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89화 (189/200)

[외전] 종말전야. 39. 기념품.

39. 기념품.

화천버스터미널 주변전경을 돌아본 유한기는 상가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두께감 있는 가을윈드점퍼에 카고바지와 운동화차림, 비니모자에 안경을 쓰고 마스크로 가린 얼굴은 완벽하다고 할 만 하다.

‘움직이자면 돈이 필요한데.’

화천시내를 걸으며 유한기는 생각했다.

훔친 차는 춘천에서 발견될 것이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재활용품 매장에서 훔친 거라 신고가 될 일은 없다.

그렇지만 추적을 안심할 순 없다. 청록원의 능력이면 쫓아온다.

‘그러니 돈이 필요해, 운석이 행운을 준다더니 안 되는 건가?’

한심스러운 생각이라고 마음 한편으로 여기면서도 유한기는 현실을 절감했다.

이젠 돌아갈 곳이 없다.

통장에 든 돈을 꺼내 쓸 수도 없는 처지가 된 거다.

좀도둑질을 계속 하는 건 정말 아니다.

방법이 있어야 한다.

‘운석을 이용할 수 있을 텐데.’

이미 유한기 자신은 운석의 효과를 체험했다.

현중그룹놈과의 싸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났다.

일산의 비즈니스 호텔에선 7층 아래로 뛰어내렸다.

엄청난 육체적 능력이다.

또 다른 변화는 속에서 폭발하는 살의다.

‘그거 말고 다른 게 필요해.’

운석이 가져다주는 행운, 지금은 그것이 절실하다.

그런데 그런 걸 못 느낀다. 아니 없는 현실이다.

지금 도망치는 처지를 생각하면 행운 따위는 없는 거다.

운석이 소지자에게 초기엔 행운을 준다는 정보와 다르다.

‘현중에서 스틸한 해동기지 경비대장 일지, 다산기지에서 돌아온 정인수의 일기, 그 내용을 정확히 모르고 보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는데……’

청록원 윗대가리들은 그 내용을 정확히 알거다. 물론 거기에도 얼마나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가 실려 있는지는 미지수지만, 최소한 유한기 자신 같은 현장요원이 아는 것과는 다를 거다. 그 핵심내용이 바로 행운이다.

‘저절로 행운이 이뤄지는 게 아닌 거야? 그럼 어떻게? 말해? 기도해?’

유한기는 걸음을 멈추고 흠칫했다.

오늘 본 광경이 떠오른다.

현증그룹놈들과 싸우던 김철기의 모습이다.

그놈이 승합차에 손을 대고 터트렸다.

‘터져라 라고 말했어……!’

소름 돋는 감정을 밀어낸 유한기는 바로 말했다.

“돈이 필요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걸 때 같은 신비한 빛은 없다.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는 것은 행동이다. 손을 대고 하는 행동.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거리를 돌아본 유한기는 atm기기를 찾아냈다.

자동화기기만 있는 무인은행창구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cctv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난감, 돈을 빼려면 들어가야 하고 카메라를 피할 수 없다.

‘카메라를 먹통으로 만들면.’

한건이 한 것 처럼이다.

유한기 자신에게도 운석이 있으니 가능할 거다.

그런데 이 일도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른다.

저절로 되면 정말 좋겠지만.

‘차에 손을 댄 것처럼.’

역시 방법은 그것인 것 같다. 해봤고 결과를 누렸으니 틀림없을 거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은 직접접촉을 해서다. 그러니 역시 들어가야 한다.

‘어차피 부딪치는 수밖엔 방법이 없어.’

그렇다, 이제 여기서의 종적이 발견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계속 이동하고 은신해야 한다. 그러자면 돈을 마련하는 게 최우선이다.

‘한다.’

결정한 유한기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세대의 현금지급기를 응시하고 좌측 첫 번째 기계에 붙었다.

고개 숙인 채 기기에 손을 대고 말했다.

“카메라가 먹통이 된다. 이 부스안의 모든 카메라가 작동불능이 된다.”

순간 손끝에서 신비한 빛이 퍼져나갔다. 현금지급기들과 부스전체의 기계장치로 퍼진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찰나의 그 현상을 확실히 인지했다.

‘이렇게 되는 거야……!’

전율 같은 확신을 이사이에 문 유한기는 핵심 목적을 바로 말했다.

“오만원권을 포함한 현금 칠십만원이 나온다.”

말하고 난 유한기는 그 순간 떠오른 것을 이어 말했다.

