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5부 : 변화시켜 나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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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5부 : 변화시켜 나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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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5부 : 변화시켜 나가다 (2)
2022.09.30.
<스트레스 수치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새로운 신경증, ‘적응 장애’를 획득했습니다.>
-학습 능력 효율이 2% 감소합니다.
-가족 이외의 사람과 상호작용할 때 스트레스 수치가 5 증가합니다.
-현재 수치는 0입니다.
-현재 신경증 : 트라우마, 무기력증, 적응 장애
“…….”
이것 참 고맙네.
아주 사람을 환자로 만드는구만.
가뜩이나 무기력증 때문에 뭐 하려고 할 때마다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는 기분이라 짜증 났는데.
어째 시스템이 신난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집에 돌아오자, 엄마와 정아가 뭔가 얘기하느라 바빴다.
살짝 흥분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가족애’ 특성이 발동했습니다.>
-스트레스 수치가 감소합니다.
덩달아 나도, 새 신경증을 얻은 탓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좀 풀렸다.
“다녀왔습니다.”
“오빠!”
정아는 내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달려왔다.
“오빠. 오늘 아침에 우리 교실에 갑자기 나타났던 사람 말이야.”
“응?”
“나, 다 알아.”
갑자기 뜨끔했다. 그럴 리가?
분명 투명화를 유지하다가, 풀린 뒤에는 기만자의 가면을 계속 쓰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 오빠 아는 사람이라며?”
휴, 그럼 그렇지.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너네 교실에 누가 나타났다고?”
“모른다고?”
“응.”
“엄마 말이, 오빠가 아는 분한테 말해서 나 도와준다고 했다는데?”
“그러니까 누가, 뭘 어떻게 도와줬는지 알아듣게 얘기 좀 해봐.”
“아니, 내가 어젯밤에 해준 얘기 있잖아. 오늘 아침에도 그 무서운 언니들이 찾아와서 애들 돈을 빼앗고, 내가 돈 없다고 하니까 막 때리려고 했거든?”
“그런데?”
“그때 그 멋진 가면 쓴 아저씨가 딱 나타나서, 나 때리려고 한 언니 손목을 탁 잡고 이러는 거야. 얘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라!”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게다가, 그 오페라의 유령 같은 가면이 멋지다고?
정아의 머릿속에서 당시 상황이 뭔가 상당히 왜곡되어 있군.
뭐, 무서워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나는 물 한 컵을 따라 마시며 정아의 말을 계속 들었다.
“그러고서는 언니들을 교실 밖으로 던져버렸어. 대박이지?”
던진 적도 없다만.
엄마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나는 넌지시 정아를 떠보았다.
“그래……. 그런데 그거 영 수상한 놈 아니냐? 가면을 쓰고서 갑자기 여학생들 교실에 뛰어들다니.”
“그렇게 말하지 마! 우리 구해주시려고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고. 현장을 잡아야 하니까.”
알아서 이유를 만들어주는군.
정아 말로는, 그 뒤에 경찰에 신고한 학생도 없었다고 한다.
일진들한테서 보호해준 가면 아저씨가 혹시나 잡혀갈까 봐.
이거 좀 감동이네.
그러나 내 감동은 이어진 정아의 말에 곧 파괴되었다.
“힘센 것도 그렇고 갑자기 교실 안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혹시 그 아저씨가 그분 아닐까?”
“누구?”
“이진욱.”
정아가 말한 이름을 들은 순간, 나는 하마터면 입에서 물을 뿜을 뻔했다.
“그럴 리가.”
하필 찍어도 그 인간이냐.
“왜! 오빠가 어떻게 알아?”
이진욱은 사신 기사단의 일원이다. 그냥 일원도 아니고 무려 부단장이며 ‘팔랑크스’라는 별칭이 있다.
사신 기사단은 고작 다섯 명으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사들이 무수히 출현한 뒤에도 명성을 떨쳤다.
개개인의 실력도 뛰어난 데다 다섯의 조화가 훌륭한 까닭이다.
손태준은 전술 지휘관인 동시에 뛰어난 리더이자 포지션으로는 탱커다. 자진해서 선두에 서는 그의 성격에 어울린다.
이진욱은 용맹한 딜러로, 팔이 긴 데다 나이트 기어 또한 4미터에 달하는 장창이다. 그에게 팔랑크스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최혜인은 안전한 뒤쪽에서 둘을 치료해줌과 동시에, 그녀 자신도 강력한 원거리 활 공격을 한다.
특히 이 세 사람의 파티는 각자의 강함에 조화가 더해졌다.
