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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77화 (77/303)

8부 : 던전을 공략하다 (17)

처음에는 높은 방어력에 타고난 힘과 순발력을 가진 오거들이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그 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거들이 발악해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각성한 S급 기사 둘이 붙어 있고, 그중 하나는 귀한 힐러다.

아직 각성하지 못한 파티원조차 재능은 특급이다.

거기에 등급은 낮지만 극히 희귀한 엔지니어 클래스의 기사가, 최고급 재료를 받아 스킬을 발동했다.

B등급이지만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고, 점차 자신의 재능에 눈떠 가는 저격수가 엄호한다.

결정적으로, 탱커 역할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

‘내가 있지.’

내 자랑 같아서 좀 민망한데 사실은 사실이다.

내가 있기에 다른 파티원들이 오거를 공격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이 우세의 핵심은 나다.

나는 오거의 위력적인 공격을 몸으로 커버해버리고도 멀쩡하다.

물리적으로 밀려나거나 날아가기는 하지만 곧 태연히 달려든다.

‘이 짓도 계속하니까 이골이 나네.’

처음에는 맞았다가 어딘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금강불괴 스킬의 존재와 성능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만큼 오거의 공격은 살벌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은 마력을 계산해가면서 기술적으로 맞게 됐다.

맞을 때마다 마력이 조금씩 소모되기는 하나, 그것보다 채워지는 속도가 빠르다.

‘미쳤네. 금강불괴 스킬과 멀린의 반지 6개 조합이면 거의 불사신이겠는데?’

오거들이 쉬지 않고 200대 정도 연속으로 때리면 날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가만히 맞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

막말로, 이거 위험하다 싶으면 블링크로 달아난 다음, 마력이 좀 차오를 때까지 힐링 포션이나 홀짝거리며 버티면 된다.

일격으로 나를 쳐 죽이지 않는 한은 죽이기 불가능한데, 남은 마력량이 10 이하인 상태가 아니면 일격에 죽일 수도 없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오거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원숭이 같은 조그마한 생물이 가로막는데, 아무리 치고 차고 때려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그사이 먼 곳에서 부패 탄환이 날아오고, 조설아는 끊임없이 발목 인대를 노린다.

차윤성은 검으로 오거를 베는 동시에, 동료가 찰과상이라도 입을라치면 곧바로 치료해버린다.

부상에서 회복한 김태훈이 가세하자 파티의 공격은 한층 거세졌다. 다소 부족했던 딜량이 채워졌기 때문.

오거의 울화가 점차 두려움으로 변해가는 게 감지되었다.

저거 쫄았네, 쫄았어.

늑대 무리에게 사냥당하는 곰 같다고나 할까.

일어서서 포효하기는 하는데, 그 행동 자체가 겁먹어서 그런다는 게 느껴진다.

그러는 사이 오거는 단 두 마리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그중 하나는 양쪽 다리를 당해 일어서지 못하는 놈이다.

게다가 수가 줄어들면서 자연히 상급 포효의 효과도 약해졌다.

버프 스킬을 건 개체가 소멸하면 스킬 효과도 사라지는 초월 규칙 때문이다. 두 오거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스텟이 160%로 뻥튀기된 놈도 잡았는데 40% 정도야.

“됐어, 끝장낸다!”

차윤성이 마지막 건재한 개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쟤 왜 저래?’

나는 아차 싶었다. 40%라고는 해도, 엄연히 평소의 오거보다 1.5배 가까이 강하다는 뜻이다.

윤성의 눈이 아직 벌겋게 충혈되어 있고, 몸 주변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어른거린다.

아직 광란 상태가 유지되고 있어 자제심을 잃은 것이다.

잠깐.

스킬이긴 하지만, 광란도 일종의 상태 이상이지?

상태 이상이라고 다 나쁜 효과만 있는 건 아니다. 광란도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고.

자신을 정신적 상태 이상에 빠뜨려 전투력을 끌어내는 스킬.

그렇다면 나의 격려 스킬로 강제 해제할 수 있다.

나는 막 차윤성에게 격려를 발동하려다 멈칫했다.

