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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 6부 : 기사들을 키우다 (16) (48/303)


048. 6부 : 기사들을 키우다 (16)
2022.10.18.


나는 답하기 전에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일진녀들과 얽힌 것도, 여동생 정아가 관련됐기 때문이다.

이제 와 내가 나서서 그녀들을 도와줄 이유가 있나?

잠시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그렇다 - 였다.

이유는, 내게 그럴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능력할 때부터 원래 그랬다.

학창 시절에는 은따를 자초하긴 했지만, 누군가를 괴롭힌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약자라 해서 반드시 정의는 아니다. 갑질하는 장애인도 있고, 자신이 받은 설움을 더 약한 자에게 푸는 이도 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이 먹고서는 일용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캡슐 룸에서 사는 주제에, 노숙자에게 종종 적선했다.

나보다 훨씬 어린 알바생이 교대 시간에 늦어도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했다.

한마디로, 좋게 말하면 베푸는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손해 보는 성격이다.

무능력할 때는 호구 짓이지만 능력이 되면?

자선이지. 선행이고.

나는 상황을 들어본 뒤, 내용에 따라 돕기로 마음먹었다.

일이 다 좋게 풀려서, 뭐랄까 - 공덕을 쌓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파멸 직전에 모면한 거니까.

-나 : 통화 가능?

굳이 물어본 이유는 두 가지다.

누군가의 사칭이 아닌지 확인하려는 게 첫 번째고.

질문 그대로, 통화 가능한 상태인지 알아보려는 게 두 번째다.

영화에 흔히 나오듯, 숨어 있는데 전화벨이나 진동이 울리는 바람에 들키면 안 되잖아.

잠시 후, 박선희에게서 답이 왔다.

-노랑이 : 네

최소한 셋 중에 박선희는 안전한 모양이다.

메신저의 통화 기능으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 박선희가 받았다.

“아, 아,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저…….”

말하던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말해봐.”

“네. 그러니까…….”

이어진 박선희의 말에 따르면, 그 일 이후 셋 다 단단히 마음을 잡았다.

정학 기간에도 같이 공부하며 아르바이트도 했단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세 사람이 일하는 카페에 양아치들이 드나들었다고.

“누군지 알아?”

“신촌파 오빠들이었어요. 전에는 우리가 홍대파하고 일하는 거 아니까 안 건드렸는데……. 아마 끝난 사이인 걸 알았나 봐요.”

그놈의 오빠들은 무슨.

“그래서?”

“그중에 한 사람이 지수 보고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수가 거절했거든요. 제대로 운동 다시 시작해서 집중하고 싶다고요.”

지수는 복서 출신의 키 큰 소녀다. 셋 가운데서는 리더 격이다.

“그랬더니 알바할 때마다 찾아와서 행패 부리는 바람에 결국 그만뒀어요.”

“흠.”

가끔 그런 자들이 있다.

거절당한 자체를 모욕으로 여기는 놈들.

상대의 취향이나 기분,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을 받아줘야 한다고 여기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은 자신을 거절한 상대에게 해코지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소유욕과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집은 알려준 적 없어서, 아르바이트 그만두고 접점을 없애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선희는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셋이 지수네 집으로 가는데, 차를 몰고 와서 지수를 억지로 태워 끌고 갔다고 한다.

“춘옥이는 막으려다가 심하게 맞아서……. 지금 한세대 병원 응급실이에요.”

지수와 춘옥, 선희는 셋 다 운동선수 출신이고, 세 사람이 함께 움직이면 안전하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중 두 사람이 격투기 전문이므로 어지간한 남자도 상대가 안 되니 완전히 틀린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깡패 여럿의 막무가내인 폭력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

“못 했어요. 지수네 집도, 우리 집도 다 알아서…… 신고하면 가족들까지 해친다고…….”

뻔한 협박이기는 한데, 문제는 실제로 행할 가능성이 큰 협박이라는 것.

차원문과 인베이더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치안 약화를 불러왔다.

치안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 상당 부분이 인베이더를 막는 일에 할당된 탓이다.

인구가 대폭 감소한 데다, 사람들이 더욱 위험해진 경찰 일을 꺼리기 시작하여 인원을 확충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한국인들은 북, 남미나 아프리카 등지처럼 갱단이 활개 치고 인구의 절반이 이성을 잃진 않았다.

덕분에 겉으로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으나, 음지에서 온갖 범죄가 판을 쳤다.

일례로, 유토피아 그룹에서 고용한 깡패들이 나를 납치하여 죽이려던 것만 봐도 그렇다.

대기업이 깡패를 부려, 훤한 대낮에 미성년자 납치, 살인을 교사한다?

예전에는 영화나 드라마에 나왔어도 현실성 없다고 욕먹을 내용이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버젓이 일어났다.

“혹시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

“정확하진 않은데 몇 군데 짐작 가는 곳은 있어요.”

“전부 메신저로 보내. 넌 병원에서 꼼짝 말고 춘옥이 보살피고.”

“네……. 저, 감사합니다. 딱히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어서…….”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대답하지 않고 통화를 끝냈다.

곧, 선희가 신촌파의 근거지 세 곳을 메신저로 보내왔다. 끝에는 조심하시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조심이라.

지금의 내 능력과 기분으로는 조심하기가 더 어렵다.

자정이 다 된 시간. 부모님과 정아는 아마 잠들었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이 시간에 내 방을 찾을 일은 거의 없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다음, 투명화 상태에서 블링크 스킬을 반복하여 신촌으로 이동했다.

여긴가.

첫 번째 장소는 폐업한 클럽.

신촌에 있던 클럽들은 홍대 앞 거리의 부흥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 후 2020년부터 유행한 감염병에 치명타를 입고, 이듬해의 차원문 발생이 결정타가 되어 모든 클럽이 폐쇄되었다.