이들을 포함한 한국의 기사 여덟을 일컬어 팔왕(八王)이라 하는데, 이건 아직 나중의 얘기다.
지금은 국내의 기사를 다 합쳐도 아홉 명이 전부니까. 그중에서 팔왕을 가리는 것도 우습다.
참고로 우리 윤성이와 설아도 당연히 팔왕의 일원이 된다.
‘어떻게 된 거니?’
눈짓하는 엄마에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 잘 해결됐다는 의미로.
엄마의 얼굴에 기쁨과 안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뿌듯하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남았다.
“가면 아저씨, 그럼 정체가 뭘까……. 진짜 멋있어…….”
“아직 안 알려진 기사가 분명해……. 사신 기사단보다 더 강할 거야.”
“데뷔하면 분명 뜬다. 뜨기 전에 미리 찜해둬야 하는데. 굿즈랑…….”
정아가 몽롱한 눈빛으로 자꾸 저딴 소리를 해대니 소름이 돋는다는 거다.
데뷔는 무슨. 굿즈는 또 뭐고.
뭐, 오늘 하루 정도는 놔두자.
내가 봐도 살짝 무서운 춘옥이 앞에서 당당하게 할 말 다 하던 모습은 동생이라도 멋졌으니까.
다행히 엄마가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말을 돌렸다.
“정우, 얼른 씻고 오렴. 밥 먹자.”
“네. 아버지는?”
“오늘 밤 타임이시란다.”
“아이고, 내일 아침에 들어오시겠네.”
“그렇지. 몸 상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버지가 화제에 오르자, 정아도 가면 기사 얘기를 그만두고 진지해졌다.
“아빠 다른 일 하시면 안 돼? 기술도 좋잖아.”
“요즘 어디 일 구하기가 쉽니.”
아버지는 원래 막노동꾼이 아니라 전자 설비 엔지니어였다.
업계에서 꽤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로 실력도 좋았다. 당연히 몸값도 높았고.
그런데 다니던 회사가 용산 근처에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2021년 4월 10일.
이태원에 차원문이 열린 그 날에, 회사가 있던 건물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토요일이라 출근한 사람이 없어서 사망자가 안 나온 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서버와 워크스테이션 같은 고가의 설비는 물론, 개발 중이던 신제품 관련 자료 등이 모조리 소실되었다고 들었다.
회사를 세울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했으며 사적으로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던 대표는, 마력 후유증에 그 충격까지 더해져 쓰러졌다.
다른 직원들 몇몇은 좋은 조건으로 대기업의 스카우트를 받아 가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 외에도,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느라 당신의 취업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스카우트 받아서 간 직원들이 회사의 핵심 기술을 하나둘 빼돌려서 가져갔다. 그게 스카우트의 조건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 끝내 대표 아저씨가 못 일어나고 돌아가셨고…….
집에 모아뒀던 돈도 다 떨어져서, 아버지는 원래의 회사 살리기를 포기하시고 돈 되는 일이라면 아무거나 다 하셨다.
막노동부터 해서 급기야 차폐벽 관리하는 일까지.
사실, 마음을 정하고서도 이번 주 내내 고민해왔다.
아버지께 목돈을 드리고 쉬시게 하는 게 정말 잘하는 일인지.
그 고민의 결론을 지금 내렸다.
돈의 출처나 부모님의 의심이 문제가 아니다.
막말로 그런다고 두 분께서 날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칠 것도 아니잖아.
아버지의 건강과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도 거액이니만큼 괜한 걱정을 끼칠 수 있으므로, 우연히 아이템을 주웠다고 하얀 거짓말을 할 셈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차폐벽 바로 옆에서 일하시는 거 더는 못 보겠다.
인베이더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고,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 조금씩 새 나오니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칠 거다.
저번에 마음먹은 대로 김용화 대표에게 연락해서, 다크 스톤을 대량으로 판매할 의향이 있으니 가용 자금을 최대한 준비하라고 해야겠다.
겸사겸사 인영 씨 면접 얘기도 하고.
일단 결정하고 나자 마음이 편하다.
내가 가진 것들을 이용하여, 주변부터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바꿔 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렇게 해나가서 가장 가까운 비극부터 막아야지.
새삼 결의를 다졌다.
씻고 나와서 엄마를 도와 저녁상을 차렸다.
오늘 저녁 메뉴는 묵은지 고등어찜과 달걀말이 그리고 서너 가지 반찬이다.
“와, 진수성찬이네.”
“이게 무슨.”
엄마는 쑥스러운 기색이지만 나는 진심이다.
36년간 혼자 밥을 챙겨 먹으면서, 끼니를 준비한다는 게 얼마나 번거롭고 힘든 일인지 잘 알게 되었다.
