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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 6부 : 기사들을 키우다 (4) (36/303)


036. 6부 : 기사들을 키우다 (4)
2022.10.06.


망할, 어째서!

여기서 김태훈과 또 마주친다고?

나는 머리가 띵했다.

다만, 이번엔 나를 미행해온 것은 아니다.

이 시간대에서 우리는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니까.

그냥 우연이라는 것인데.

그렇구나.

김태훈이 나를 미행해오지 않게 되면서, 그 시간에 원래 하려던 일을 한 거다.

어쩌면 김태훈과의 조우는 필수 루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즉, 그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거나.

<스트레스 수치가 10 증가했습니다.>

-현재 수치는 30입니다.

또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다.

김태훈은 웬 여자와 함께였다.

등에는 목검이나 죽도가 들었음직한 가늘고 긴 주머니를 맸다.

여자는 김태훈의 팔에 찰싹 매달리다시피 붙어 있었다.

데이트인가? 이런 데서?

나는 어쩐지 그 여자를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빠, 아는 애들이야?”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 문득 그녀를 어디에서 봤는지 떠올랐다.

재시작 전, 동아리방에서 김태훈 주위에 있던 여자 후배 가운데 하나였다.

김태훈이 유독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

다음 희생자인가?

“아니.”

김태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분명 처음 보는 애들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네? 너네, 나한테 과외라도 받았냐?”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한 조설아는 잠자코 있었고, 차윤성이 냉큼 되받았다.

“그쪽한테 과외받은 적 없고, 우린 그냥 밥 먹고 바람이나 쐬러 온 거예요. 신경 쓰지 마시죠.”

“나 몰라?”

“모른다니까요.”

“흠, 진실을 말하는 표정이네. 여기는 바람 쐬러 오기에는 좀 위험한데.”

답한 김태훈이, 갑자기 나직이 숫자를 셌다.

“일곱에 여덟, 아홉, 열이라. 딱 떨어지기는 한다만……. 좀 무리인가?”

와 씨. 나 지금 소름 돋았다.

저놈, 데리고 있는 여자를 살해하러 온 게 맞나 보다.

현재까지 근린공원 살인마가 해친 사람의 수는 여섯.

동행한 여자를 일곱 번째 희생자라치면.

우리 셋이 차례대로 여덟, 아홉, 열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죽이면 인베이더 핑계를 대기에 딱 좋다.

나는 차윤성과 조설아에게 속삭였다.

“방심하지 마.”

그때, 김태훈이 여자를 팔에서 떼어내더니 등에 메고 있던 주머니에서 목검을 꺼냈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김태훈.

지난 분기에서는 내가 힘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김태훈의 흥미를 돋웠다.

그 결과 그가 대결하자고 나를 미행해왔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나는 방금 처음 본 사람이다. 호승심을 일으킬 어떤 행동도 없었다.

그런데 목검을 꺼내다니.

뒤이어 김태훈은 나를 공격한 게 아니라, 목검으로 동행한 여자의 정수리를 다짜고짜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피가 튀고 여자 후배가 풀썩 쓰러졌다.

“악!”

조설아가 나직이 비명을 질렀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후우.”

숨을 가다듬은 김태훈이 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놀랐지? 내가 설명…….”

뭔가 말하려던 그가, 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여자를 쓰러뜨리자마자 내가 무기 아이템을 소환, 착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발키리의 창>

발할라에서 오딘을 섬기는 여전사, 발키리들이 사용하는 창입니다. 아군의 투지를 북돋웁니다.

-타입 : 창
-기능 : 힘 100 추가, 속도 100 추가, 생명력 200 추가.
-내구도 : 800
-소유주 : 이정우
-가치 : 에픽 등급
-고유 스킬 : 발키리의 빛.

발키리의 의지에 동조하는 이들을 짧은 시간 전사로 만듭니다.

내가 택한 무기는 저번에 사용했던 발키리의 창이다.

마(魔)에 강한 롱기누스의 창 같은 것을 착용하여 단숨에 끝내버릴까도 생각했으나.

그 와중에 차윤성과 조설아의 성장에 생각이 미쳤다.

둘을 전사로 바꿔 김태훈과 싸우게 한다면…….

위험도는 대폭 줄이면서 성장을 앞당길 수 있을 터였다.

