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 던전을 공략하다 (21)
우둑! 우드득!
두 명의 조설아가, 덩치가 유난히 큰 임프 하나의 팔과 다리를 각각 꺾고 있다.
또 다른 조설아는 임프의 목을 조르고 있고.
“헐…….”
내가 헛바람을 내뿜는 순간, 네 번째 조설아가 호쾌하게 업어치기를 했다.
쿠아앙!
굉음과 함께, 임프의 몸이 허리까지 거꾸로 땅에 파묻혔다.
‘분신이구나!’
조설아의 나이트 기어 ‘세계수의 가지’에 부여된 고유 스킬.
하루에 한 번, 상급 분신 발동이 가능하다.
상급 분신은 본체의 80% 능력을 가진 분신 셋을 소환한다.
그럼 저 둘과 목 조르는 하나가 분신이겠네. 상대적으로 작은 힘으로 임프를 처리하고 있으니.
방금 업어치기로 임프의 상체를 묻어버린 게 설아의 본체고.
“앗, 정우야!”
아니나 다를까, 업어치기 한 조설아가 몸을 일으키더니 날 보고 반색했다.
“응, 잘하고 있고만. 분신 대박인데?”
“헤헤, 다 네 덕이지. 얘들이 세눈박이보다 훨씬 센 것 같은데, 네가 준 아이템 착용해서 상대하기가 수월해.”
그럴 것이다. 보아하니 분신에게 적용되는 능력치는 아이템에 의한 증가분까지 포함하는 듯하니까.
그게 아니면 설아의 80% 능력인 분신들이, 일반 임프보다 더 강해 보이는 개체들을 거뜬히 상대하기 어렵거든.
정기석 경위와 강은빈 경위는 설아의 전투 모습에 경탄했다.
“이런 스킬이 있다니…….”
“대단합니다!”
곧, 두 사람에 더해 건 도그까지 참전하여, 겨우 버티던 임프들은 모두 소멸했다.
나는 다크 스톤과 드랍 아이템을 챙기면서 설아에게 물었다.
“윤성이는 나무 위에 있나?”
“응.”
근처에 왔는데 윤성이가 안 보였을 때부터 짐작했다. 나무 위로 올라가 류경재를 치료하고 있겠지.
나무는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바오밥나무처럼 생겼다. 높이는 오히려 더 높은 것 같다.
저 정도 되니까 류경재 경위가 위에서 버틸 수 있었으리라.
아무리 인베이더라 해도, 비행형이 아닌 이상 쉽게 올라가기 힘든 높이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당연히 무사하지 못하고.
‘류경재 기사의 상태는 어떠려나.’
던전 바깥과 내부는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고 한다.
밖에서는 류경재 실종 이후 흐른 시간이 골든 타임 - 그러니까 24시간 남짓 되었지만, 이 안에서는 홀로 얼마나 버텼는지 모른다.
며칠, 몇 주일.
어쩌면 몇 달이 지났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안에 들어와서 대충 6시간 정도 지났나…….’
그때, 위에서 차윤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간다. 비켜!”
잠시 후.
휘익, 쿵!
차윤성이 누군가를 업은 채 거목에서 뛰어내려 착지했다.
저 무식한 놈. 사람을 업고 저기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다니!
“크윽!”
아니나 다를까, 갑갑한 신음을 흘리는 모양새가 다리를 다친 게 분명했다.
“야, 인마!”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윤성이의 두 다리가 이상하게 비틀려 있다.
“괘, 괜찮으십니까?”
업혀 있던 강인한 인상의 사내가 황망히 윤성을 부축했다.
저 사람이 류경재인가.
홍보 포스터나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 아주 낯설진 않다.
나는 얼른 치유 포션을 꺼내 윤성의 다리에 퍼부었다. 윤성이도 정신 차리고 셀프 힐링을 시작했다.
“휴, 죽는 줄 알았네. 이제 괜찮아.”
정기석 경위가 그제야 벅차서 경례했다.
“총경님, 무사하십니까! 저희가 왔으니 이제 안심하십시오!”
“쉿! 조용히 해, 멍청아.”
강은빈 경위가 정기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잖아.”