장 봐서 손질하고 조리하고 차려내고 설거지하고…….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라면 아니면 도시락으로 때웠다.
지금만 해도, 당장 일주일 식단만 준비하는 것조차 막막하다.
새삼 느꼈는데 엄마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없는 살림에도 최대한 경제적인 재료로 맛깔나게 차려내는 재주가 있다.
이 실력을 살릴 방법이 없을까?
“고등어는 좀 싼가?”
“비싸지. 그래도 다른 생선과 비교하면 제일 싼 편이야. 이제 갈치나 굴비 같은 건 엄두도 못 내.”
“헐, 오빠. 벌써 한 그릇 다 먹었어?”
가족과 이런저런 잡담 하면서 먹는 밥이 꿀맛이다. 역시 밥은 같이 먹으면 더 맛있다.
“어머, 연속극 할 시간이네.”
엄마가 화들짝 놀라 TV를 켰다.
거의 온종일 집안일만 하는 엄마에게 TV는 작지 않은 낙이다.
정아도 가끔 엄마와 같이 봐서 내용을 아는 모양이다.
“엄마, 저 여자가 지금 주인공 남편 꼬시는 거지?”
“그래. 저게 아주 나쁜 여자야.”
“그런다고 홀랑 넘어가는 남편도 나쁘지 뭐.”
“그것도 그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의 대화를 배경음악처럼 들으면서 두 그릇째 밥을 먹었다.
그때, 화면 하단으로 뉴스 속보가 지나갔다.
-속보 : 연희동에서 6번째 연쇄살인 사건 희생자 발견.
“어이구, 죽은 사람이 또 나왔네.”
엄마가 가볍게 진저리쳤다.
저게 이때였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상기하면 영화에도 나왔던 연쇄살인 사건이 떠오르듯.
워낙 강렬한 사건이었으니까.
다만, 특별히 나나 내 주변인과 얽힌 사건은 아니었다.
일명 ‘근린공원 연쇄살인 사건’이다. 희생자들이 모두 서대문구와 마포구 일대의 공원에서 발견되어 붙은 이름이다.
이 사건으로 죽은 사람은 모두 13명이었다.
한국은 외국과 비교해 살인 사건 자체가 적은 편이라 더 크게 보도되었다.
장소 때문에 처음에는 인베이더의 소행으로 추정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인간의 짓으로 여겨졌다.
희생자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전원 20대의 젊은 남녀라는 것.
그리고 끔찍하게도, 모두 머리와 내장이 사라졌다.
인베이더 대부분은 이런 규칙성을 잘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닥치는 대로 잡아먹을 뿐이다.
정체불명의 범인은 잊힐 만하면 같은 방식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다 13명을 죽인 뒤 갑자기 활동을 멈췄다.
범인이 시신을 버리러 공원에 왔다가 인베이더에게 당해 죽은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끝까지 범인의 실마리를 밝혀내지 못해서 경찰이 엄청난 질타를 받았다. 13번째 사망자가 나온 뒤 서장인지 총장인지 높은 사람이 교체되기도 했다.
“너희 둘 다 조심해.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잖아.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인적 드문 곳 피해 다니고.”
“무섭다.”
“엉, 엄마.”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토요일이 왔다.
또 오전부터 집을 나섰다.
오늘은 할 일이 많다.
용화 상사에 들러서 다크 스톤도 왕창 팔아야 하고, 한세대에 들러 김태훈도 살펴봐야 한다.
아버지는 차폐벽 보수 작업을 하시는 까닭에, 은근히 이것저것 주워듣는 게 있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도 모처럼 다 같이 식사하던 도중, 반쯤은 한탄하듯 반쯤은 지나가는 듯 말했다.
“아이템인가 뭔가가 그렇게 비싸다는데, 나한테는 하나 안 떨어지나?”
엄마가 호기심 어린 투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비싸요?”
“그렇다네. 뭐 물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레어 등급인가 뭔가 하는 것만 주워도 수천은 된다는군. 그 위로는 기사단에서 직접 수십억을 주고 사들인다는구려.”
“어쩜, 세상에. 진짜 당신이 하나 주우면 팔자 피는 거네요.”
“그게 그렇게 쉽게 보이는 거였으면 다들 부자 됐겠지, 허허. 인베이더를 잡아야 떨어진다는데…….”
“힉, 그럼 안 돼요!”
일반인에게 인베이더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집에만 계신 엄마도 잘 알 정도였다.
아마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면 엄마는 졸도할지도 모른다.
이제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은 아버지께서 한 달에 두 번 쉬시는 일요일이다.
