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 대폭주 대비 시작 (14)
나는 김태훈의 미친 소리를 막으려 했다.
“야, 김태훈.”
하지만 그는 기어이 내뱉었다.
“서번트 한 사람의 희생으로 저 인베이더에게 당할지 모를 수천 명의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되는 거지?”
“헛소리하지 마!”
김태훈은 인형의 그것 같은 눈알을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왜 헛소리지? 난 그렇게 배웠는데?”
“이 미친…….”
무르가 내 머릿속에서 광소했다.
-크하하! 고양이 모습인 나를 놔두고 동료를 죽여서 조건을 채우려 하다니. 역시, 저놈은 제정신이 아니구나! 마신의 빙의체답다!
‘아오, 좀 조용히 해요!’
분명,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 따위의 이유겠지.
콰아앙!
가뜩이나 정신없는 판에, 킹 슬라임이 또 강렬한 스킬을 발동했다.
어쩔 수 없이 내 몸으로 또 김태훈을 보호하고 말았다.
등 뒤로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밀려와 몸이 뒤흔들렸다.
칼로 내리쳐도 베이지는 않지만 둔탁한 감각은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
마력이 쑥 빠져나갔다가 다시 차오르는 감각이 전해졌다.
나를 코앞에서 마주 보면서, 김태훈이 히죽 웃었다.
“이거 봐. 넌 나를 포기 못 해.”
“……닥쳐라, 진짜.”
“그러니까 저 여자를 제물 삼아서 이 위기를 벗어나야지? 너랑 내가 살아남으려면. 우리 귀여운 까망이를 죽일 수는 없잖아.”
“닥치라고 했어.”
내 머리가 터질 듯 핑핑 돌았다.
킹 슬라임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마력 소모량 계산을 하는 것과 동시에.
김태훈이 서지수를 해칠 수 없게 하면서도, 그를 각성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그냥 김태훈에게 갓 등급 아이템을 줄까?’
이 방법은 곧 포기했다.
지금 상황이 되기 전이었다면 이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태훈의 본성을 새삼 확인한 이상, 그에게 힘을 더 실어주기에는 어려웠다.
내가 못 막을 수준이 되자마자, 서지수를 죽여 천살 특성을 달성하려고 들 테니까.
‘그럼 지수에게?’
아니, 서지수에게 아이템을 주는 방법도 무리다.
애초에 아이템이라는 물건은 기사가 사용해야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30레벨 제한 이후의 아이템들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게 그 증거다.
지금 서지수에게 준 것들이 그녀가 쓸 수 있는 최상의 아이템이다.
결국,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내가 더 강해져서 김태훈을 제어하면서 킹 슬라임을 상대하거나.
김태훈이 죽일 수 있는,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를 넘기는 것.
‘현실적으로 후자겠지…….’
나 또한 기사가 되긴 했는데 문제는 나 자신이 강해지는 클래스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기사를 더욱 강하게 하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일단, 내 스킬로 하는 데까지 해 보자.’
나는 빛의 아르카나와 어둠의 아르카나 스킬을 연이어 썼다.
빛의 아르카나는 아군을 강화하고, 어둠의 아르카나는 적을 약화하는 카드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평소에는 종종 터지던 ‘타고난 행운’ 특성이 날 돕지 않는다.
두 카드 모두 넘버 2, 3 정도의 마이너 카드가 나온 것이다.
즉, 작용 효과가 가장 약한 카드다.
김태훈은 ‘two of cups’ 카드가 나와서 생명력 회복 속도와 방어력이 50% 증가했고.
“오오, 땡큐.”
킹 슬라임은 ‘Three of pentacles’ 카드에 의해 행운 수치가 3 내려갔다.
그래 봐야 원래 행운이 7로 상당히 높아서 별 타격도 없다.
‘아오, 꼬이려니까 스킬빨도 안 받네!’
킹 슬라임은 내가 뭔가 했다는 걸 느꼈는지, 화가 나서 더욱 거칠게 우리를 몰아붙였다.
김태훈이 만신창이가 된 서지수를 또 유리알 같은 눈알로 쳐다본다. 무르는 기대에 차서 부추기고 있고.