윤성은 이미 오거 근처의 바위 언덕을 박차고 뛰어올라, 광전사의 검으로 놈의 목 측면을 베어가고 있었다.

지금 광란을 풀어버렸다가는 속도와 스텟이 일시에 떨어져,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다.

촤악!

윤성의 검은 오거의 목을 제대로 베어 깊은 상처를 냈다.

확실히 아이템 중에서도 나이트 기어라 위력이 다르다.

그 모습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뭐. 먹혔으니까 됐나.’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카아아아아!

목을 베인 오거가 이제까지와는 소리도, 분위기도 다른 괴성을 질렀다.

놈의 몸이 벌크업한 듯 부풀어 오르고 양 눈에서 초록색 핏줄기까지 흘렸다.

그러자 주저앉아 있던 놈까지 벌떡 일어서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일행이 당황하면서 파티 전열이 순간적으로 무너졌다.

순간, 아까 진실의 눈으로 봤던 오거의 스킬이 떠올랐다. 나는 즉시 목청 높여 외쳤다.

“오거들이 광전사 모드로 들어갔다. 피해!”

세파시 게임에서 광전사 모드는 몬스터가 죽음의 위기를 자각했을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 기술이다.

따라서 장시간 유지하기 어려우며 스킬이 끝나면 죽기도 한다.

문제는, 발동 중에는 거의 몇 배나 강해진다는 것이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동귀어진의 공격을 해대는 까닭에, 까딱했다가는 당하기에 십상이다.

역시나, 목을 베인 오거는 출혈을 무시하고 막 착지한 윤성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목의 길게 베인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가 더 거세졌다.

자신이 과다 출혈로 죽더라도 상대를 죽이겠다는 원한이 눈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공격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윤성이 미처 대응할 틈이 없었다.

“왁!”

차윤성도 위험을 깨달았는지, 광란 상태에서도 당혹성을 내뱉었다.

이런, 힐러이자 딜러이기도 한 차윤성이 다치면 곤란해지는데!

‘블링 -.’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블링크로 강제 개입하려 할 때.

쩡!

누군가 한발 앞서 윤성을 밀어내고 오거의 주먹을 받았다.

“!”

거대한 청동색 스패너를 머리 위로 쳐들고, 앙다문 입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

다름 아닌 정기석 경위다.

헉! 수경총에서 보급한 그 허접한 방어구를 입고, 스텟 뻥튀기 된 오거의 공격을 받아냈다고?

아니나 다를까.

“크악!”

정기석이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허물어졌다.

양쪽 다리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뒤틀리고 허리도 이상하게 꺾였다.

나는 서둘러 정기석에게 달려가며 인벤토리에서 힐링 포션을 여러 개 소환했다.

“마셔요!”

포션 하나를 그에게 던져주고 나머지는 급한 대로 몸에 퍼부었다.

다행히, 재빨리 정신 차린 차윤성이 정기석을 부축해 이동했다.

“미안.”

“그 얘기는 나중에.”

쾅!

정기석과 차윤성이 빠진 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오거의 발이 떨어져 내렸다. 땅이 움푹 파이며 놈의 발이 발목까지 파묻혔다.

저거, 조금만 늦었으면 윤성이는 물론이고 정기석 경위까지 납작포가 됐겠구만.

그때, 조설아가 오거의 무릎에 매달려 관절을 돌려버렸다.

“에잇!”

우두둑!

“잘했어, 설아야.”

놈이 주춤하는 사이, 내가 뒤틀린 무릎을 밟고 뛰어올랐다.

뒤이어 신창 롱기누스를 길고 깊게 베인 목에다 재차 찔러 넣었다.

회복 불가, 대상과 같은 레벨의 출혈 발동 옵션!

이것으로 출혈이 더욱 악화하며 오거의 재생력은 무효화된다.

촤아아악!

가뜩이나 출혈이 심하던 목에서 피가 숫제 콸콸 흘러나왔다.

제아무리 광전사 모드이던 오거도 비틀거리다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쿵!

“자, 김태훈!”

나는 뒤로 빠지며 외쳤다.

이 정도면 떠먹여 주는 수준이다.

“크크, 땡큐.”