그녀의 말이 옳다. 이제 류경재 총경을 확보했으니 그를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일만 남았다.
단, 던전을 나가려면 던전 보스를 먼저 쓰러뜨려야 한다.
윤성의 무사함을 확인한 류경재가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기석아, 내가 타워 안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냐?”
그는 다리를 살짝 절었다. 아마 그래서 윤성이 업고 뛰어내린 모양이다.
나무로 올라가 피하는 과정에서 다쳤는데, 그 바람에 내려오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24시간이 지나도 귀환하시지 않아서 저희가 투입되었습니다!”
“24시간이라…….”
류경재 총경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이 안에서 6일을 버텼다. 오거들에게 중상을 입고 도망 다니다가, 다행히 이 나무를 발견한 덕에 살아남았지.”
“아…….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총경님.”
“고맙다, 후.”
시간 비율이 6대 1이구만. 그럼, 밖에서는 아직 한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겠다.
‘부모님이 걱정하시기 전에 집에 갈 수도 있겠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류경재 총경이 내게 정중하게 말했다.
“이정우 기사……. 맞습니까?”
“네, 제가 이정우인데요.”
“이분한테 듣기로…….”
류경재가 윤성이를 가리켰다.
“기사님의 결단으로 구조대가 편성될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제 불찰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곳으로 구하러 와주신 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
윤성이 녀석, 그 짧은 시간을 틈타 내 공치사를 한 모양이군.
접한 지 30초 만에 류경재라는 사람의 성품이 대충 짐작 간다.
예의 바르며 은원이 확실하고, 체면이나 자존심에 집착하지 않는 것 같다.
한눈에 훨씬 어리다는 걸 알 수 있는 내게, 극존칭으로 솔직하게 감사를 전해 온다.
이러니까 경찰들이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구출하려고 애쓴 거겠지.
“뭐, 별말씀을.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류경재가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은 그의 손에서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는 설아에게도 묵례를 했다.
“앗, 아, 안녕하세요.”
당황한 설아가 허둥지둥 말했다.
인사를 마친 류경재가 두 경위를 돌아보았다.
“이제 서둘러 던전을 나가야 할 텐데. 보스 위치는 파악이 됐나?”
강은빈이 탐지 장치를 보며 말했다.
“여기가 던전 중심입니다. 쭉 나선형으로 이동해 왔기 때문에 더 탐지할 지역이 없습니다만…….”
그때, 발밑에서 은은한 진동이 느껴졌다. 동시에, 류경재가 올라가 있던 거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흔들리는 나무를 본 순간.
나는 던전 보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세파시 게임에서 중간 보스로 접한 적 있는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나무 거인!’
<주의! 던전 보스가 출현했습니다.> -던전 보스를 쓰러뜨리면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제한 시간은 367분입니다.
나무 거인은 수면과 이동을 반복하는 몬스터다. 이름 그대로 거대한 나무와 흡사하게 생겼다.
머리 쪽에 잎은 물론 열매까지 열리는 까닭에, 다리를 땅속에 파묻고 잠들어 있을 때면 평범한 나무와 구분하기 어렵다.
수면 기간에는 생명의 위협이라도 느끼지 않는 한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 깨어나서 이동 기간이 되면 양분을 흡수할 다른 땅을 찾아 움직인다.
그런 상태일 때에는 매우 예민하고 난폭해져서, 어지간한 몬스터도 슬슬 피할 정도.
어쩐지, 임프들이 나무를 둘러싸기만 하고 기어오르지 않더라니.
나무의 정체를 눈치챈 것이다.
혹시나 깨웠다가는 나무 위의 인간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작살이 날 테니까.
그런데 제한 시간이 있어?
367분이면, 대략 우리가 던전에서 보낸 시간과 비슷하다.
시간 내에 못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네.
우워어어어어!
나무 거인이 무시무시한 소리로 포효했다.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위로 인간이 둘이나 올라오는 바람에 알게 모르게 수면을 방해받았으리라. 거기에 더해 양분 부족까지.
사람으로 치자면 잠 설치고 허기져서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상태다.
부웅!
