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 던전을 공략하다 (18)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필드 보스의 체구는 생각보다 작았다.
물론, 키는 보통 오거보다 훨씬 컸기에 3미터는 족히 될 듯했다.
어디까지나 이전에 맞닥뜨렸던 펜릴이나 고릴라 왕과 비교했을 때 작다는 의미다.
한데 묘하게도, 그 작은 덩치가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힘이 단단하게 응축됐다는 느낌.
앞선 두 보스보다 훨씬 작은데도 던전의 주인이자 필드 보스가 되었으니 얼마나 강한 걸까?
당당한 체구에, 양쪽 관자놀이 부위에 긴 뿔이 돋은 모양의 투구와 몸통을 가리는 판갑까지 착용했다.
반사적으로 진실의 눈을 통해 필드 보스의 정보를 확인했다.
[레벨 80 드라구노프]
-성향 : 혼돈 중립
-직업 : 오거 로드
-등급 : 마백작
-획득한 칭호 : 히어로
-스테이터스
출력 : 4,200,000 ADE
힘 : 800
속도 : 720
지능 : 640
행운 : 5
생명력 : 8000(+5000)
마력 : 6400(+3000)
지구력 : 3040(+2000)
-스킬
히어로의 분노
히어로 펀치
히어로 킥
히어로 러쉬
히어로 빔
……능력치 계수 미쳤네.
게다가, 종족 명에 더해 고유 이름을 가졌다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세파시 게임에서의 히어로는 몬스터 천만 마리 중에 하나 나타나는, 극히 희귀한 개체다.
게임이었다면 쾌재를 불렀으리라.
진명이 있는 A등급 몬스터의 히어로를 잡는다면, 최소 레전더리 등급 이상의 아이템 드랍이 확정이었으니까.
문제는 지금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다.
히어로의 칭호를 얻은 오거 로드를 보고 모두 굳은 사이.
우리를 둘러본 오거 로드, 드라구노프가 사념을 통해 말했다.
-내 부하들, 죽였나. 네놈들이.
“……!”
조금 어설프기는 해도, 뚜렷한 의지와 이성을 가진 존재.
이는 내게 묘한 느낌이 들게 했다. 단순한 인베이더를 상대할 때와는 뭔가 달랐다.
-하면, 네놈들도 보상해야 한다. 죽음으로.
그 직후였다.
쾅!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저만치 뒤쪽에서 육중한 굉음이 울렸다.
“……어?”
뒤를 돌아본 정기석 경위가 신음 같은 소리를 멍하니 흘렸다.
“으, 은빈……아?”
나는 정기석 경위보다 한발 앞서, 보고 말았다.
강은빈 경위가 있던 자리에 드라구노프가 나타나고, 곧 피보라가 뿜어지는 광경을.
강은빈 경위가 놈의 주먹 한 방에 고깃덩어리와 핏물이 되는, 처참한 모습을 본 것이다.
정기석 경위보다 내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이 좀 더 빨라서다.
그저 그뿐, 어떤 대응도 못했다.
속도 자체는 어찌 따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블링크와 아이템을 잘 사용하면…….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릴 때, 드라구노프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
“으아아악!”
뒤늦게, 정기석 경위가 절규했다.
강은빈 경위의 처참한 죽음에 분노하거나,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고 안타까워할 틈도 없이.
“……토르의 체인 메일, 토르의 투구, 토르의 질주하는 군화…….”
나는 주문이라도 외듯 정신없이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꺼내, 김태훈과 차윤성, 조설아, 정기석에게 날려 보내기에 바빴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콰직!
내가 아이템을 소환해 날리는 속도보다 드라구노프가 빨랐다.
오싹한 소리에 이어, 놈이 뜯어낸 정기석 경위의 머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런 다음에야 그의 몸뚱이가 털썩 쓰러졌다.
강은빈 경위가 사망하자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와, 우리에게 날아오던 정기석 경위의 머신 핵.
‘짐’이 파삭 흩어져 사라졌다.
엔지니어의 죽음으로 인해 머신 핵도 소멸한 것이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 두 사람이 죽었다.
‘제기랄……. 젠장!’
