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12부 : 열사의 제국에서 (5)
이클립스 4인방은 거대한 폭포 끝에서 원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있었다.
원탁과 의자가 폭포 위에 살짝 떠 올라 있다.
높이도, 폭도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폭포였다. 물이 쏟아지는 굉음도 엄청났으나 기이하게도 그들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잘 울렸다.
여전히 상체를 탈의한 근육질의 사내, 센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나이아가라 폭포의 구현이라 이거지? 세계에서 제일 거대한 폭포라는. 제법 실감 나는데?”
제 몸만 한 활통을 등에 멘 소녀, 포르투나가 핀잔을 주었다.
“이과수 폭포라고 몇 번을 말해.”
“아, 그거나, 그거나.”
서포터 영감이 웃으며 거들었다.
“허허, 사실 세계 3대 폭포에 같이 포함되어 있긴 하다네.”
“서포터 할아버지, 말은 바로 해야지. 그래도 완전 다르잖아! 이과수는 폭이 나이아가라의 네 배거든? 여기에서 저기까지 4km나 된다고!”
만면에 웃음 띤 붉은 후드 로브의 미녀, 마고가 짝 손뼉을 쳤다.
“자, 다들 딴소리 마시고. 갑자기 웬 폭포 타령이야?”
“…….”
“내 크래커인 레이저가 제일 먼저 변이성 버그들을 찾아냈어. 그러니까 약속대로…….”
그녀는 말하면서 원탁 끝으로 손을 뻗었다.
거기에는 손톱만 한 크기의 투명하고 얇은, 표면에 복잡한 수식이 그려진 크리스털 조각 같은 게 놓여 있었다.
“하이퍼 메모리는 내 거야.”
짝!
그런 마고의 손등을 포르투나가 야무지게 때렸다.
“아야!”
“어허! 동작 그만. 밑장 빼기여?”
“아니, 달랑 이거 하나뿐인데 무슨 밑장……이 아니라! 무슨 짓이야, 포르투나! 그리고 너, 또 고대 한국 영화 봤지?”
“그게 내 취미잖아, 언니. 후훗.”
“어쨌듯 내기는 내가 이긴 게 맞잖아.”
센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지, 마고.”
“뭐가 아닌데?”
“우리 내기는 변이성 버그를 제일 먼저 찾아내는 게 아니야. 제일 먼저 찾아내서, 제일 많이 제거하는 데까지지.”
마고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아니, 레이저 혼자 버그들을 찾아냈어. 그럼 당연히 제거도 레이저가 다 하는 거지.”
듣기만 하던 서포터가 불쑥 입을 열었다.
“과연 그럴까? 허허.”
“그게 무슨 뜻이야, 영감? 설마, 레이저가 고작 버그들한테 당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니, 왜 이렇게 극단적인가, 마고. 놈들이 버텨내고 달아난다는 선택지도 있잖은가, 허헛.”
마고는 자신 있는 투로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레이저는 지금껏, 무려 백 년 넘게 단 한 번도 목표를 놓친 적이 없거든. 제일 먼저 찾아낸 데는 이유가 있는 거야.”
네 사람의 시선이, 다시 선과 도형이 어지러이 움직이는 원탁 위로 향했다.
“확실히, 재미있기는 하네.”
센시가 히죽 웃었다. 그러다 퍼뜩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런데 우리 크래커들은 죄다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레이저는 벌써 먹잇감을 찾아냈는데!”
*
롬 제국, 황제 키마리스의 알현실.
키마리스는 새빨간 눈으로,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쇳소리 같은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믿기지가 않는구나.”
“…….”
그의 앞에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뚱한 표정의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후드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미군 군화를 신었다.
헝클어진 덥수룩한 머리에 후드를 덮고, 그 위에 헤드폰을 착용하고 있다. 검은색 헤드폰 밖으로 락 음악이 은은하게 새 나왔다.
“혼자서 나의 근위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키다니.”
키마리스 황제의 말대로였다. 알현실은 근위대 12인에 더해, 달려온 병사들의 시신으로 가득했다.
