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1. 8부 : 던전을 공략하다 (11) (71/303)


071. 8부 : 던전을 공략하다 (11)
2022.11.10.


나와 김태훈이 나란히 선두에 서고, 바로 뒤를 차윤성과 조설아가 따랐다.

맨 뒤는 정기석과 강은빈 경위가 섰다. 두 명씩 세줄 대형이다.

무르는 내 어깨 위에 여유롭게 올라타 있었다.

강은빈 경위는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으나 동물을 좋아하는 듯했다. 혹은 본인이 집사이거나.

그 증거로, 틈만 나면 시선이 무르에게 향해 있었다.

집중하라고 말할까 하다가, 아직 저격할 일이 없기에 긴장이나 풀라고 놔뒀다.

“여기는 빠르게 통과합시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로비와 1층에는 별 특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2층에 올라서는 순간.

“……뭐야, 이거.”

김태훈의 나직한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뭔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조설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 어디야……?”

새파란 하늘과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드넓은 초록색 대지.

2층에는 너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물리 법칙과 공간을 완전히 무시하는 현상이다.

“잠깐만 대기요.”

나는 시험 삼아 재빨리 스킬을 발동했다. 대상은 파티원 전원.

스킬 발동, 격려!

대상의 사기를 북돋우는 동시에, 모든 정신 계열 상태 이상을 회복시킨다.

‘심지어 마력 소모도 회당 20밖에 안 되지.’

레벨이 오를수록 효율이 높아지는 사기성 스킬이다.

100의 마력이 빠져나가면서 내 눈에만 보이는 백색 빛이 파티원들을 감쌌다.

‘만약 이게 환각 마법이라면 격려 스킬로 파훼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환각이 아닌 실제 풍경이라는 뜻.

게다가 정신 공격을 받았다면 거의 반드시 올라갔어야 할 내 스트레스 반응도 잠잠했다.

아니, 뭔가 일어나긴 했다.

“이거 참,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당황하던 정기석의 뜬금포에 이어.

“여기까지 이미 던전화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뭐, 조금 일찍 진입한다고 생각하죠.”

분명 동공이 지진 일으키는 걸 봤는데 태연자약해진 강은빈.

“와, 여기 예쁘다…….”

“미세먼지도 없네. 후웁.”

거기에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해맑은 우리 애들까지.

……격려 효과로 사기가 과도하게 오른 것 같다.

아무튼,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눈 앞에 펼쳐진 초원은 허상이나 환각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세계다.

누가 2층에 초목을 가져다 심은 것도 아니고 확장 공사를 한 것도 아니다.

살짝 뜨끈하면서 건조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그 바람을 타고 마른풀과 흙냄새까지 느껴진다.

나는 강은빈 경위에게 물었다.

“경위님, 던전 내부는 원래 이런가요?”

“이곳과 똑같은 풍경은 못 봤지만, 보통 이런 식으로 낯선 장소에 오게 되긴 합니다. 다만, 여기는 유난히 넓군요.”

신기하네.

그러고 보니 나는 회귀해 오기 전에도 후에도 던전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세파시 게임에서는 던전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이건 또 다르군.’

스킬의 구성, 시스템, 다크 스톤과 아이템 등.

차원문 발생 이후로 현실에 생겨난 특수한 요소들이 모두 게임과 같기에, 은연중에 던전도 그러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직접 들어와 본 던전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세파시 게임의 던전은, 20여 년 전에 세계적으로 대히트한 ‘디아볼로스 2’라는 게임과 느낌이 비슷하다.

어두컴컴하고 길이 뒤얽힌 미로 같은 느낌이다. 늘 안개가 자욱하며 낮인지 밤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데 남산타워 안에 펼쳐진 이 던전은, 언젠가 TV에서 보고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호주의 드넓은 초원을 닮았다.

이어진 정기석 경위의 말은,

“쉽지 않겠습니다. 규모가 클수록 품은 마력의 양이 많고 던전 보스도 강하니까요.”

내 감상을 곧바로 박살 냈다.

그래서 강은빈 경위가 그렇게 놀랐던 거로군.

김태훈은 어쩐지 아까부터 말이 없다.

“형. 어디 불편해?”

“응.”

전원 최상의 상태로 던전 공략에 임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어디가?”