“은행의 수면계좌에 있는 돈에서 출금한다. 한계좌에서 백원씩.”

기기에 댄 손에서 다시 기이한 빛이 퍼져나간 직후 결과가 나왔다.

촤르르하며 돈세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기가 열렸다.

오만권권 열두 장과 만원권 열장이다.

즉시 꺼내 비치된 봉투에 담고 다음 기기에 바로 붙었다.

화요일 오후, 화천시내의 자동화코너에는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호젓하고 안전한 그 상황 속에서 유한기는 쾌재를 부르며 돈을 인출했다.

* * *

“그러니 우리 유족들로서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식어가는 커피잔을 다시 든 유족대표를 보며 한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커피숍에 마주 앉자마자 말문을 튼 대표는 심중에 담은 것들을 토해냈다. 그 사연과 울분을 폰에 녹음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내 일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저절로 악물린 턱의 힘을 풀며 한건은 거듭 분노를 삼켰다. 작가라는 거짓말로 이렇게 앉아 녹음하는 모습까지 연출하고 있지만, 대표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힘없는 자들이 당하는 부조리다.

“도움이 될까 모르겠습니다.”

뒤늦게 자신이 너무 흥분만 한건 아닌지를 걱정하는 대표, 한건은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막연히 피상적으로 알던 내용과 피해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죠. 그래서 온 겁니다.”

“그러시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안도하는 미소를 짓는 대표에게 한건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종수씨 사연을 비중 있게 다르고 싶습니다만……”

“이종수씨요?”

미소가 사라지는 대표 얼굴을 살피며 한건은 다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비참한 사건이라서요. 아, 유족분들 모두가 마찬가집니다만, 대표성을 가질만한 사례를 전면에 부각시키면……”

“공감과 호응을 얻어내는 일이 훨씬 수월하겠지요.”

어색한 침묵으로 대답한 한건을 대표는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이종수씨가 살해된 사건에 대해선 우리 유족협회도 짐작되는 게 없습니다. 그 사람…… 처음엔 협회 일에 열성이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깰 수 없는 벽과 부딪친 절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침통한 얼굴로 테이블을 노려보던 대표는 다시 목소릴 이어냈다.

“심인구회장 집에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양주 윤기훈의 집 인근에서 왜 그렇게 된 건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건지도 모르겠고, 이건 정말……”

진정 이해 못할 일이라는 대표의 얼굴, 당연한 일이다.

이종수가 운석을 가졌고 그걸로 복수를 결행했으며 그 일에 현중과 청록원이 개입했다는 걸 어떻게 알까.

안다고 해도 어떻게 이해할까.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서 방송사에 제보한 자가 있다던데, 총을 가지고 죽은 두 사람은 청록원이라는 기관의 요원들이라던데, 오늘 나온 간첩사건과 연관되는 건지 뭔지. 하, 답답하고 화만 더 납니다. 죽어서도 당하는 것 같아요.”

죽어서도 당한다는 말에 한건은 미간을 움찔했다.

엄밀히 말하면 맞는 말이다.

한건 자신이 그 일에 일조하는 꼴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종수씨, 용서하십시오.’

마음속으로 사죄를 올린 한건은 오늘 대면의 본질, 핵심을 꺼냈다.

“혹시 이런 물건에 대해 아십니까?”

폰 속에 든 사진을 한건은 대표에게 보였다.

이년 전 신문기사 속의 사진이다.

이종수씨가 화재현장에서 모발을 움켜쥐고 오열하는 광경이다.

그 손엔 모발만이 아니라 팔찌도 있다. 붉은 수실을 꼬아 만든 것이다.

“이 팔찌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걸 왜……”

“참화를 당한 아이의 유품이잖습니까? 현장에서 아이 아빠가 발견한 것이죠. 경찰과 관련조사기관에서 다 훑은 곳에서 유족이 찾아낸 거죠. 상징성이 강한 물건입니다.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강하게 끌어낼 수 있습니다.”

말하면서도 한건은 자신을 욕했다, 하지만 계속 말했다.

“사진을 책에 싣고 싶습니다. 사연을 포함해서요. 기념품인 것 같은데, 출처를 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한건의 눈을 응시하며 미간을 옅게 좁히고 있던 대표는 자신의 손목을 보였다.

“이거 말하는 거지요?”

한건은 눈을 경직했다.

대표의 손목에도 팔찌가 있다.

똑같은 팔찌다.