-그래, 죽여라! 네놈의 본성을 보여 봐.
도움 되는 놈 하나 없구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내 행운 수치를 믿고, 마지막까지 미뤄둔 그 스킬을 사용하는 수밖에.
빛과 어둠의 아르카나 스킬에서 다 안 터졌으니까, 여기에 적용될 확률도 높아졌고.
이미 무르가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소환이 아니라 강림 상태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애송이, 뭘 하려는 게냐? 설마…….
난 도박하는 심정으로 스킬을 발동했다.
“……마신 소환!”
마신 소환 스킬은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스킬인 동시에 가장 약한 스킬이기도 하다.
강한 만큼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스킬의 효과는 이름 그대로 마도서 ‘레메게톤’에 인장이 박힌, 72마신 가운데 하나를 불러내는 것.
대가는 보유 마력의 50%이며, 지능 수치가 높고 소모 마력량이 많을수록 높은 위계의 마신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단, 어떤 마신이 나올지는 완전히 무작위다.
운이 따른다면 인간에게 우호적이면서도 강력한 마신이 나올 수도 있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인간을 증오하는 마신이 나와서,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김태훈은 이미 반쯤 눈이 돌아갔다. 짐작건대 기사 각성을 눈앞에 두고 킹 슬라임에게 밀리자, 그에게 빙의한 호전적인 마신 할파스가 날뛰기 시작한 것이리라.
‘눈앞의 인간 하나만 죽이면 천살 특성이 개방되면서 킹 슬라임을 단숨에 해치울 수도 있다, 이거지.’
할파스와 공명하는 김태훈의 사고방식으로는, 대체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불러낸 마신을 죽여 봐라.’
만약 악의적인 마신이 나온다면, 어차피 다음에 나와도 골치다.
김태훈이 놈을 잡아서 천살 특성을 개방하도록 하면 된다.
이거야말로 이이제이……. 아닌가? 독으로 독을 제압한다였나?
내 생각을 읽은 무르가 경악했다.
-이거, 네놈도 저 할파스의 빙의체 못지않게 정신 나간 놈이구나! 인간만 살릴 수 있다면 마신은 어찌 되든 괜찮다 이거냐?
‘우호적인 마신이 나오면 괜찮아요.’
우호적인 마신이 나와도 상관없다. 아니, 그러면 더 좋다.
아무리 온화하다 해도 마신은 마신.
마신이 우리 쪽에 가세하면 킹 슬라임을 잡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그럼 전세가 유리해지니까 김태훈의 발작도 가라앉겠지.’
나는 이런 계산으로 마신 소환 스킬을 발동한 것이다.
-미친 놈.
무르가 혀를 찼다.
과연 어떤 마신이 나올 것인가.
슈우우우
바닥에 거대한 문양이 그려졌다.
그 문양의 모양을 본 순간, 나는 어떤 마신인지 깨달았다.
‘저건, 단탈리온!’
-단탈리온의 문양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말하라
-진실을
-비밀을
-미래를
남녀노소의 목소리가 뒤섞인 기이한 중얼거림과 함께, 로브 차림의 학자가 문양 위에 홀연히 나타났다.
학자는 목을 중심으로 빙 둘러 가며 무수한 얼굴이 달려 있었다.
얼굴은 생김새와 연령대가 제각기 다 달랐다. 매부리코의 대머리 노인도 있고,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젊은 여성도 있다.
공통점은 모두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미묘한데. 오늘 진짜 날이 아닌가…….’
일단, 단탈리온은 위계가 낮다.
72마신 가운데 뒤에서 두 번째인 71위. 개별 전투력은 오히려 예술의 마신 암두시아스보다 약하다.
전방에 직접 나서는 타입이 아니라 뒤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이다 보니, 이런 소수 전투에서는 마신치고 화력이 달리는 것.
단, 마계의 군단장이긴 하나 호전적인 마신은 아니다. 또한, 비교적 대화도 잘 통하는 편이다.
‘마신인데 권장 영역이 무려 관대함과 선함이니까 말이지.’
