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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2부 : 미래의 기사들과 접촉하다 (4) (12/303)


012. 2부 : 미래의 기사들과 접촉하다 (4)
2022.09.12.


심지어 거부 자체가 없는 퀘스트다.

이것도 내 보상에 속하는 건가?

아니면 ‘세계 파멸 메인 프로그램’이라는, 알 수 없는 시스템의 일부인가?

처음에는 좀 벙쪘으나 생각해 보니 차라리 잘됐다.

갑자기 초월적인 매니저라는 직업을 갖게 됐다고 해서 천성마저 변한 건 아니거든.

나 같은 소심쟁이에 아싸한테는 이런 식으로 목표를 설정해주는 편이 차라리 수월하다.

책으로 - 아니, 시스템 창으로 교우 관계를 배우게 생겼구나.

마침 조설아가 밥을 먹자고 하니, 거기에 차윤성을 끼워 넣을 생각이다. 1타 2피다.

꼭 그래서만이 아니라 동료들끼리도 서로 친해지면 좋지. 시너지가 더 크게 날 테니까.

사실, 미래에서 차윤성과 조설아는 빈말로라도 사이가 좋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앙숙에 가까운데, 둘의 행적을 보면 이상하지도 않다.

조설아는 가장 오래된 기사단이자, 시민 보호와 국익 실현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신 기사단 소속.

차윤성은 통제가 어렵고 거친 기사가 많기로 유명한 폭풍 기사단 소속이었다.

하지만 지금 차윤성은 미래의 광마가 아니니까……. 아직까지는.

둘 다 다른 종류의 낯가림이 심해서, 내가 고생은 좀 하겠지만.

마침 모레가 토요일이니 그날 약속을 잡아야겠다.

난 두 사람에게 각각 답했다.

먼저 조설아에게.

-나 : 그럼 모레 점심 먹을까?

-병아리 권후 : 응, 좋아.

거의 실시간으로 답이 왔다.

얘는 폰을 끼고 살고 있나.

-나 : 신촌역 근처 괜찮아?

-병아리 권후 : 좋앙! 1시에 봐.

좋앙이라니.

어릴 때의 권후는 귀여웠구나.

문득,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떠오른다.

건틀릿 낀 주먹으로 인베이더를 때려죽이던 사람이…….

아무튼, 이쪽은 됐고.

-나 : 윤성. 뭐함?

-미치지 말자 : 공부한다.

-나 : 토요일에 점심 먹을래?

-미치지 말자 : 너랑 둘이? 갑자기? 왜?

-나 : 원래 다른 친구랑 보기로 했는데, 둘만 먹으려니까 좀 어색해서.

-나 : 참고로 여자임.

-미치지 말자 : …

잠시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는 듯하던 윤성이 답해왔다.

-미치지 말자 : 네 여친?

-나 : 전혀! 그런 사이 아니다. 말하자면 좀 긴데, 나도 두 번째 보는 거야.

-미치지 말자 : 그런데 갑자기 웬 밥.

-나 : 걔도 너와 비슷한 케이스거든. 각성을 앞당기는 법에 대해 내가 얘기해준 거, 기억하지?

기사를 가까이에서 오래 접하면, 소질 있는 자의 각성도 앞당겨진다는 말.

차윤성을 자주 보려고 깔아둔 밑밥이다.

명왕 손태준의 말에서 떠올린 것이긴 한데, 갖다 붙이기에 편리하고 내용도 그럴듯하다.

내 옆에 오래 있으면 아이템과 다크 스톤이 떨어질 테니 완전히 근거 없는 얘긴 아니지.

-미치지 말자 : 좋아. 밥은 네가 사는 거다.

아무렴. 네 형편을 아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자식뻘 꼬꼬마들한테 밥 얻어먹겠냐.

-나 : ㅇㅋㅇㅋ. 그럼 토요일 1시에 신촌역에서.

-미치지 말자 : 그래

허허. 이거, 거의 35년 만에 고등학생 때 말투로 채팅하려니까 민망하구만.

그래도 그럭저럭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회귀의 첫날.

긴 하루였다.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나는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한 뒤, 준비 노트에 적어가며 미래의 계획을 세우다가 침대에 누웠다.

졸린 와중에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든다.