“마음이.”

“……왜?”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취향에 안 맞아. 던전이라고 하면 좀 더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그래, 마음껏 살육을 저지를 수 있는…….”

걱정한 내가 멍청이지.

그때, 강은빈 경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경고해 왔다.

“인베이더가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고블린 여덟 마리?”

“……그게 보입니까?”

“아, 뭐…….”

나도 모르게 대꾸했다가 답을 얼버무렸다.

사실, 내가 본 게 아니라 무르가 알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병사 여덟이 온다.

‘병사요?’

-아아, 너희한테는 고블린 정도 되려나.

고블린이라면 잘 안다.

세파시 게임에 등장하는 하급 몬스터로, 신장 1미터가 안 되는 늙은 맨발의 난쟁이 모습이다.

각 개체의 전투력은 약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몬스터라기보다 요정 같은 존재여서 도구를 다룰 줄 알며 교활하다.

초보자가 방심했다가는 까딱 당할 수도 있는 상대다.

흠, 그나저나 이 던전에서는 고블린이 병사 취급을 받나 보네.

-크크, 나보다 위계도 낮은 주제에, 어쩌다 통로의 주인이 되었다고 우쭐해서 날 턱 끝으로 부렸겠다. 어디, 다른 차원의 인간들에게 당해 보라지.

무르는 이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낄낄댔다.

“저격해도 되겠습니까?”

강은빈 경위가 내게 물었다.

멋대로 할 수도 있는데, 명색이 내가 지휘자라고 해서 의사를 묻는다. 좋은 사람 같아.

“아, 부탁드릴게요.”

“모두 자세를 낮춰 주십시오.”

정기석 경위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우리도 얼떨결에 그를 따라했다.

강은빈 경위는 즉시 우리가 있던 야트막한 구릉에 엎드리더니, 왼손은 바닥을 짚고 오른손을 옆으로 가볍게 뻗었다.

정확히 오른손 위치에 빛무리가 모여 라이플의 형태로 변했다.

라이플이 완전히 나타나자, 강은빈 경위가 조준경에 눈을 대고 엎드려 쏴 자세를 취했다.

“우와, 총 모양 나이트 기어! 죽인다…….”

차윤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게 강은빈 경위의 나이트 기어.

‘윈체스터 M70, 다크 스톤 버전’인 모양이다.

그런데 드랍 아이템치고는 모양과 이름이 우리 쪽 세계의 것에 가깝다.

심지어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은 개머리판은 아름답긴 하나 상당히 구식으로 보였다.

‘총에 대해 뭘 알아야 말이지. 더구나 라이플형 나이트 기어라니, 미래에서도 들은 적 없다고.’

옆에서 나이트 기어를 유심히 보자, 나무 개머리판 부분에 새긴 문양이 보였다.

‘저건 대한 전자……. 헐. 드랍 아이템이 아니라 제작 아이템이었어?’

퓻!

순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음과 함께 총구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뒤이어, 강은빈 경위가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타깃 하나 섬멸.”

“와!”

조설아가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강은빈 경위는 이후에도 고블린 세 마리를 더 죽였다.

저격을 눈치챈 고블린들이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게 됐다.

총 여섯 발 발사해서 네 마리 사살. 적중률은 66.6%로 살짝 떨어지지만.

그래도 접근전이 시작되기 전에 적을 반이나 제거한 것은 상당한 전과다.

역시, 강은빈 경위를 우리 멤버로 영입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다.

강은빈 경위는 벌떡 일어서서, 라이플 총구 아래쪽에 대검을 부착했다. 저게 근거리 모드인 모양이다.

대검도 보통 검이 아니라 아이템인 듯하다.

평범한 검으로는 인베이더를 찌르거나 벨 수 없으니까.

“자, 그럼…….”

나이트 기어 소환!

차윤성은 ‘광전사의 검’을, 조설아는 ‘세계수의 가지’를 불러냈다.

나도 나이트 기어인 척하면서 전격창 궁니르를 소환해 들었다.

다행히 더 등급이 높은 강은빈은 궁니르를 찬탄 어린 눈초리로 볼 뿐,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다.

역시 기사라 해도 아이템과 나이트 기어를 구분하지 못한다.