김태훈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거 설마, 아이템? 너 뭐냐?”

“닥쳐라. 이 살인마.”

“뭐? 아……. 혹시 저 여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우리마저 죽일 셈이겠지. 빨리 13명을 베어야 하니까.”

내 말을 들은 차윤성과 조설아가 화들짝 놀랐다. 둘은 얼른 내 뒤쪽으로 왔다.

이거, 지난 분기랑 또 비슷한 상황이 됐네.

“너, 그걸 어떻게…….”

잠깐 얼굴이 굳었던 김태훈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얘기하자.”

“무슨…….”

허튼소리 말라고 하려던 순간.

내 귓가에 나직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우야…….”

조설아가 겁먹은 목소리로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모꼴을 이룬 빨간 눈알 수십 개가 어느새 쫙 깔렸다.

세눈박이 늑대들이 몰려온 것이다. 이렇게나?

지금 봐서는 상수동보다 훨씬 더 많다.

나는 김태훈에게 창끝을 향한 채 그를 노려보면서, 곁눈질로 늑대들의 행동을 살폈다.

세눈박이들은 슬금슬금 포위망을 좁혀왔다. 어느새 공터가 침 흘리는 늑대들로 가득 차다시피 했다.

크아앙!

그중 한 마리가 이빨을 드러내고 뛰어올라 조설아에게 달려들었다.

“꺅!”

소스라친 조설아가 양팔로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퍽!

전투 상태에 돌입한 내가, 조설아를 공격한 놈을 찌르기로 단숨에 터뜨려버렸다.

허공에서 다크 스톤 하나만 남아 툭 떨어졌다.

제대로 된 창을 썼기에 ‘스피어 마스터’ 스킬의 위력이 100% 발휘된 데 더해.

창의 옵션으로 내 힘과 속도가 각각 100씩이나 증가한 결과다.

“오호?”

김태훈은 탄성과 함께, 자신을 공격해온 세눈박이 늑대의 미간을 목검으로 내리쳤다.

늑대는 깨갱! 하는 단말마와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저 목검, 보통 물건이 아니군.

“그러니까 이놈들 먼저 처리하고 우리 얘기를 끝내자고. 찬성?”

“……좋아.”

답한 내가 조설아에게 외쳤다.

“조설아, 정신 차리고 일어서!”

우웅!

발키리의 창이 빛을 뿜으며 울었다.

그 빛을 쪼인 차윤성과 조설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투쟁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래, 어디 사냥해 보자.”

내뱉은 차윤성이 조설아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김태훈과 내가 자연스럽게 등을 맞대고, 그 사이에 조설아와 차윤성이 등 돌린 포지션으로 섰다.

네 사람이 각각 한 방향씩을 맡게 된 것이다.

어라.

순간,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충족감 같기도 하고 뭔가 안심되는 기분 같기도 했다.

윤성이와 설아는 그렇다 치고.

희대의 살인마인 김태훈과 등을 맞대고 서 있는데 이런 느낌이라니.

사방이 세눈박이 늑대로 가득 찬 데서 오는 착각이겠지.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니까.

퍽, 퍼억!

우리는 연신 달려드는 세눈박이 늑대를 가볍게 처리했다.

나한테는 애초에 아무런 위협이 안 됐고, 내가 준 아이템에 더해 전사 버프를 받은 윤성이와 설아도 각각 세 마리씩을 쉽게 물리쳤다.

머릿수는 적지만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상당한 선전이다.

소심한 설아마저, 발키리의 빛에 의해 레벨 본연의 힘 이상을 발휘하고 있다.

나는 일부러 직접 죽이지 않고 창으로 한두 곳을 찔러 약하게 만든 다음, 윤성이와 설아에게 은근슬쩍 넘겼다.

그러는 사이 김태훈도 손쉽게 두 마리를 잡았다.

그렇게, 불과 몇 분 만에 세눈박이 늑대 열 마리를 죽인 뒤였다.

“합!”

재빨리 돌아선 김태훈이 기합성과 함께 나를 향해 목검을 찔러 왔다.

이놈, 인베이더를 다 잡자마자 기습이냐!

여기에서 내가 당한다면 그 광경을 목격한 우리 애들의 운명도 불 보듯 뻔한 일.

이 순간 결심했다. SS급이든 미래의 삼황이든 상관없다.