가족회의를 소집해서 돈 드리고 일 그만두시게 할 거다.
용화 상사에 들어서자 늘 맞이하던 박세연 대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던 하인영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VIP 고객님.”
내 추천을 받은 김용화가 하인영을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이번 주말부터 당장.
하인영도 훨씬 좋은 보수와 환경에, 큰 고민 없이 자리를 옮겼고.
나는 하인영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VIP는 무슨.”
“저희한테는 제일 귀한 손님이니까 VIP죠. 사장님이 엄청나게 신경 쓰시던데요?”
“어색하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해, 누나.”
기분 나쁘지는 않네.
지나온 생에서 내가 VIP가 되어본 적이 있었던가.
하다못해 통신사 카드조차 VIP를 받지 못했다. 알뜰폰만 썼기 때문이다.
서류 업무 중이던 박세연이 일어서서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정우 님.”
“안녕하세요. 세연 씨.”
대표실에 있던 김용화도 재빨리 사무실로 나왔다.
“오셨군요, 이정우 씨.”
그에게는 미리 말해뒀다. 오늘 다크 스톤을 왕창 팔 생각이니까, 가용 자금 다 준비해두라고.
“인영 씨, 미안한데 회사 카드로 여기에 적힌 것 좀 사다 줄래요?”
“넵, 사장님.”
김용화가 타이밍 적절하게 하인영에게 가벼운 심부름을 시켰다.
내가 그녀와 친하기는 해도, 보유 자산을 다 드러낼 정도의 사이는 아님을 파악한 것이다.
인영이 나간 뒤, 나는 배낭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얼마까지 되나요?”
“일단 50억 준비했습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100억까지도 가능했을 텐데, 대출 심사하고 승인받을 때까지 시간이 좀 부족해서요.”
“뭐, 나머지는 앞으로 천천히 거래하면 되니까요.”
“그럼요.”
50억이면 다크 스톤 천 개다.
꾸준히 다크 스톤을 공급하겠다는 조건에 개당 500으로 계약한 까닭이다.
그래도 한 번에 거금을 주는 데다, 애초에 시세보다 높게 받았으니 보너스를 좀 주기로 했다.
앞으로 아이템 관련해서도 김용화에게 신세 질 일이 있을 거다.
며칠 만에 50억을 준비하는 자금력도 확인했고.
“같은 금액에 1,100개 드릴게요.”
“어이쿠, 감사합니다! 사양하지 않고 받겠습니다.”
김용화는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내가 5억을 깎아준 셈인 데다, 그의 연구는 다크 스톤이 많을수록 좋다.
돈에 크게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니 후자의 이유가 더 클 것이다.
어차피 내게는 무한대에 가까운 다크 스톤이 있다.
마음먹고 시장에 풀었다가는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도 가능할 정도의 양이다.
그중 극히 일부를 써서, 믿을 만한 거래처에게 인심을 베풀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이제 인영의 직장이기도 하고.
“나이트 기어 연구는 잘 되어가나요?”
“그게…… 과정 자체는 순조로운데, 아직 딱 이거다 싶은 물건이 없네요. 실제 기사(騎士)가 써보고 피드백을 좀 해주면 훨씬 개발이 수월할 것 같은데, 아시다시피 제가 대한 전자와 좀 껄끄러운 관계이다 보니……. 그쪽에서 사신 기사단과의 접촉을 원천 차단하고 있어요.”
눈살이 슬쩍 찌푸려졌다.
대한 전자.
명색이 한국 최고, 세계 10위권 내의 첨단 기업이면서 치졸하게 나오네.
바꿔 생각하면 그만큼 김용화의 능력을 경계한다는 뜻도 되겠지.
그러다 문득 차윤성과 조설아가 떠올랐다.
둘은 아직 각성하지 못한 상태다. 즉, 스킬을 의지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이미 스킬이 생성될 정도의 마력이 체내에 쌓인 지는 꽤 됐다. 그 상태에서 신체 강도와 기운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강화하여 레벨이 오르는 것이다.
기사란 그런 내부 변화로 인한 힘을 자유로이 다루며, 본인의 개성에 따른 스킬과 전용 장비를 쓰는 이를 일컫는다.
문제는 그 각성 타이밍을 나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
각성을 해야 스킬과 나이트 기어를 다루게 될 텐데.
나이트 기어는 보통 마력 아이템과는 의미가 달라서, 내가 무작정 쥐여준다고 되는 게 아니다.
본인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무기이자,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무기여야만 한다.
최혜인의 주몽궁이나 명왕 손태준의 거대한 낫, 블랙 사이드처럼.