모두 이 청년이 불과 몇 분 사이에 벌인 일이다.
근위대와 병사들은, 끔찍하게도 모두 신체 일부가 불에 타 재가 된 상태였다.
머리가 불타 까맣게 그을린 두개골을 드러낸 자가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척추와 갈비뼈 등 몸통이 타 사라진 자였다.
청년이 알현실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 있어?”
“뭐가 말이냐?”
“버그들.”
“버그? 그게 무슨…….”
“세계 밖에서 들어온, 너한테 찾아왔던 놈들 말이야.”
“아.”
키마리스는 비로소 기사 이정우와 그 일행을 떠올렸다. 그는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자들을 찾아온 것이더냐? 하면, 처음부터 용건이 그것이라고 말했으면 되지 않느냐?”
“말하기도 전에, 내가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공격했잖아. 네 부하들이. 그러더니 줄줄이 계속 들어왔고.”
“그건 그렇군.”
논리의 마신 키마리스는 청년의 말이 옳음을 수긍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제 말해주기가 싫어졌구나. 네놈이 나의 충성스러운 근위대를 몰살했으니 말이다.”
말과 동시에, 키마리스가 청년을 공격했다.
-마도, 블랙 호스!
그의 양쪽 어깨 부근에서 거대한 랜스가 나타나 청년에게 날아갔다.
“쩝. 꼭 관을 봐야…….”
청년은 입맛을 다시며 랜스를 피했다.
하지만 키마리스의 공격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라.”
청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두 자루를 시작으로, 알현실 벽을 빼곡하게 메울 정도로 수많은 랜스가 나타난 것이다.
“모두 666자루의 마도 랜스다. 네가 벌레라고 칭한 자들과 거래한 덕에, 모든 마도 랜스를 불러낼 만큼 마력량이 늘어났거든.”
“그거 잘됐네. 축하해.”
“그런 거래를 한 상대이니, 행방을 순순히 알려줄 수는 없지. 평소의 내 행동과는 다르게 비논리적이지만 말이다.”
슥. 키마리스가 기다란 검은 검지로 청년을 가리켰다.
-전마(戰馬)의 진군!
두두두두두두두!
마치 수백 마리의 말이 한꺼번에 달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하나하나의 길이가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랜스 666자루가 청년을 향해 쏟아졌다.
전투의 마신이 아닌 키마리스를 66위계의 자리에 앉힌 주특기다.
그러자 청년이 주머니에서 처음으로 손을 뺐다. 그리고 양손을 헤드폰 표면에 갖다 댔다.
“크랙 원, Monkey Business.”
그 순간.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던 랜스들이 확연히 느려졌다.
“아니?”
키마리스는 이렇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놀란 자신의 목소리가 매우 느리게 들린다고 느꼈다.
“아 - 아 - 아 - 아 - 아.”
청년은 랜스들 사이를 춤추듯 여유롭게 빠져나와 키마리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키마리스는 그걸 뻔히 보면서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정확히는, 움직이기는 했으나 너무 ‘느렸다.’
5초에 손가락이 겨우 1센티씩 움직일 정도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랬나.’
친위대들이 움찔거리다가 갑자기 쓰러진다고 느꼈는데, 사실은 한없이 느려진 거였나?
“니 - 이 -.”
여기까지 말했을 때.
청년은 키마리스의 옥좌가 놓인 단 위로 뛰어올라, 그의 코앞에 섰다. 어느새 두 손은 다시 청바지 주머니에 넣은 뒤였다.
“논리와 수사학을 관장하는 마신이라고 했지?”
“이 - 이.”
“그런데 왜 이렇게 비논리적인 선택을 했어? 그러니까 살던 대로 살았어야지.”
“이.”
키마리스가 마지막 음절을 내뱉은 것과 동시에.
손을 한 번도 쓰지 않고 친위대를 모두 쓰러뜨린, 청년의 발차기가 마신의 관자놀이를 후렸다.
“크랙 투, Crash and Burn.”
퍽!
그림 같은 하이킥이 꽂혔다.