내일 아침에 깨어나면 모든 게 꿈이었거나, 정신 공격에 당하던 중이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이다.

-현재 수치는 15입니다.

앞에 물음표 뭔데.

매번 거슬리는 메시지였지만 이때만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꿈이나 환각은 아니라고, 퉁명스러울망정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

나는 의식처럼 나이트 태그를 꼭 쥔 채 잠에 빠져들었다.

* * *

회귀 둘째 날, 아침 7시 정각.

알람도 맞춰놓지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고, 문밖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정우 엄마, 나 나가오.”

“벌써요? 오늘 오후 근무 아니에요?”

“그쪽도 일손이 모자라서. 뭐, 수당 챙겨 주겠지.”

“수당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잡겠네, 에그.”

“서쪽을 빨리 정비해야 사람들이 옮겨가서 살지.”

“당신, 설마 차원문 근처에서 일하는 건 아니죠?”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고.”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꿈이 아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

“정우, 깼냐?”

“네. 식사는 하셨어요?”

“오냐, 먹었다. 학교 잘 다녀오고, 힘들겠지만…….”

주머니를 뒤적거린 아버지가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반년만 잘 버티자. 넌 좋은 대학 가서 아버지 같은 일 하지 말고 살아야지.”

“……네.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담뱃값 같았지만 굳이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차원문이 열리고 인베이더가 일상이 된 나날이었으나, 많은 부모님의 소망은 여전히 비슷했다.

자식이 당신들보다 낫게 사는 것.

그런 일상이 이어지게 해야 한다.

아버지가 먼저 출근하신 뒤, 나도 학교로 향했다.

미리 지도 앱으로 위치를 봐뒀기에 쉽게 찾아갔다.

교문 앞에서부터 본관까지의 길가에 흐드러진 벚꽃이 반갑다.

초록색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도, 노랗게 칠해진 본관 건물도 그대로다.

35년 만에 찾아온 학교를 보자 의외로 감개무량했다. 별로 좋은 추억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전반적인 기억이 흐려진 걸 빼곤 학교에서도 별일 없이 지나갔다.

조례 끝나고 담임이 교무실로 불러서 한 차례 훈계했을 뿐이다.

“이정우. 너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이때가 제일 중요해. 지금 성적이면 Y, K대는 물론이고 조금 무리하면 S대도 노려볼 수 있잖아.”

와, 내가 그렇게 공부를 잘했었나? 기억력이 좋아서 암기에 능했던 건 생각나지만.

그나저나 학생 때는 완전히 큰 어른처럼 느껴졌는데, 이때의 선생님은 나보다 열 살은 넘게 어렸겠구나.

아버지 때처럼 뭔가 신기하고 짠하다.

“뭐야, 별로 심한 말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아련하게 봐?”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분전한다고 해도 어차피 올해 친 수능시험 결과는 쓸모없어진다.

내년 4월에 발생하는 대폭주로 한동안 사회 기능이 마비되는 탓이다. 올해 수능 친 수험생들도 많이 죽고.

그래도 속 안 썩이게 애는 써야지. 표면적으로는 문제 더 일으키지 말자.

“앞으로 이러지 마라. 알았지?”

“네, 선생님. 그냥 컨디션도 너무 안 좋고, 좀 지쳐서 하루 쉬었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그래. 내가 특별히 벌점 안 주고 그냥 병결로 처리했어. 그러니까 잘해, 인마.”

“예, 감사합니다.”

이 시절의 나에 대해 한 가지가 더 떠올랐다.

나, 친구가 정말 없었구나.

왕따당한 기억은 없었으니 자발적 은따라고나 할까.

어려운 가정 형편에, 어떻게든 부모님 실망 안 시키려고 공부만 판 탓인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벽을 만들었지만.

HVR방에 가는 정도가 유일한 기분전환이자 취미였다.

그조차 친구들이랑 거의 안 하고 혼자 했으니 말 다 했지.

‘어차피 잘됐지, 뭐. 친구 있어 봐야 지금의 나한테는 너무 어린애고, 귀찮기만 할 텐데.’

문제는 방과 후에 벌어졌다.

수업 마치고 교문을 나오는데 검은 세단 한 대가 근처에 서 있었다.