* * *

현금지급기부스에서 나온 유한기는 품안에 든 돈봉투를 느끼며 미소 지었다.

기기 세대에서 이백십만원을 뽑았다.

작은 액수지만 일단은 충분하다.

다른 기기를 찾아가는 건 나중이다. 이젠 언제든 가능한 일이다.

‘일단 식사부터 하고.’

식당을 찾아 거리를 걷던 유한기는 어탕국수집을 보고 들어갔다. 그런데 코로나 방역지침 때문에 체크를 해야 한다. 폰을 사용할 수 없어 일단 되는 대로 번호를 적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선지 원래 그런지 한산하다.

“어탕국수 주십시오.”

주문하고 구석자리에 앉은 유한기는 이제부터 할 일을 생각했다.

우선은 청록원의 손에 잡히지 않는 일, 살아남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운석이 더 필요하다. 오늘 본 그자처럼 다른 운석을 찾아 능력을 키우는 거다.

‘그자는 누굴까.’

원천과 전체적인 배경에 대한 의구심에 유한기는 침잠했다.

‘운석을 더 가지게 되면 능력이 더 생기는 거겠지? 그래서 내 속에서 이렇게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거고? 그런 거야, 그자도 그런 목적이고.’

그런데 운석 소지자들이 얼마나 더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다.

확실한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 거란 거다.

북극사태로 유출된 것만이 아닌 거다.

다른 것들이 있는 거고 북극사태 이전부터 퍼져 있던 게 분명하다.

-당첨자들이 이렇게나 많이 나온 일은 절대로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국은 이번일의 진상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부정이 있다면……

때마침 tv에서 나오는 시사프로그램에 유한기는 눈을 고정했다. 그렇게 알았다. 비상식적이고 탈정상적인 일이다. 아무리 물로또라도 저건 아니다.

로또당첨자가 백 쉰여섯 명이라는 것, 저건 분명 운석의 힘이다.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거야?’

황당한 충격 속에서 유한기는 예감을 잡았다.

트리거, 보이지 않는 방아쇠의 격발이다.

이일이 그런 일이라는 것, 자신도 그 속의 하나라는 것이다.

* * *

4팀장이 보낸 명단, 로또 당첨자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주소와 주민번호가 기록된 용지를 현인규는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들 속에 운석소지자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전부 다일수도 있다. 이 현실 해석이 어렵다.

‘어디로부터 온 건지……’

알 수 없다.

북극사태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출처가 북극이라면 그곳에서 실종된 자들 중에 누군가 혹은 다수로부터일 수 있다.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건과 정인수 같은 케이스는 없다.

‘북극 조사에 관여하고 있는 청록원은 진실을 알아낼 테지만……’

현중은 그동안 자금을 댄 해동기지 근처에도 못 간다.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현재로선 뾰족한 수가 없다. 북극은 이제 접근금지지역이다.

‘이 명단부터 뒤지는 수밖에.’

이미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모르겠고 알고 싶은 건 이 상황이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되는 건지다.

이건 마치 여태 잠자던 운석들이 일시에 깨어난 것 같다.

무엇인지 모를 계기가 있어 이렇게 된 것만 같은 예감이다.

‘황윤성 같은 자를 보면 운석이 이미 오래전에 퍼져 있었어.’

그것들이, 얌전히 지내던 것들이 이젠 아우성치기 시작한 것 같은 예감이다.

북극사태가 그 촉발의 트리거라고 생각되는 건 비약이라고 여기면서도 떨칠 수가 없다.

이젠 그게 맞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왜일까?

‘왜 지금? 정말 그렇다면 무슨 계기로?’

꿈틀거리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강하게 누른 현인규는 2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유족협회대표 집 앞입니다. 청록원이 오기 전에 작업하겠습니다.

“신속하게 하고 결과 보고해라.”

통화를 끝낸 현인규는 습관처럼 창밖을 응시했다.

* * *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다,

1203호의 현관 앞에 선 백곰은 좌우측 복도 끝의 팀원들과 눈빛을 교한한 뒤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문이 열려있다. 강제개문하려 했던 의도를 비웃듯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음!’

거실에 쓰러져 있는 자가 유족협회대표라는 걸 백곰은 한눈에 알아봤다. 다가가 보니 인사불성이다. 누군가, 아니 현중에서 먼저 손을 댄 거다.

“후우.”

무거운 숨을 흘려낸 백곰은 다가온 팀원들에게 지시했다.

“살려, 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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