이것이 마백작의 힘인가.
분노하거나 슬퍼할 틈조차 없다.
물론, 내게는 리스타트라는 사기적 특성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 믿고 함부로 나대기에도 어렵다.
한 시점에서의 리스타트 기회는 단 한 번일 뿐만 아니라, 정확히 어느 시점으로 회귀할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만약 리스타트할 거라고 믿고 차윤성, 김태훈, 조설아를 오거 로드와 붙였다가, 세 사람 모두 당해버렸는데 정작 회귀는 일어나지 않는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때, 오거 로드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기이한 능력, 가졌다, 인간.
“…….”
퍽!
정신 차렸을 때는 나뒹굴고 있었다. 무르는 저만치 피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블링크를 시전하며 남은 세 사람에게 외쳤다.
“다들 공격하지 말고…….”
-역시 기이한 능력이다. 내 힘, 안 먹힌다.
퍽!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나는 또 드라구노프에게 맞아서 날아갔다.
회귀 이후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맛보았다.
어쩌면 무르무르와 맞닥뜨렸을 때보다 더한 두려움이었다.
‘이래서 무르가 이 던전의 주인이 아니라는 거였군.’
그런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놈이 내게 정신이 팔려 김태훈과 차윤성, 조설아를 내버려둔 것이다.
내 기분을 눈치챈 듯, 경악과 좌절, 두려움에 찬 세 사람의 눈길이 느껴졌다.
후다닥 다가온 무르가 말을 건네왔다. 무르 또한 평소처럼 유들유들한 어조가 아니다.
-저놈, 어째서인지 나보다…… 던전의 주인일 때보다 강해졌구나.
무르의 말투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이유는 짐작이 간다.
아마, 드라구노프가 필드 보스 버프까지 받은 까닭이겠지.
거기에 더해 -
-이제, 다섯. 남았다.
분명하게 무르까지 목표에 포함한, 드라구노프의 살의 때문일 터.
‘무르……. 쟤랑 사이 안 좋아요?’
-안 좋다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제깟 놈이 감히, 나를 사냥 대상에 넣어? 크우우……. 내가 본모습이기만 했어도! 지금이라도 계약 해지하는 게 어떠냐?
그건 늑대 내쫓으려다 범을 불러들이는 격이 아닐까.
그래도 정신없던 와중, 덕분에 하나가 떠올랐다.
마신 소환!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맞기만 하다가 당하거나, 드라구노프가 목표를 애들로 바꾸면 속수무책이다.
그럴 거면 가능한 수단은 다 써 봐야지.
-너, 무슨 짓을…….
무르가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드라구노프가 소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은 어째서인지 나를 때려죽이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러자 내가 불러낸 뭔가를 선제공격하려는 것이다.
‘제발, 인간한테 우호적이면서 강한 마신 나와라. 제발!’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
기괴하기 짝이 없는 무언가였다.
겉보기에는 이글거리는 불덩어리 표면에 수많은 눈알이 박힌 것처럼 생겼다.
언뜻 보면 태양의 축소판 같기도 했다. 하나 저것도 분명 본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분명 나의 스킬로 불러냈음에도 어떤 의지도, 생각도 전해지지 않는다.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뜨거워!’
그 무언가가 무시무시한 고열을 내뿜는다는 사실이다.
망막이 타들어 갈 것 같다. 이미 얼굴과 몸의 피부는 지글거리며 타기 시작했다.
의문의 존재가 위치한 대지마저 달고나처럼 끓으면서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다.
이런, 이런 마신이 있었나?
아니, 세파시 게임 속의 72마신 가운데는 이런 존재는 없었다.
‘서리 여왕의 망토!’
화염 내성이 가장 높은 아이템을 겨우 떠올려 착용했다.
그러나 레전더리 등급인 서리 여왕의 망토마저 무시무시한 열기를 완전히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이런 미친……. 저거 대체 뭔데?’
나는 필사적으로, 내가 불러낸 것의 정체를 진실의 눈으로 확인했다.
[레벨 150 크투가]
-성향 : 혼돈 중립
-클래스 : 엘리멘탈
-등급 : 마왕
-칭호 : 홍련의 왕
-스테이터스
출력 : ???