키마리스의 머리가 세차게 흔들리나 했더니, 그의 눈과 귀, 코, 입에서 일제히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발차기에 맞는 순간, 머릿속에서부터 불이 붙어 타오른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청년은 횃불처럼 타오르는 키마리스의 머리를 보며 말했다.
“오오, 마력량이 늘어났다더니 확실히 잘 타네.”
키마리스는 입에서 불을 토해내며 간신히 말했다.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엥? 그게 왜 궁금해?”
“나는, 마신……. 이대로 죽는 게 아니다……. 네놈을 기억해 두었다가…… 지옥에서 반드시 돌아와…… 저주해 주마…….”
“안 될 건데. 뭐, 이름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지. 웃차!”
청년은 단 위에서 뛰어내려,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내 이름은 스키드 로우(Skid Row). 거짓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는 무사, 센시 님을 모시는 크래커다.”
그러나 키마리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이미 머리가 완전히 타서 사라진 까닭이다.
“아, 그러고 보니 버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묻는 걸 까먹었네.”
투덜대던 청년, 스키드 로우가 다시 헤드폰에 양손을 댔다.
“크랙 원, Monkey Business.”
“억!”
알현실을 몰래 들여다보다가 달아나려던 근위기사, 라칸의 걸음이 순식간에 느려졌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달리려 했지만, 5초에 1센티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여유롭게 그의 뒤에 와서 선 스키드 로우는, 라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웃었다.
“넌 아냐? 버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순순히 말해주면 최대한 빠르게 태워줄게.”
“……!”
키마리스가 센시의 크래커, 스키드 로우에게 쓰러질 무렵.
던전 공략 파티도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푸확!
피가 튀었다. 또 누군가가 모노와이어, 그러니까 단분자 커터에 몸 어딘가가 잘린 것이다.
“윽.”
이번에는 최혜인이었다. 아무래도 후방에서 화살을 날려 대는 그녀의 원거리 공격이 거슬린 듯했다.
오른쪽 어깨를 뭉텅 베인 최혜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최악이다. 최혜인은 강력한 치유 스킬을 가진 대신, 자기 자신은 치료하지 못한다.
‘내가 가서 치료 물약을 부어줘야 해.’
촤아악!
‘부어줘야 하는데……!’
내 코앞으로 뭐든 자르는 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마터면 눈 뜨고 코 베일 뻔했다.
생각보다 저 망할 모노와이어가 까다롭다!
제일 큰 문제는, 충격적이게도 나의 패시브 스킬 금강불괴마저 무시한다는 것이다.
실은 몇 분 전, 금강불괴 믿고 돌진하다가 내 왼쪽 발목이 날아갔다.
그 바람에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고꾸라져 몇 바퀴를 굴렀다.
아주 볼 만했겠지. 잘린 발목에서 피를 흩뿌리면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꼴이.
그 광경에 눈이 돌아간 윤성이와 어째서인지 함께 눈이 돌아간 김태훈이 이 악물고 레이저에게 덤벼들었다.
다행히, 예상대로 둘에게 입혀준 아레스의 갑옷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그 틈에 설아가 얼른 내 뒷덜미를 잡고 끌어냈다.
“와, 썩을……. 설마, 저거 물리 속성 공격이 아니라는 건가? 아닌데? 아무리 단분자 커터라도 어쨌든 베는 순간은 물리적 접촉일 텐데?”
아무리 던전 내부라 해도, 스킬이 파훼된 것은 처음이자 충격이었다.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설아가 울었다.
“정우야, 흐흑. 못 알아들을 소리 그만하고 네 발목 좀 어떻게 해봐.”
“아, 맞다. 발목…….”
“여기 있습니다.”
고맙게도 최혜인이 내 발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재빨리 잘린 단면에 갖다 대고 치유 스킬을 발동했다.
타이밍 맞춰서 나도 치료 물약을 소환해 들이부었다.
그냥 붙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십 초 정도 지나자 바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 차례 호되게 당했더니 모노와이어에 몸을 사리게 됐다.
‘지난 몇 달 동안 금강불괴 믿고 나댔더니……. 고통에 취약해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