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9. 7부 : 내 사람들을 모으다 (1) (49/303)


049. 7부 : 내 사람들을 모으다 (1)
2022.10.19.


아니지, 이걸 안겼다고 해야 하나, 안았다고 해야 하나.

가까이에서 붙고 보니 지수의 키가 나보다 살짝 컸다.

뜻밖의 굴욕…….

“와 주셔서 고마워요. 진짜 무서웠어요…….”

물기 어린 지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하릴없이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키 크고 늘씬하기는 한데…….

36세 연하라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이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때, 또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온몸이 찌릿하면서 힘이 빠진다. 정확하게는 마력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랑 이런 식으로 닿아 있었던 게 처음…… 아니,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거로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

<주의! 총 마력의 30퍼센트가 소모되었습니다.>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창이 진심이다. 지수가 내 마력을 흡수한 것이다.

15레벨이 된 현재, 내 마력 수치는 거의 1,200에 육박했다.

마력 400이면 진실의 눈 스킬을 40번 사용할 수 있는 양. 절대 적지 않다.

그 정도의 양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니.

놀라서 무의식중에 지수를 가볍게 밀쳐냈다.

“아…….”

지수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다.

보아하니 의식하고 마력을 흡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

‘설마, 서번트?’

지수가 서번트 체질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서번트는 기사를 보조하는 파트너다.

기사의 능력을 강화해주거나 치료해주기도 하고, 스스로 공격을 보조하는 등 다양한 타입이 있다.

기사와 서번트의 가장 큰 차이는 마력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앞서 언급했듯, 기사는 이세계의 마력을 흡수해 체내에 축적하고 스스로 정제하여 사용한다.

서번트는 마력을 쓸 수 있으나 정제 능력이 없다. 그렇다 보니 반드시 기사가 필요하다.

서번트는 그런 체질적 특성 때문에, 정제된 마력을 접촉하면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같은 원리로 서번트는 다크 스톤을 만져 마력을 흡수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럴 경우 가성비가 극악이라는 것.

한 번 활동할 때마다 개당 백만 원짜리 수십, 수백 개를 녹이느니 많은 기사가 그냥 자신의 마력을 주고 만다.

기사의 마력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차오르고, 착용한 아이템에 따라 금세 회복하기도 하니까.

잠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 뒤.

지수는 손등으로 살짝 눈물을 훔치면서 웃었다.

“헤헤, 저 구해주러 오신 거 맞죠?”

뭐야.

주먹도 세고 나보다 키도 큰데, 조금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러고 보니 웃는 건 처음 보네.

“그럼 구하러 왔지, 클럽에 춤추러 왔겠냐?”

당혹감을 감추려고 나도 모르게 퉁명스레 대꾸해버렸다.

“오빠, 엄청 세네요. 혹시 진짜 기사예요?”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사람을 막 붕붕 날리던데.”

“일단 나가서 친구들한테 연락이나 해. 많이 걱정하더라.”

“아, 걔들이 연락해서 알고 찾아온 거예요?”

“그래. 안 그러면 장소까지 어떻게 알았겠어?”

“춘옥이는 괜찮아요? 걔가 붙잡고 매달리니까 이놈들이 빠따로 후려쳐서…….”

지수는 새삼 분노가 치민 듯, 쓰러진 놈 하나를 힘껏 걷어찼다.

“지금 응급실에 있다니까 연락해봐.”

응급실이라는 말에 지수의 얼굴이 걱정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네. 저, 죄송한데 폰 좀 빌려주세요. 제 거는 붙잡혀올 때 떨어뜨려서…….”

“여기서 안 터지니까 올라가자.”

나는 지수와 함께 클럽을 나왔다.

그런 뒤 내 정보가 특정되지 않을, 평소 안 쓰는 메신저 화면을 켜서 박선희와의 채팅창을 띄우고 폰을 건넸다.

지수는 곧장 박선희에게 전화해 무사함을 알렸다.

“응, 응. 나 지수. 가면 오빠가 와서 구해줬어. 춘옥이는 좀 어때? 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가면 오빠라니.

아무래도 적당한 별명이나 이름을 알려줘야겠다.