연쇄 살인에다, 방금까지 함께 싸우던 동료도 기습할 인성이라면 재능과 무관하게 살려둘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아직 개화하기 전이라 해치울 수 있을 때 해치워야 한다고.

서두른 탓인지 크게 빗나간 찌르기여서 손쉽게 피해냈다.

그리고 김태훈의 찌르기가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것과 동시에, 발키리의 창으로 그의 복부를 찔렀다.

<‘타고난 행운’ 특성이 작용했습니다.>

-공격이 카운터 판정을 받습니다.
-공격이 치명타 판정을 받습니다.

“큭!”

김태훈은 힘껏 몸을 비틀어 배를 찔리는 것은 피했다. 하지만 창날에 옆구리가 깊숙이 베였다.

퍽!

직후, 내 뒤쪽에서 금속끼리 긁히는 듯한 소리와 뭔가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동시에 마력이 소모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

돌아본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좀 전, 김태훈에게 정수리를 맞아 머리가 깨진 채 쓰러졌던 여대생.

그녀가 목검 끝에 재차 미간을 꿰뚫려 쓰러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형상은 한눈에 보기에도 기괴했다.

검지 끝에는 끝이 뾰족하고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20센티미터 가까이나 자라났고, 입 부분도 짐승의 주둥이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손등과 치마 아래의 다리 등, 드러난 피부에는 비늘이 빼곡하게 돋았다. 이 모습은 마치 -

‘인간형 인베이더?’

나는 즉시 진실의 눈 스킬을 발동하여 여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레벨 30 얼굴 도둑]

-성향 : 혼돈 악
-클래스 : 암살자
-등급 : A
-획득한 칭호 : 도플갱어
-스테이터스
힘 : 60
속도 : 90
지능 : 90
행운 : 4
생명력 : 600
마력 : 900
방어력 : 300

역시, 인간형 인베이더의 한 종류인 ‘얼굴 도둑’이었다.

인간형 인베이더는 인베이더 중에서도 제일 까다롭고 강하다.

특히 이 얼굴 도둑은 잡아먹은 인간 가운데 하나의 모습을 훔쳐, 그 주변인을 해치는 식으로 힘을 키운다.

‘도플갱어’라는 칭호까지 얻은 것을 보니 한두 사람을 잡아먹은 게 아니다.

치명상을 입은 얼굴 도둑은 곧 서서히 흩어져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울퉁불퉁한 다크 스톤 하나와 얼굴 도둑이 걸쳤던 옷가지 그리고 검은색 반지만 남았다.

그때, 처음 보는 현상이 벌어졌다.

다크 스톤에 금이 쩍 가더니 거기서 거무스름한 연기 같은 게 흘러나왔다.

연기 같은 기운은 허공을 잠시 돌다가 김태훈에게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내게는 이 모든 게 다 충격이다.

‘이럴 수가.’

좀 전, 나는 얼굴 도둑에게서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목 뒤가 선뜻해서 손을 가져가 보니 깃 뒷부분이 잘려 나갔다. 얼굴 도둑의 손톱에 베인 것이다.

만약 내게 금강불괴 스킬이 없었다면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김태훈은 내가 아니라, 날 뒤에서 기습한 얼굴 도둑을 공격한 것이다.

“아, 어떡해! 정우야, 이 오빠는 왜 찌른 거야? 이러다 죽겠어!”

죽어가는 김태훈의 옆에서, 조설아가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윤성아, 주위 좀 살펴줘.”

얼어붙어 있던 차윤성이 황급히 답했다.

“어, 어. 그래.”

혹시나 세눈박이 늑대가 더 공격해올지도 모른다.

나는 차윤성에게 경계를 부탁한 뒤, 김태훈의 상태를 살폈다.

안색이 창백하고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 증상이다.

발키리의 창을 피하면서 옆구리 한쪽이 거의 날아갔다. 장기도 성치 못할 것이다.

그가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하는…… 표정이네. 그러니까 다짜고짜…… 찌르면 어쩌냐? X발…….”

조설아가 전화기를 꺼내 들고 황망히 말했다.

“구급차 부를게요!”

“됐어, 늦었어……. 네 친구가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그래도 근린공원 살인마를 잡았으니 다행…….”

점점 꺼져가는 김태훈의 목소리에, 나는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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