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13부 : 밝혀지는 비밀들 (3)
여관 주인 아만은, 사실 황제에 저항하는 비밀 조직 모이트란의 단장이었다.
알고 나니까 갑자기 다 이해가 간다.
셀리나 선생이 왜 굳이 아만에게 함께 집무실로 가자고 했는지.
그저 안내책일 뿐인 것 같던 그가, 여기 동석하여 핵심적인 얘기를 다 들을 수 있던 이유도.
여관 바로 건너편 집 - 마야의 아버지가 어떻게 곧바로 치료비를 받게 됐는지도.
마지막으로 -
“다시 인사드리죠. 제가 바로 모이트란의 현 단장이자, 과거 저항군의 부대장이었던 아만 모하메드입니다.”
왜 우리를 모두 여기에 불러서, 기밀을 말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었는지.
정체를 밝히는 아만은 말투만 변한 게 아니라 기세가 일변했다.
역시, 대장의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저항군의 부대장이 될 리 없지.
“오호.”
아만의 기세는 류경재 총경이 나직이 감탄할 정도였다.
짐작건대 A급의 기사에는 못 미치지만, 정기석이나 강은빈 경위보다는 강할 듯했다.
‘진실의 눈.’
능력치를 보려다가 또 노이즈가 뜨는 바람에 식겁했다. 이거 왜 이러는 거야?
그 때문에 수치 보기는 포기하고, 순전히 느낌으로만 수준을 가늠해보았다.
‘귀족……. 남작 등급의 인베이더 정도인가?’
저기에, 만약 모이트란이라는 나이트 기어를 아만이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면?
류경재 총경과도 비벼볼 만할 것이다.
원래 나이트 기어는 기사 본인만 사용할 수 있으나, 해당 기사가 사망하면 결속이 해제된다. 또한, 원주인의 의지가 작용하여 소유권을 바꿀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아만은 조은경의 연인이자 남편이었으며 반란의 생존자, 살아 있는 증인이 아닌가.
조은경 기사가 마지막 순간, 모이트란의 소유권까지 넘겼다면?
그야말로 모이트란 조직의 지도자로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잠깐 벙쪘던 류경재 총경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거 한 방 먹었습니다. 설마, 여관 주인장이 저항군의 단장님이었을 줄은…….”
아만은 정중하게 말했다.
“본의 아니게 속여서 죄송합니다. 사실, 손님들의 움직임은 도성 내에 들어온 직후부터 다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랬습니까?”
“처음에는 노예 상인 일행인 것 같더니, 여관 근처에 와서는 모험가 일행으로 변하더군요.”
“하하……. 야만족 취급을 받아 난감했던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거기에 더해, 여관에서 벌어진 전투로 평범한 분들은 아님을 파악했습니다.”
“음……. 피차 속였으니 비긴 걸로 합시다.”
류경재 총경이 잘 넘기고는 있는데 슬슬 불안하다. 내가 나서서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아무리 황제가 사면을 약속했다고는 해도, 그쪽을 용케 살려뒀네요. 어차피 조은경 기사도 전사했으니까, 황제 입장에서는 이제 계약을 지킬 필요도 없을 텐데. 암군이라면 더더욱이요.”
아만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 또한, 마지막 진압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셀리나 선생의 오빠가 가족들과 연을 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쉽게 속일 수 있나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국의 인구 조사 체계가 매우 엄하거나 명확하지는 않거든요. 또, 중죄인은 보통 현장에서 즉결 처분되니까. 생포될 것을 직감한 은경이, 저와 나이며 체구가 비슷한 시신을 부관이라고 속였습니다. 저하고는 사면권을 받은 뒤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지요.”
“그랬군요.”
조은경 기사는 이 던전에서 생긴 인연을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최선을 다한 것 같다.
“물론, 제가 일반인 신분으로 결혼한 뒤에도 어려움은 많았습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감시는 계속되었죠. 은경이 전사한 뒤부터 그나마 좀 편해졌어요.”
말하던 아만이 문득 웃었다.
“처음 뵙는 분들께 별 얘길 다 하는군요. 아무래도 아내의 조국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하니 마음이 편했나 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좋습니다.”
“아시다시피 얘기는 옆에서 다 들었습니다. 단장 자격으로 나머지를 처리하지요.”
류경재 총경이 내게 협상을 이어가라고 눈짓으로 지시했기에, 내가 나섰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번 환전에서 남는 금액을 모두 투자. 그리고 추가로 그만큼 또 투자. 투자가 찜찜하시다면 기부도 좋습니다. 아무튼, 일이 끝난 후에 모이트란을 돌려받는 조건입니다.”