지수는 내게 폰을 돌려주면서 꾸벅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춘옥이는 열 몇 바늘 꿰매기는 했는데 괜찮대요.”

“다행이네.”

어느새 새벽 한 시가 되었다.

지수가 모르고 있는 것 같은 서번트의 재능에 대해 말해줄까 하다가, 너무 늦은 시간이라 다시 만나서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길에 서서 말하기도 그렇고, 들어갈 곳도 마땅치 않다.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얼른 집에 가라.”

“네, 저…….”

뭔가 곤란한 기색이던 지수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 집 말고 그냥 한세대 병원 응급실로 가려는데, 만 원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구해준 사람한테 돈까지 빌리려니 엄청나게 민망한 모양이다.

“나 지갑 안 가져왔는데.”

“아, 죄송합니다. 그냥 걸어갈게요!”

같은 신촌이라지만 이 시간에 여자 혼자 걸어가기에는 좀 멀다.

그렇다고 또 나까지 거기 갔다가 올 수도 없고.

“있어 봐.”

나는 다시 클럽으로 내려가서, 뻗어 있는 놈들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중 한 놈에게서 지갑이 나왔다.

감히 내 겨를 칼로 찌른 놈이다.

안 다쳤지만 정신적 위자료 정도는 챙겨도 되겠지. 거기를 찔려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거든.

대충 현금만 꺼내고, 지갑은 놈의 가슴에 놔둔 다음 올라왔다.

“자.”

그리고 현금을 모두 지수에게 건넸다. 한 5~60만 원 정도 되어 보인다.

“헉, 너무 많아요!”

“내 돈도 아닌데 뭐. 갚을 필요도 없다.”

“그래도…….”

“저놈들이 가게에 찾아와서 행패 부리는 바람에 알바도 관뒀다며. 게다가 납치당하고 맞기까지 했으니 그 보상이라고 생각해.”

“음……. 알겠어요.”

지수는 들어보니 내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돈을 받았다.

“택시는 안 잡아줘도 되지?”

“넵. 폐 끼쳐서 죄송해요.”

“아 참. 그 선희라는 친구 통해서, 시간 될 때 나한테 연락 좀 해라. 너랑 얘기할 게 좀 있으니까.”

“네…….”

그 말을 하는데 어째서인지 지수의 뺨이 또 붉게 상기되었다.

새삼 민망할 상황도 아닌데?

내 마력을 한 방에 30퍼센트나 빨아먹어서 열이 뻗쳐 그런 거겠지.

흉악한 녀석.

난 지수를 보내고, 적당한 곳에서 투명화한 다음 블링크를 써서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없고 피곤한 밤이었다.

* * *

한세대 병원 응급실.

춘옥은 커튼으로 가려진 침대에 누워 나직이 코를 골았다.

그녀는 오른쪽 어깨와 머리에 깁스를 했다.

그 앞에서 지수와 선희가 목소리를 낮춰 대화 중이었다.

응급실답게 커튼 바깥쪽에서는 종종 신음과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희가 숙면하는 춘옥을 내려다보며 다소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런 데서 잘도 자네.”

“그러게. 그래도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야.”

“의사쌤 말이, 잘 맞았대.”

“잘 맞았다고?”

“그러니까, 근육이랑 살이 많은 어깨를 내밀어서 머리를 보호했대. 그런데도 빗장뼈에 금이 갔을 정도이니 진짜로 세게 친 거라고……. 머리에 맞았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거래.”

“미친 새끼들.”

지수가 거칠게 내뱉었다.

“지수 너는 괜찮아?”

“응. 입술이랑 입 안쪽 조금 터진 게 다야.”

그러고 보니 지수는 자신이 묘하게 생생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놈들에게 끌려가면서 저항하느라 녹초가 됐고, 잠 한숨 못 잤는데.

어쩐지, 가면 오빠와 포옹한 후에 기운이 돌아왔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괜시리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놈들은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가면 오빠가 다 조져놨지.”

“휴, 역시 그쪽에 연락해보길 잘했네. 경찰에는 신고해 봐야 너무 늦고, 분명 남녀 사이의 일 정도로 취급할 게 뻔하니까.”