내 의도를 알아차린 김태훈이, 소울 블레이드를 오거의 목 상처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잠시 발악하던 오거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놈이 고개를 푹 떨어뜨리더니 점차 사체가 사라졌다.

곧, 김태훈의 머리 위에 이제 익숙한 내용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물론, 저걸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주의! 각성 전 최고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추가 경험치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필드 보스를 잡으면 높은 확률로 전용 무기가 드랍되며 스킬이 개방됩니다.

-필드 보스는 반드시 직접 쓰러뜨려야 합니다.

됐다!

기여도를 몰아줘서 김태훈을 30레벨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발목이 나갔다가 일어선 놈은, 다행히 강은빈 경위가 잘 견제해주고 있었다.

8마리도 감당했는데 하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방금, 저놈까지 한꺼번에 공격해왔다면 이렇게 잘 처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는 정기석의 옆에 차윤성이 있다.

휴, 다행이군.

몸을 날려서 윤성이를 지켜준 정기석 경위도 그렇고, 우리가 하나를 상대하는 사이에 상황을 바로 캐치하고 다른 놈을 저격해주던 강은빈 경위도 그렇고.

‘둘 다 탐난다.’

나는 벙긋 웃는 정기석을 보며 생각했다.

등급을 떠나 의리와 센스가 있다.

이 정도면 영입해서 키워볼 만하다는 확신이 든다.

‘아직은 내가 고등학생이니까 인연을 강하게 맺어두는 정도로 하자. 졸업해서 회사 차리면 곧장 넘어올 만큼.’

이제 김태훈이 기사로 각성만 하면 그의 육성 퀘스트 1단계도 해결이다.

생각하던 나는 쌔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여기는 던전 내부잖아?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가려면 던전 보스를 쓰러뜨려야 한다.

경험상, 기사 각성을 위한 필드 보스는 욕 나오게 강했다.

그 강함의 정도는 파티원의 수와 수준에 따라 조정됐고.

그런데 지금은?

‘나, 윤성이, 설아, 김태훈에다가 경위 둘까지……. 이제까지 중에 최고 전력이잖아!’

가뜩이나 필드 보스가 무지막지할 각인데, 그게 던전 보스이기까지 하다면?

설아 때 겪은 고릴라 왕 따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놈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김태훈을 멈추게 해야겠네. 나머지 인원으로 던전을 마저 클리어하고, 돌아가서 정비한 다음 김태훈과 둘이서 각성을…….’

생각을 정리한 내가 김태훈을 부른 순간.

“태훈 형!”

“어, 걱정마. 이놈도 내가 처리했다.”

그가 나머지 한 마리를 쓰러뜨려 버렸다.

“……뭐야, 이렇게 빨리?”

강은빈의 저격이 너무 정확했던 게 이번에는 오히려 화근이 됐다.

이미 죽기 직전이던 놈을, 기세등등한 김태훈이 공격했고.

그에게 기여도를 몰아 주기로 약속했던 조설아는 말리지 않았다.

곧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주의! 필드 보스가 등장합니다.>

“아니……. 시발. 이렇게 바로 나온다고?”

보통, 30레벨이 된 후에도 일정 구역에서 인베이더를 무수히 잡아야 필드 보스가 나왔다.

세눈박이 늑대도, 팔매질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거 딱 한 마리를 잡았을 뿐인데 필드 보스가 소환되다니?

‘강함의 정도 차이인가?’

앞선 인베이더들은 잘해야 C등급. 반면, 오거는 A등급이다.

한마디로, 필드 보스를 불러내는 데 필요한 게이지가 오거 하나로 다 차버린 거다.

‘이건 계산 밖이다.’

어느새 내 어깨에 다시 자리 잡은 무르가 웃어댔다.

-크하하! 혹시나 했는데 진짜 저놈을 불러냈구나. 칭찬해주마. 저놈이 던전의 주인이 되고 나서는 나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한 터라, 뒷감당은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팟!

이전과는 달리 필드 보스는 공간을 찢고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순간 이동하듯 우리 앞으로 소환되었다.

아마, 이미 같은 던전 안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던전 중심부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놈을 본 파티원들이 일시에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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