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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126화 (126/303)

126화

11부 : 시험의 탑 공략 (12)

신전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황궁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다.

검신 바알이라.

바알은 72마신의 서열 1위인 지옥왕의 이름이다.

바알은 마신 최강의 검사이기도 하니, 검신이라는 수식어가 틀린 말은 아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정중하게 경배하고 나오시오.”

우리는 라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신전으로 들어섰다.

*

한편, 타워 던전 밖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

서울이나 대한민국은커녕, 지구가 맞는지조차 불확실한 곳이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나무와 신비로운 화초들로 둘러싸인 공터다.

초목 사이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작은 생명체들이 깔깔대며 날아다녔다.

언뜻 잠자리처럼 보였으나 놀랍게도 투명한 날개가 달린, 작은 인간의 형체였다. 요정들이다.

그 공터 한가운데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고, 예의 네 남녀가 둘러서 있었다.

후드 달린 붉은 로브 차림의 여인, 마고.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소녀, 포르투나.

아랍풍 복장을 한 푸근한 인상의 노인, 서포터.

마지막으로 상체를 탈의한 근육질의 동양 사내, 센시였다.

원탁 위에는 복잡한 기호와 도형이 어지러이 그려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것들이 저마다 저절로 움직였다.

한동안 원탁을 들여다보던 센시가 말했다.

“뭐야, 공략 너무 빠른데? 차원 프로그램 잘못 짠 거 아냐?”

그 말에 마고가 센시를 노려보았다.

“네가 ‘크레아’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어허, 왜 이러시나. 나도 이클립스의 일원이야. 기본적인 것은 안다고.”

“흥.”

“게다가 수십 개의 차원을 멸망시켜 봤으니까, 이렇게 쉽게 차원 계층을 공략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지.”

“해를 떠오르게 하는 것과 가리는 게 같은 줄 알아?”

둘의 말다툼이 또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서포터가 나서서 말렸다.

“허허, 자, 그만들 하게. 이제 겨우 1계층 아닌가.”

그러자, 콧잔등을 긁으면서 원탁을 유심히 보던 포르투나가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그렇긴 한데, 확실히 이상한 점도 있어. 영감.”

“응? 뭐가 말인가?”

“여기, 이 출력값을 봐.”

“그건……. 변이성 버그 가운데 하나의 마력 설정 수치로군. 지금 봐서는 평범하네만.”

“이게 아까 순간적으로 팩토리얼 값이 되었다고.”

“무한……? 허허, 자네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아냐. 이 중에서 내 동체시력이 제일 좋은 거 알잖아. 잘못 봤을 리 없어.”

부드럽던 서포터 노인의 어조가 단호해졌다.

“무한 수식의 적용은 불가능하네. 아무리 임시로 창조한 차원이라고 해도.”

“가능한 존재가 하나 있잖아. 무한 수식이 특기인 자.”

“…….”

잠시 침묵이 감돌고, 마고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발리어…….”

“그래. 절대로 죽지 않는 무한의 카발리어. 그 방어력이 무한 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거, 우리 다 알지. 그러니까 마고도 그거 믿고 수십 년이나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 그만한 탱커가 없어서 저 자리도 쭉 비워둔 거고.”

포르투나가 비어 있는 자리 하나를 가리켰다.

그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고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그렇다면 더더욱.”

“아 왜!”

“저것들은 창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들이 쌓여 만들어진 변종 버그들이야. 바이러스나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그 사람의 수식을 썼다니, 말이 돼?”

마고의 항변에, 포르투나도 더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분명히 본 것 같았는데…….”

서포터가 상황을 정리했다.

“자, 자. 이번 차원은 특별히 공들인 만큼, 매개 변수와 난수가 유독 많았네. 아무리 포르투나 자네라도 순간적으로 잘못 봤을 수도 있지 않겠나? 무한 수식은, 그 난해한 속성과는 대조적으로 단 한 글자로 성립하니까 말이네.”

“그런가…….”

“아무튼, 나는 이것조차 재미있다고 보네. 변이성 버그들이 이 정도는 해 줘야 만든 우리도 보람이 있지.”

센시가 팔짱을 끼며 서포터에게 물었다.

“코드네임 타워는 이번에 생겨난 차원의 버그가 너무 심해져서, 사육제 이벤트 전에 코드 수정하려고 끼워 넣은 코드잖아.”

“그렇지.”

“그런데 혹시 이 안에서, 버그가 더 심하게 변이하는 건 아니겠지?”

그 물음에는 마고가 대신 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별문제 없고.”

“왜 문제가 없어? 지금도 조금 성가셔진 수준인데.”

“타워와 사육제 이벤트를 하는 이유가 뭐야?”

“그야, 개기일식 전에 최대한…….”

센시는 말하던 도중, 스스로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만. 극한까지 변이해서 동조화한다고 해도, 어차피 내가 지워버리면 되니까.”

“네가 아니라 우리겠지.”

“뭐, 대부분 내 선에서 끝나잖아.”

포르투나가 말했다.

“이제 계속 보자. 그래도 역시 버그가 있을 때가 더 재미있어.”

“그러지.”

이클립스의 네 사람은, 다시 원탁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

바알의 신전에 들어온 나는, 게이트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득 몸이 굳었다.

“어?”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던 차윤성이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이상하게 시선 같은 게 느껴져서…….”

“시선?”

“응. 누군가 아득히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윤성은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듣고 있던 설아가 끼어들었다.

“혹시, 저 신상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든 거 아닐까? 우리를 내려다보는 구도잖아.”

설아의 말대로, 확실히 바알 신상이 위압적이기는 했다.

높이가 거의 20미터 정도 되어 보였는데, 고개를 살짝 숙인 자세여서 신전에 들어온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조각 자체도 너무 생생하게 잘 만들었고.’