“그렇겠지.”

“미안해. 나 혼자 도망쳐서…….”

지수는 시무룩해진 선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냐. 춘옥이가 막아주는 사이, 네가 잽싸게 도망쳐서 가면 오빠한테 연락해준 덕에 나도 무사한 거야. 잘했어. 둘 다 진짜 고마워.”

“헤헤. 그런데 그 오빠, 진짜 정체가 뭘까?”

“글쎄. 싸우는 거 보면 무조건 기사 같은데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그랬으면 이미 한참 전에 텔레비전이나 잡지에 나왔겠지. 기사인 것만으로도 완전 유명해지고 돈도 엄청나게 벌 텐데. 혹시 신분을 숨기는 이유가 있나?”

선희의 말에, 지수가 답했다.

“어쩌면 곧 정체를 알게 될지도 몰라.”

“응? 어떻게?”

“다시 연락하라고 했어. 나한테 얘기할 게 있다고. 그때 낮 시간에 사람들 많은 데서 만나면, 혹시 가면을 안 쓰고 나오지 않을까?”

“헐, 어떡해. 그 오빠가 지수 너 좋아하나 봐!”

지수는 당황하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으로 되물었다.

“갑자기?”

“그러니까 듣자마자 바로 구해주러 가고, 다음에 보자고도 했지!”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다.

둘 사이에 그 정도의 접점이 없으니까.

그래도 이맘때의 소녀들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아직 믿는다. 특히, 감성적인 박선희는 그런 경향이 강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은근히 착한 거 같아.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복잡한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일 테고.”

얘기하던 지수는, 저도 모르게 그 정체불명의 남자를 끌어안았을 때의 일을 또 떠올렸다.

‘이상하게 몸이 뜨거워지고, 피곤하던 것까지 싹 날아갔지……. 기분이 무지 좋았어. 진짜 그 사람을 안아서 피로가 가신 건가?’

회상하던 그녀는 흠칫 놀랐다.

선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거의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거야?”

“뭐지, 그 표정은?”

“뭐, 뭐가?”

“너, 지금 얼굴 빨개졌어. 설마 진짜?”

“아니라고!”

당황하여 언성을 높인 직후.

“거기 학생들, 조용히 해주세요.”

“네.”

둘은 간호사의 주의를 받고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 * *

현충일이 되었다.

호국영령을 기리는 엄숙한 날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집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하긴 최근에는 계속 그렇다.

수십억의 거금이 생기고 아버지가 위험한 일을 그만두게 됐다.

정아도 괴롭힘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다.

거기에 더 안전한 구역의 새 집으로 이사도 가게 됐으니 분위기 나쁠 일이 없지.

페스탈로찌 선생이,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빛나는 기쁨은 가정의 웃음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그 말이 옳다. 집안 분위기가 좋으니까 며칠 걸러 한 번씩 꾸는 악몽도 대수롭지 않게 되고, 어깨의 짐도 조금은 가볍게 느껴진다.

부모님은 아침 일찍 조기를 게양하자마자 외출하셨다.

이사 갈 집의 인테리어에 쓸 물건을 사기 위해서다.

“늘 여유가 없어서 되는 대로 갖춰놓고 살았는데, 이번에는 내 취향대로 좀 꾸미고 살 수 있겠다.”

들뜬 엄마에게, 아버지는 놀랍게도 잔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인지, 당신의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현상이다.

“고3은 집에서 공부할게요. 어차피 실내 장식 같은 것도 잘 모르고요.”

“그래. 맛있는 거 시켜 먹어라.”

“네.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일 보고 오세요.”

여동생 정아도 내게 용돈을 잔뜩 받고 신나서 놀러 나갔다.

“오빠 짱!”

“용돈 줄 때만 오빠지…….”

“헤헤.”

가족들이 다 나가고 집이 조용해졌다.

거실에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여섯 번째 날’의 노래를 적당한 볼륨으로 틀어놓고 명상을 준비했다.

보통 명상이 아니라 아이템을 사용한 특수한 명상이다.

16661618332086.jpg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