각성하게 되면 저절로 무기를 보관하는 아공간을 열 수 있게 되는데, 인벤토리를 가진 나와 달리 단 하나의 무기만 넣을 수 있다.
그 단계까지 간 무기가 바로 나이트 기어로, 해당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기사에게 나이트 기어는 유일무이한 것이며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 밖의 장비 - 갑옷과 장신구 등은 원래 사냥해서 구하거나, 마력 아이템 제작이 가능한 업체에서 구매해야 한다.
윤성이와 설아에게 김용화의 실패작을 보여주고 다루게 해보기만 해도 각성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가 무기 아이템을 이것저것 무한정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말이 된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둘의 성향과 특징을 파악하여 적합한 아이템을 골라주면 되고.
기사 테스트를 진행 못 해 전전긍긍인 용화 상사에도 좋은 일이다.
“혹시 나중에 견본이 나오면 좀 구경할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김용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참, 판매 대금은 지금 바로 이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세금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지요.”
“아, 세금……. 네.”
“거래액이 제법 커서, 국세청에서 조사가 좀 세게 들어올 겁니다. 최대한 정우 씨가 신경 쓸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만 앞으로 계속 거래하실 거면 어떻게든 세금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냥 내버릴까요? 어차피 국가 예산으로 쓸 텐데.”
“그냥 내셔도 되지만, 그러면 정우 씨 나이가 문제 될 수도 있습니다. 다크 스톤은 주요 자원이니 정우 씨한테도 출처를 캘 테고요.”
“아…….”
“최악의 경우, 다크 스톤을 확보하려고 정우 씨 신병을 구속하려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까요?”
“상대가 기사라면 몰라도 민간인이면…… 인권보다는 주요 전략 자원 확보를 우위에 둘 테지요. 한국이 비정상적으로 평온해 보이는 것이지, 지금은 전 세계가 비상 상황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렇군. 역시, 어느 시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힘을 드러내야겠다.
솔직히 세금 관련해서는 잘 몰랐다.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았으니 알 턱이 없지.
김용화는 이번에도 역시 다크 스톤의 출처는 묻지 않았다. 신뢰에 대해서는 한결 같은 사람이다.
“참, 이번에는 이쪽 계좌로 보내주세요.”
나는 새로 만든 인터넷 은행의 계좌번호를 김용화에게 알려주었다.
기존 계좌는 내 전용으로 쓰고, 새로운 인터넷 은행 계좌의 대금을 아버지께 드림과 동시에 입출금 내역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보낸 이 이름에 용화 상사라고 찍힌 내역 하나밖에 없을 테니, 아이템을 주워서 팔았다는 내 말의 신빙성이 좀 더 올라가겠지.
김용화의 말대로라면 정확한 자금 출처는 가족들도 모르는 편이 낫다.
또, 내가 고른 인터넷 은행의 일일 출금과 이체 한도가 더 크며 수수료 전액 무료인 까닭도 있다.
“아, 계좌를 새로 만드셨나 보네요. 알겠습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저쪽입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인벤토리의 다크 스톤을 선택, 개수를 지정하여 소환했다.
용화 상사에서 준비한 자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몰라서 미리 소환해 두기가 어려웠다.
바로 밑에 배낭을 대고 허공에서 쏟아지는 것들을 그대로 담았다.
내가 가진 다크 스톤은 애초에 탁구공보다 작은 크기에, 무게도 개당 10그램 정도밖에 안 된다. 1,100개를 담아도 11킬로그램에 불과하다.
“실례했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배낭을 거꾸로 뒤집어, 박세연이 준비해둔 커다란 특수 케이스에 다크 스톤을 쏟아냈다.
다크 스톤이 합금 케이스에 떨어지면서 듣기 좋은 차라락 소리를 낸다.
모두 같은 크기에 완벽한 정 12면체.
보는 각도에 따라 다 다른 색의 신비한 빛을 발하는 미지의 에너지 덩어리.
검은 보석 같은 다크 스톤 1,100개가 쌓인 모습은 장관이었다. 사무실이 은은한 보라색으로 밝아졌다.
“와…….”
박세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음.”
김용화도 신음을 흘리며 다크 스톤 무더기를 찬찬히 살폈다. 아마 감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사이 잠자코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10여 분 후.
“훌륭합니다.”
김용화는 한숨을 내쉬고, 내가 보는 앞에서 스마트폰 뱅킹으로 50억을 한 방에 이체했다.
일일 이체 한도 같은 것도 없는 계좌인 모양이다.
“확인해 보시죠.”
나는 스마트폰의 뱅킹 앱을 켜서, 갑자기 잔액 5,000,000,000원이 된 계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