과 현중그룹에서 움직이고 있을 거다. 하지만 늦지 않았다.

‘나에겐 운석이 있으니까.’

백금반지를 습관처럼 만진 황윤성은 주차장 문을 향해 리모컨을 눌렀다. 그런데 그 순간 섬광이 터졌다. 엄청난 폭발소리가 차창을 다 박살냈다.

“으!”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 속에서 황윤성은 그들을 봤다. 자신의 정릉 집 주차장을 가득 메운 연막 속의 그림자들, 저들이 누군지도 알겠다.

‘청록원!’

깨달은 순간 운전석을 나가려던 황윤성은 그러질 못했다. 몸을 때리는 충격 때문이다. 앉은 채로 춤을 추게 하는 물리력, 소음기관단총이다.

m4a1의의 무자별 난사 속에서 황윤성은 늘어졌다. 그 앞에 한 남자가 섰다. 핏덩이가 돼서 운전석에 늘어진 황윤성을 향해 나직하게 말한다.

“너 같은 짭새새끼가 우리 청록원을, 나 백곰을 욕보이면 안 되는 거다.”

성난 곰 같은 얼굴을 실록거리는 자, 건장한 어깨를 꿈틀거리며 또 말한다.

“운석에 대해 네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너 따위가 덤벼들 일이 아니야.”

그 순간 황윤성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벌집이 된 몸에서 총알들이 밀려나왔다.

투두둑 떨어지는 그 소리, 황윤성의 움직임이 답을 말해준다.

‘운석!’

백곰은 즉각 권총을 겨누고 발사했다. 데저트이글의 강력한 충격에 황윤성은 다시 비틀거렸고, 그사이에 백곰은 운석을 찾아 눈을 번득였다.

‘반지!’

황윤성이 총탄을 막기 위해 들어 올린 두 팔, 오른손이 잡은 왼손에 반지가 있다.

그것으로부터 기이한 빛이 나고 있다. 본 순간 깨달아 진다.

저것이 운석이란 것, 황윤성을 다시 일어서게 했고 낫게 할 것이란 걸.

백곰은 나이프를 잡았다. 성난 곰처럼 황윤성에게 달려들어 손목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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