세파시 게임에서 내가 유일하게 소환해본 적 없는 마신이 바알이다.

72위계의 최상위여서 그랬는지, 그냥 조건이 안 맞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솔로몬의 마도서 아이템을 습득하면 저절로 얻어지는 ‘72마신 도감’을 통해, 외형은 대충 알고 있었다.

마신 도감에는 각각의 마신 일러스트와 더불어 위계와 이름, 간단한 능력까지 나와 있다.

나는 그것들을 달달 외웠다. 세파시는 체감상 현실이나 다름없는 게임이어서, 소환 도중이나 직후에 도감을 꺼내어 펼쳐보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또, 마신들이 워낙 까탈스러워야 말이지. 제 이름 한 글자 틀렸다고 토라져서 호되게 고생시킨 마신도 있고…….’

내가 소환한 마신들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마신들이 일일이 자기 이름을 밝히고 통성명하진 않으니까.

아무튼, 바알 신상은 그 도감의 일러스트와 사뭇 달랐다.

도감에는 거대한 거미의 몸통에, 얼굴이 세 개 있는 머리가 달린 - 다소 기괴한 생김새다.

세 개의 얼굴은 각각 검은 고양이, 왕관을 쓴 노인 그리고 사마귀가 잔뜩 돋은 두꺼비의 그것이다.

그런데 정작 신상은 검을 들고 포효하는 미남자의 모습이었다.

바알은 검술의 마신이므로 검을 들린 건 이해가 가는데, 어째서 저런 미남자의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신상이니까 섬기기에 저항감 없게 하려고 그러나.

그때, 갑자기 설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앗!”

그 소리에, 신상 내부를 지키던 병사들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부라렸다.

생존자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잔뜩 움츠려 거북목이 됐다. 고작 며칠 사이에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짐작이 갔다.

“설아야, 쉿.”

“아, 미안! 저기에 이상한 게 보여서. 저게 게이트 아닐까?”

“응?”

설아가 가리키는 방향은 다름 아닌 신상의 입이었다.

우오오! 하고 외치는 듯한 모양의 입 안쪽에, 아지랑이처럼 은은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걸 용케도 찾았다.

설아의 말에, 바알상 입 부분을 유심히 본 손태준이 말했다.

“확실히 공간 왜곡이 느껴지는군. 저기가 단방향 게이트가 맞는 것 같다.”

단방향 게이트.

게이트를 통해 던전에서 나갈 수는 있으나, 반대편에서 들어오지는 못하는 게이트를 의미한다.

전형적인 던전 게이트의 형태다.

“잘 안 보이는 건 맞는데, 오래 보다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신전을 지키던 병사들은 왜 저걸 못 봤을까요?”

설아의 의문에 최혜인이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아마, 지금 막 활성화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던전을 클리어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던전 게이트는 해당 던전의 공략을 마치면 생겨납니다. 병사들이 신전을 지켜온 지난 시간 동안은 저런 것이 없었던 셈입니다.”

“아, 그렇군요!”

이제 저리로 통과해서 생존자들을 나가게 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신전 경비병의 눈을 피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냥 깔끔하게 죽여 버리지 뭐.”

김태훈이 퍽도 깔끔한 해결책을 내놨다. 지난 사흘 동안 쭉 지켜봐 온 듯, 이진욱조차 고개를 내저었다.

“너 앞으로 꽤나 피곤하겠다.”

“하하, 네. 뭐…….”

신상을 파손하지 않고 사람들을 들여보내는 게 관건이었다.

신성한 언덕인가 실성한 언덕인가에 올랐다고 대뜸 검을 휘두르고, 사람을 지하 감옥에 처넣는 곳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훨씬 애지중지하고 신성시하는 듯한 신상에, 긁힌 자국 하나라도 났다가는 다시 감옥에 가두려 할지도 모른다.

‘이래서 퀘스트의 일부였구나.’

하여간 뭐든 쉽게 가는 법이 없다. 고작 1층일 뿐인데.

처음부터 이러면, 우리 집이 있을 10층 정도는 얼마나 골치 아플지 걱정이다.

아무튼, 한두 명이면 몰라도 백 명을 일일이 업고 뛰어오를 수도 없고.

다들 한 가지씩 방안을 내놓았다.

“신상의 목에 줄을 걸어서 타고 오르면 어떻슴까?”

비교적 평범한 이혜림의 제안에 이진욱이 핀잔을 주었다.

“기각. 그렇게 하도록 잘도 놔두겠다. 꼭 교수형 당하는 모양새잖아.”

그도 그런데, 목 부분이 밧줄에 쓸려서 흠집이라도 나면 난리가 날 것이다.

“우리가 한 명씩 입 안으로 생존자들을 던져 넣으면? 농구하는 것처럼.”

꼭 자기 같은 김태훈의 제안에, 류경재 총경이 난색을 표했다.

“으음, 보다시피 신상이 거대하다고는 해도, 입 크기만 따지면 딱 한 사람이 통과할 정도여서…….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자칫 신상도 부서지고 사람도 다칠 것 같네.”

최혜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신전 옥상에 올라가서 신상 입 부분으로 뛰어내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녀에게는 내가 답해주었다.

“어, 그게, 일단 허락할지도 모르겠고, 보시다시피 신상이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모양이라서요. 뛰어내려서 입으로 골인하기는 좀 어려워 보이네요.”

“그렇습니까…….”

다 와서 생각지도 못한 장벽에 부딪혔다.

생존자들을 신상의 입으로 통과시키는 것. 언뜻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막상 실행하기에는 어렵다.

“휴, 어쩔 수 없네.”

하지만 내게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여기에서는 나밖에 할 수 없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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