어쩐지 거슬려서 눈길을 줬더니,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서 나온 사내가 나한테 똑바로 다가왔다.

검은 양복 차림에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은 건장한 남자다.

아무리 봐도 기억에 없는 사람이라 고개를 갸웃거리자니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말했다.

“이정우?”

“…….”

뭔가 싶어서 잠자코 쳐다보았다.

남자가 한 손으로 내 멱살을 잡고 왼쪽 가슴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맞네. 선유고 3학년 이정우. 너, 양정고 윤철진 학생이랑 차윤성 알지?”

윤철진에게는 학생이라는 말을 붙이고, 차윤성은 그냥 이름을 부른다. 무슨 일로 왔는지 대충은 알 것 같다.

“윤성이 친구인데.”

혹시나 차윤성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대꾸한 직후.

“하.”

짧게 웃은 사내가 오른손으로 내 뺨을 후려쳤다.

철썩!

아, 또 따귀 맞았다.

인정사정없이 친 거라, 고개가 휙 돌아갔다.

“꺅!”

하교하던 여학생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당연히 실질적인 타격은 전혀 없었고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은 패시브 스킬인 ‘금강불괴’로 보호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분은 몹시 더러웠다.

아마, 사내는 한 대 갈겨서 내 기를 죽이려 한 모양이다.

그런 뒤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나를 차로 끌고 가려 했다.

“자리 옮겨서 얘기하자. 너랑 할 얘기가 좀 많다.”

나는 사내에게 질질 끌려갔다. 내 신체 능력 자체는 고등학생 시절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대신, 내게는 이자를 단숨에 보내버릴 아이템과 스킬들이 있다.

짧은 시간, 무수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여기서 조져버릴까? 아니면 일단 차에 타고 봐야 하나?

세파시 시스템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끌려가면서 사내에게 말했다.

“윤성이한테도 갔다 왔냐?”

“허, 이 새끼 봐라. 하긴, 이렇게 건방지니까 도련님을 건드렸지. 그분이 누군지 알고……. 넌 주옥된 거야, 새끼야.”

대낮에 학교 앞에서 폭력에다가 납치라.

차원문과 인베이더 출몰로 인해, 이 무렵 치안이 많이 약해졌음을 고려해도.

뭐 얼마나 대단한 집안이기에 이런 일을 공공연히 저지르지?

‘빡치네.’

내가 아무리 소심하다고 해도 울컥 짜증이 났다.

노숙자가 되기 직전의, 거의 사회 최하 계층으로 30년 넘게 살면서 온갖 멸시와 갑질을 당했다.

그런 일을 새로 얻은 삶에서도 또 겪는 건 사양이다.

<부당함에 대한 분노로 스트레스 수치가 30 증가합니다.>

-현재 수치는 40입니다.

나는 확 엎어버릴까 하다가 간신히 억눌렀다. 눈을 휘둥그레 뜬 학생들이 쳐다보고 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아직 내가 기사일지도 모른다거나, 그 비슷한 소문이 나기에는 이르다.

분명히 정부나 기사단에서 학교로 접촉해올 것이다.

여기서 일을 벌여 봐야 목격자만 많아지고 근본적 해결도 안 된다.

그보다는 순순히 끌려가서 ‘처리’하는 편이 낫다.

분명히 인적 드문 곳 아니면 윤철진 그 자식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테니까.

<‘지나친 신중함’ 특성이 발휘됩니다.>

-분노 억제에 성공했습니다.

그것참, 고맙네.

나는 짐짝처럼 뒷좌석에 처넣어졌다. 다행히 영화처럼 재갈 물리고 눈을 가리는 짓까지는 안 했다.

어차피 고등학생 애송이라 여겨서인지, 날 끌고 온 놈과 운전사 외에는 다른 사람도 없었다.

방심하고 있다. 내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부우웅!

외제 세단은 곧 육중한 기동음과 함께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길을 돌다가 양화대교를 건너 강변북로를 따라 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설마 싶었다.

그러다 한남역 삼거리에서 방향을 트는 순간.

‘이것들, 진짜 미쳤네.’

나는 사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았다.

이태원.

서울에서 가장 위험한 차원문이 열린 출입 통제 구역, S급 위험 지역으로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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