나무 거인이 굵고 거대한 가지를 내리쳤다.
“우왓!”
목표가 된 류경재 총경과 차윤성이 허겁지겁 피했다.
쾅!
가지가 떨어진 땅이 움푹 파인다.
“건 도그, 발포!”
정기석 경위의 명에 건 도그의 미니포가 불을 뿜었다.
쾅! 콰앙!
화염 머신건에 맞은 나무 거인이 주춤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폭뢰의 구슬과 효과가 비슷한 폭염의 구슬 여러 개를 꺼냈다.
폭발을 일으키는 것까지는 동일하나, 폭뢰의 구슬은 뇌속성 스파크를 일으키고 폭염의 구슬은 불이 붙어 지속성 화염 대미지를 입힌다.
‘설마 이걸로 죽지는 않겠지.’
나무 거인은 방어력이 엄청나지만, 나무인 만큼 불에 약하다.
그렇다고 내 손에 던전 보스가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높은 확률로 각성 퀘스트를 위한 필드 보스가 소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을 멈추고 타격을 입히는 정도가 딱 좋다.’
최대한 위쪽, 잎이 무성한 곳으로 힘껏 구슬을 던졌다.
콰아앙! 펑!
날아간 폭염의 구슬이 나무 거인의 윗부분, 명치께 어림에서 폭발했다.
그냥 터지기만 한 게 아니라 불이 붙었다. 그러자 나무 거인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태훈 형만 빼고, 화력 다 쏟아부어서 총공격해요!”
내 말에 류경재가 심호흡하며 나섰다.
“후우, 마침 불에 약하다 이건가.”
어라, 그러고 보니 저 사람 별명이 -
화르륵!
화염의 기사!
류경재의 나이트 기어, 제독검이 불길에 뒤덮였다. 마치 불로 만들어진 검처럼 보였다.
류경재는 비록 A급이라고는 해도, 실전 경험이나 센스에서 우리 애들보다 훨씬 앞선다.
단언컨대 그는 지금의 윤성이와 설아, 김태훈보다 강하다.
만약, 우리 애들이 이 던전에 혼자 떨어졌다면 6일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셋이 함께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쿠어어어어!
불의 검을 보고 본능적으로 위협적이라고 느꼈는지, 나무 거인이 류경재를 향해 나뭇가지를 내리치려고 했다.
“어딜!”
그때, 조설아가 나무 거인의 몸통을 박차고 삼각 뛰기를 하여 나뭇가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 상태로 잠시 끙끙대나 했더니 가지를 뚝 부러뜨려 버렸다.
‘저거 스킬이다.’
격노한 나무 거인이, 내려선 조설아를 향해 칼날 같은 나뭇잎을 내쏘았다. 놀란 설아가 등을 돌리고 쭈그려 앉았다.
“앗!”
‘괜찮아. 그 정도면 충분해.’
팅! 티잉!
설아의 등에 맞은 나뭇잎이 모두 튕겨 나갔다. 그 모습이 꼭 웅크린 거북이 같다.
‘그런데 류경재는 뭐 하는 거?’
나이트 기어에 불을 씌우더니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안 하고 있다.
이미 5초 정도 지났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저거, 실전에서 쓸 수 있나?
발동 시간이 저 정도로 걸린다는 것은 위력이 상당한 스킬이라는 뜻이다. 주변에 아군이 많으니 믿고 지른 모양.
지금 보니 조설아가 아니더라도, 정기석과 강은빈이 양옆에서 류경재를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다.
그사이 류경재의 준비가 끝났다.
그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 눈에서 불같은 안광이 일렁였다.
류경재가 앞으로 한 발 크게 내디디며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제독검, 12장.
염룡검(炎龍劍)!
무르가 꼬리로 내 어깨를 탁탁 치며 드물게 감탄했다.
-허어, 제법이로구나. 인간이 저 정도로 불의 기운을 다루다니.
검에 어려 있던 불꽃이 용의 형상으로 변해 맹렬히 튀어 나가는 동시에 빠르게 커졌다.
나무 거인의 앞에 이르렀을 때, 급기야 염룡은 높이 10미터는 될 듯한 거인보다 더 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