김태훈은 목검처럼 보이지만 그 정체는 마신 할파스의 무구인 소울 블레이드를 겨눴다.

그리고 정기석은 진실의 눈으로 본 대로 브론즈 스패너를…….

아니, 저거 엄청 크잖아!

무슨 스패너가 자기 키만 해?

“정기석 경위님, 그걸로 어쩌시려고요?”

정기석은 내 물음에 당당히 답했다.

“그야 후려쳐야죠!”

“후려친다…….”

“내리찍어도 되고! 저는 투사 클래스니까 말입니다.”

아니야.

당신, 그거 아니라고.

메카를 만들어내거나 수리해야 할 스패너를 둔기처럼 쓰고 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알려줘야 하나.

그사이 고블린들이 가까워져 설명은 나중으로 미뤘다.

우선, 시야 범위에 들어왔으므로 진실의 눈으로 고블린을 확인했다.

[레벨 20 고블린]

-성향 : 혼돈 악
-직업 : 도둑
-등급 : D
-획득한 칭호 : 노련한 병사
-스테이터스
힘 : 60
속도 : 80
지능 : 100
행운 : 3
생명력 : 600
마력 : 1000
지구력 : 280

-스킬
단검 찌르기
독 바르기
슬링 샷
단검 투척
은신

등급은 낮지만 레벨이 제법 높다.

스킬도 다섯 개나 되고.

스킬이 많을수록 패턴도 많아지므로 까다로워진다.

무엇보다, 노련한 병사라는 칭호가 마음에 걸린다. 고블린 주제에 전투 경험이 많다는 의미다.

세파시의 몬스터 중에도 이런 놈들이 있다.

겉보기에는 같은 종의 보통 몬스터와 똑같은데, 경험을 쌓아 더 강한 개체.

베테랑이라 불리는 놈들이다.

“고블린이라고 방심하지 마세요.”

내 말에 파티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 고블린이 슬링 샷 스킬을 발동합니다.>

사정거리 범위에 들어왔는지, 이런 경고 메시지가 떴다.

원거리라기보다는 중거리에 가깝다. 빤히 보이는 데서 쏘기는 하는데 우리 무기는 닿지 않는 거리.

‘저걸로 선제공격의 이점을 가져가는 건가.’

대형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고블린치고는 나쁘지 않은 전술이다.

하지만 문제는,

“위험합니다. 이정우 기사!”

내게 안 통한다는 것이지.

깜짝 놀라는 강은빈 경위의 목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팅! 티잉!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 고블린의 슬링 샷을 모두 몸으로 튕겨냈다.

금강불괴 스킬 때문에, 별거 아닌 공격에도 매번 마력이 10씩 깎여 나간다.

모든 자원을 비축하는 습성이 있는 나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뭐, 대신 메테오 같은 공격에도 똑같이 10의 마력밖에 소모되지 않으니까.

레벨 30이 된 지금은 원천 마력만 2400에 달해 여유롭기도 하고.

“끽, 아이욱!”

슬링 샷이 튕겨나자 고블린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선 제압 좋아, 정우.”

김태훈이 바람처럼 내 곁을 스치고 달려 나갔다.

“저 친구, 기사가 아닌데……. 괜찮겠습니까?”

나는 우려하는 정기석 경위에게 답했다.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할지도 몰라요. 저 사이코패스는요.”

“……친구 아닙니까?”

“아닌데요.”

촥! 촤악!

그사이 고블린 무리 가운데 뛰어든 김태훈은,

“크하하, 죽어라! 못생긴 난쟁이들아! 쓸모없는 저급한 생물들아!”

인종차별…… 아니, 종 차별 언사를 남발하면서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고 쑤셨다.

아주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다. 고블린의 초록색 혈액이 비처럼 흩뿌려진다.

소울 블레이드는 살육을 거듭할수록 강해지는 성장형 아이템이다.

그 절삭력은, 이제 목검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차윤성은 심드렁하게, 조설아는 세계수의 가지를 착용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번에는 김태훈의 기여도를 높여 레벨을 올리자고 미리 말해두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구경만 했다.

김태훈이 고블린 네 마리를 해치우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더 강해졌네, 저 괴물 녀석.

역시 미래의 특급 기사인가.

정기석 경위가 멍하니 말했다.

“정말 강하네요…….”

16680638425561.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