힘 : ???
속도 : ???
지능 : ???
행운 : ???
생명력 : ???
마력 : ???
지구력 : ???
-스킬
??? ??? ??? ??? ???
??? ??? ??? ??? ???
마왕? 마왕이라고?
마왕은 세파시의 스테이지 최종 보스급이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소환된 것도 이상하지만, 게임 안에서도 저 정도로 속수무책인 보스는 없었다.
‘크투가’라는 이름 또한 처음 들어봤다.
제일 먼저 당한 것은, 역시 제일 가까이에 있던 오거 로드 드라구노프였다.
“크어어……!”
놈은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열기에 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열기 앞에 무력할 뿐이었다.
주먹을 내뻗었지만, 크투가에게 닿기도 전에 끝부분부터 증발하듯 타버렸다.
한도 이상의 냉기뿐만 아니라 열기도 대상을 무력화할 수 있구나.
급기야 오거 로드는 엄청난 열에 녹은 갑옷이 몸뚱이와 하나가 되어, 눌어붙다 못해 횃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본 순간 직감했다.
저 크투가라는 존재를 이기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공간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여울처럼 소용돌이치더니 구멍이 생겨났다.
던전 보스인 드라구노프가 소멸한 까닭에 출구가 만들어진 거다.
무르가 힘겹게 말했다.
-헉, 헉. 무지막지한 열기로군. 어서 나를 데리고 저 출구로 빠져나가라.
내게는 무르보다 먼저 챙겨야 할 사람들이 있다.
내가 돌아서자 무르가 발악했다.
-헛짓 말고 나와 너나 나가자고! 저 미친 열기 탓에 출구마저 붕괴하기 직전이란 말이다!
“얘들아! 튀…….”
차윤성과 조설아에게 시선을 돌린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전신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도, 무르의 성화에도 무감각해졌다.
내 눈길이 닿는 곳에는, 전신이 새까맣게 타버리다시피 하여 쓰러진 두 친구와.
“……하하, 미친. 저게 뭐야…….”
두 사람을 온몸으로 덮어 가리려고 애쓰면서, 일그러진 웃음을 짓는 김태훈이 있었다.
어찌 보면 김태훈은 이 사태를 촉발한 장본인이다.
그가 최후의 오거를 죽여버리는 바람에 각성 퀘스트가 발동하여 오거 로드가 나타났고.
그 오거 로드를 막으려고 내가 마신 소환 스킬을 썼다가, 크투가라는 불덩어리를 불러내 버렸으니까.
하지만 자신도 숯덩이가 되다시피 한 주제에 애들을 보호하려는 김태훈을 보자, 원망하기 어려웠다.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내 탓이다.
무모했던 던전 진입.
섬세하지 못했던 작전.
마지막에는 김태훈의 성급한 행동까지 예측했어야 했다.
그가 기사 각성에 목말라 있고 제멋대로인 성향임을 알면서,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화르륵!
결국, 열기를 못 이긴 김태훈의 몸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그가 힘겹게 말했다.
“미안……. 애들 못 살려서. 그래도…….”
“태훈 형…….”
“나 너무, 싫어하지 마라…….”
“!”
그 말을 끝으로, 김태훈은 본격적으로 연소해버렸다.
“아…….”
나는 또 실패했다.
가슴이 찢길 것처럼 아프다.
기다렸다는 듯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이미 경험한 엔딩, ‘파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미래의 세 기사를 잃은 당신은 대폭주를 막아내는 데 실패하고, 결과적으로 가까운 훗날 세계의 종말을 불러오게 됩니다.
이제 던전은 전체가 거대한 오븐처럼 변했다.
무르가 죽어라고 악을 써댔다.
-뭐 하는 거야, 미친놈아! 나까지 타죽는다고!
<칭호, ‘리스타트 마스터’가 발동했습니다.> -칭호의 권능으로, 본 이벤트에서 1회에 한해 분기점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이동한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어느 시점일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어린 두 친구와 김태훈이 죽은 세상보다는 낫겠지.
팟!
시야가 바뀌고, 나는 또 한 번 과거로 이동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