한마디로 온화한 지장이라고나 할까.
무르는 김이 샜다는 듯 코를 울렸다.
-흥, 시시한 놈을 불러냈구나.
그래도 다행히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무르와 단탈리온의 사이가 할파스만큼 나쁘지는 않다는 뜻.
이런 단탈리온의 특기는, 들고 있는 마도서를 통해 세계의 비밀과 과거, 미래의 일을 알아내는 것이다.
실제와 다름없는 환각, 환영을 만들어내 눈을 속이는 것.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읽어내어 그 대상의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즉, 적군 사령관이나 참모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선택을 하게 하므로 전쟁에서는 백전백승이다.
전투력이 약한데도 36개의 악마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단탈리온의 무수한 얼굴이 바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중 어린 소년의 그것이 무르를 정면으로 마주 보는 위치에서 멈췄다.
그러자 소년이 눈을 뜨고 말했다.
“이런, 어쩐 일이십니까. 그런 모습으로.”
무르가 사납게 하악질을 했다.
-닥치고 나 아는 척하지 마라.
무르의 일축에, 소년은 살짝 기죽은 기색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소환자여, 무엇을 바라십니까?”
확실히 온화한 마신이다.
그 짧은 사이 소환자의 언어를 파악하여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
온화할 뿐만 아니라 현명하기도 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일고여덟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서양 꼬마가, 귀여운 목소리로 유창하게 한국어를 하니까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묘하다.
“그…….”
나는 얼른 킹 슬라임과 김태훈의 상태를 살폈다.
킹 슬라임은 우리에게서 조금 떨어진 엉뚱한 곳에서 회전하고 구르며 난리가 났다.
김태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히죽히죽 웃었다.
“너, 진짜 죽인다?”
……미쳤나?
내 생각을 읽은 듯, 단탈리온이 소년의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대에게 위협이 될 듯하여 환상을 보게 해줬습니다. 해골의 기사님.”
그렇군. 킹 슬라임과 김태훈은 지금 허상을 상대하고 있는 거다.
그 찰나의 시간에 귀족급 인베이더와 미래의 특급 기사를 속일 정도의 허상을 만들다니.
역시 마신은 마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봐야 잔재주지.
무르가 단탈리온을 가차 없이 폄하했다.
저기, 그쪽보다는 훨씬 도움이 됩니다만.
서지수는 내 옆에 꼭 붙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
킹 슬라임에게도 용감히 맞섰는데, 마신에게서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것이다.
“저, 저게 뭐야?”
무리도 아니다. 태연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저 김태훈처럼.
“우리 편이니까 겁내지 마.”
나는 나직이 그녀를 다독였다.
한데 단탈리온이 날 부른 호칭이 영 마음에 걸린다.
“해골의 기사라뇨? 왜 날 그렇게 부르는 거죠?”
“그게 당신의 소망인가요? 당신이 알고 싶은 게 그것입니까?”
마신의 속임수!
나는 얼른 대꾸했다.
“그건 아니고요.”
역시, 선하다고는 해도 슬쩍 후려치려고 한다.
단탈리온은 공짜로 불러낸 게 아니다. 내 가용 마력의 절반이라는 큰 대가를 치르고 소환했다.
따라서 계약 조건에 따라 내 소망을 들어줄 의무가 있다.
현신한 지금도 꾸준히 마력이 소모되고 있어서, 무르무르의 강림을 유지하는 데 드는 마력 이하로 떨어지지 않게 계산하느라 머리가 깨질 지경이다.
나는 얼른 마력 포션을 하나 들이켜고 역겨움을 참으며 말했다.
“패하지 않는 전쟁의 수호자여. 어둠 속에서 선의를 찾는 존재여. 내가 킹 슬라임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제법 예를 아시는 분이군요.”
단탈리온은 내가 자신을 부른 별칭이 마음에 든 듯했다.
이건 세파시에서 공식적으로 단탈리온을 가리키는 문구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돕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마음을 읽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대상은 인간에 국한하거든요.”
이는 곧, 킹 슬라임의 생각을 읽거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