폐쇄된 클럽은 다른 업종으로 변경하기에도 어려워, 빛바랜 간판을 매단 채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클럽 제우스라…….

나는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12레벨이 되면서 모든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호흡을 고르고 주의를 기울이자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이러지 마세요.

-X년, 더럽게 비싸게 구네. 네가 뭔데?

거기에 몇몇 낄낄대는 소리.

한 달 넘게 지나서 확실하진 않으나, 긴장한 여성의 목소리는 지수의 그것이 맞는 듯하다. 첫 번째부터 제대로 찍은 것 같다.

블링크는 눈에 보이는 장소로만 이동할 수 있기에 닫힌 문 너머로는 가지 못한다.

그럼 문을 부숴야지.

싸움을 대비해 두 개의 반지를 낀 다음, 인벤토리에서 기만자의 가면을 소환하여 착용했다.

인상을 흐릿하게 하고 목소리를 변조해주는 위장용 아이템이다.

콰앙!

뒤이어 문을 힘껏 걷어차자 두꺼운 철문이 움푹 들어가면서 날아갔다.

나는 뻥 뚫린 문을 통해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내부는 제법 넓었다. 테이블과 의자가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바닥에는 술병이 잔뜩 널렸다.

안 어울리는 사이키 조명이 실내를 어지러이 비췄다.

“헉!”

“뭐, 뭐야?”

안에 있던 놈들은 기절할 듯 놀랐다. 잠근 철문을 힘으로 부수고 들어왔으니 놀랄 만도 하지.

그나저나 혹시나 하고 차봤는데, 이게 되네.

힘 증가 아이템을 착용했다고는 해도, 12레벨에 벌써 이런 완력이라니. 앞으로가 기대된다.

“아 X발 깜짝아……. 뭐야, 이 코스프레 새끼는?”

“이 쉐키가 뒈질라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나를 본 신촌파 멤버들이 손에 잡히는 대로 흉기를 들고 슬그머니 둘러쌌다.

재미있는 점은, 놈들이 부서진 철문과 나를 연결짓지 못한다는 것이다. 뇌가 있는 놈이라면 누가 그랬는지 빤히 알 텐데.

상대적으로 가녀려 보이는 내 체구에 ‘인간은 철문을 뜯을 수 없다’는 상식이 더해져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지하 클럽에 있던 인원은 모두 일곱.

그중 쇠파이프를 든 게 둘, 깨진 병을 든 자가 둘, 나이프를 꺼내 든 놈이 둘이다.

그 어깨 너머로, 한 놈이 지수를 붙잡고 서 있다.

나는 재빨리 지수의 상태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몹쓸 일을 당하지는 않은 듯하지만 뺨이 붉게 부어오르고 입술에 피가 맺혔다.

그 모습에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를 본 지수는 놀라는 눈치였다가 금세 침착해졌다.

“누구냐고, X벌 가면 놈아!”

한 놈이 욕설을 내뱉으며 내게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나는 굳이 피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못 느껴서다.

쩡! 빠악!

“끄악!”

내 어깨를 친 쇠파이프가 튕겨 나가 놈의 안면을 제대로 후렸다. 쇠파이프를 휘두른 놈이 얼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개그 하나?

“이 새끼가!”

“죽여!”

아니……. 그러니까.

내가 때린 게 아니라고.

나는 가만히 서 있었는데 제 얼굴을 때린 놈이 쓰러지자 모두 흥분했다.

옆에 서 있던 놈이 한 손으로 내 목 뒤를 잡아 누르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로 겨드랑이 부위를 찔렀다.

거기, 급소인데?

진짜 사람을 죽일 셈인가?

동시에, 숙인 자세가 된 내 머리를 다른 놈이 깨진 병으로 내리쳤다.

끼릭! 퍼석!

“어어?”

“이, 이 새끼 뭐야. 칼이 안 박혀. 안에 뭐 입었나?”

금강불괴가 적용 중인 내 신체에는 나이프나 병 따위로는 긁힌 자국 하나 내지 못한다. 겨드랑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래도 사람의 급소를 주저 없이 찔렀다는 자체가 몹시 불쾌하다.

이미 그런 짓을 여러 번 해봤다는 뜻이니까.

그러면 사정 봐줄 필요 없지.

나는 가만히 선 자세 그대로, 양쪽 주먹만 두 방향으로 뻗었다.

빡! 우득!

날 때리고 찌른 두 놈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 놈은 의자 무더기에 처박히고 다른 놈은 벽에 등을 부딪쳤다가 엎어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둘 다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죽이지는 않았다. 몇 군데 부러졌을 거다.

단순한 공격이지만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 지하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군가가 그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설마, 기사……?”

그래, 이 새끼들아.

내가 흑기사다.

쇠파이프로 제 얼굴을 친 놈이 일어나려는 걸 가볍게 차 올렸다.

놈은 천장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떨어져 그대로 기절했다.

이제 넷 남았다.

“에이 X발, 한꺼번에 쳐!”

근처에 있던 세 놈이 각자 든 흉기를 내게 휘두르고 내리쳤으며 찔렀다.

방금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을 보고도 덤벼드는 게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당연히 후자다.

몸으로 튕겨내고 맞받아쳤다. 곧, 놈들도 동료와 같은 신세가 됐다.

몇 군데가 터지거나 부러진 채로 졸도한 것이다.

이제 지수를 붙잡고 있던 놈 하나만 남았는데 -

퍽! 퍼벅!

내가 손쓸 것도 없었다.

얼굴에 한 방, 턱에 한 방.

지수가 그림처럼 깔끔한 원투로 놈을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마지막 남은 신촌파를 때려눕힌 지수가 내게 달려와 와락 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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