“일이 끝난 후라…….”
아만이 의자를 당겨 가까이 다가앉았다.
“혹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는지 아십니까?”
나는 태연히 대꾸했다.
“글쎄요? 아까 셀리나 선생님에게 들은 바로는, 이 학교의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받고 마음 편하게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드시려는 거 아닐까요?”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좋습니다. 투자를 받아들이죠. 투자의 대가는 요구하신 대로 모이트란의 반환. 그리고 성공한다면 새로운 정부는 정치, 경제, 군사…… 모든 부문에서 귀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실패하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위험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뭐 이런 거죠. 반대라면 그 반대일 테고.”
“그렇군요.”
어차피 퀘스트 때문에라도 우리는 모이트란의 손을 잡아야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던전의 시스템은 우리가 모이트란을 도와 하크 제국 황실을 무너뜨리길 원하고 있다.
마침, 심정적으로도 이쪽에 더 끌리고 있으니 잘 됐다.
나와 직접적인 접점은 없으나, 한국인의 피를 이은 기사가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있고.
퀘스트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냥 버려두면 황실에 척살 당할 각이다.
‘하크 제국 황실은 만만치 않아. A급 기사가 포함된 무력 단체도, 정규군이 나서자 별다른 저항을 못 하고 꺾였다.’
하긴, 그 롬 제국과 오랜 세월 전쟁을 해온 나라다. 심지어 암군 치하에서도 그랬다.
롬 제국의 황제는 무려 인간으로 위장한 마신이었다.
그렇다면 하크 제국에도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마신을 적으로 두고도 대등하게 맞설 만한.
그러다 퍼뜩, 퀘스트의 내용이 떠올랐다.
‘하크 제국 근위대장 하산을 쓰러뜨려라.’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롬 제국의 근위대장은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외모나 이름도 기억 안 난다.
그렇다면 이번 퀘스트에서 하크 제국 황제가 아니라, 하산을 콕 집어 말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는 아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아만은 내 손을 맞잡았다.
“우리가 잘 부탁드려야죠. 참, 여관에 무한정 계셔도 임대료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하, 그것참 고맙네요.”
아만에 이어 셀리나 선생과도 악수를 나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모이트란과 당분간 한배를 탄 사이가 됐다.
다크 스톤을 건네받은 아만이 흡족한 기색으로 말했다.
“제 여관을 임시 아지트로 삼죠. 마침, 여러분이 거기에 숙박하고 계셔서 부자연스럽지 않겠네요.”
그의 말에 우리도 동의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오늘 밤에 거기서 뵙겠습니다.”
“참.”
나는 돌아서서 나가려다 말고 발을 멈췄다.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네, 뭐든지.”
“혹시, 하크 제국의 근위대장인 하산이라는 자에 대해서 아십니까?”
하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아만과 셀리나가 얼어붙었다. 말 그대로, 얼음 동상이 된 것처럼 일시에 움직임이 멈췄다.
차윤성과 류경재 총경도 이상함을 바로 알아차렸을 정도로.
위장과 연기에 능숙한 이들이다. 하산이라는 이름은 그런 두 사람이 짧은 순간이나마 평정을 잃을 만큼의 충격을 주었다.
잠시 후, 심호흡한 아만이 입을 열었다.
“그자의 얘기를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퀘스트 창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하크 제국에 들어오게 됐으니, 우리도 나름대로 정보 조사를 했습니다. 상당히 위험한 자인 것 같더군요.”
내 설명이 그럴듯했는지 아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를 이국에까지 악명이 퍼지다니……. 하긴, 하산 그자라면 그러고도 남지요.”
“그냥 잔인무도하고 무지막지하다는 정도만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자입니까? 아마 차후 적으로 만날 듯해서 말이죠. 특별한 능력이라거나 버릇 등,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실수록 좋겠습니다.”
아만은 중간중간 이를 갈며 설명을 해 나갔다.
“사실 정규군이 출격하기 전 - 그러니까 은경이 치안대를 상대할 때, 황제를 제거할 기회가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기사가 아무리 강해도, 특급 이상의 수준이 아닌 한은 홀로 다수를 상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대신, 은밀하게 단독으로 움직이면 막을 존재가 드물다.
현대에서 암흑 기사를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그들이 마음먹고 암약하여 범죄를 저지르면, 같은 기사조차 잡아내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특히, 요인을 암살하려고 들면 막기에 매우 어렵다.
전제 국가는 머리를 자르면 마비된다. 황제의 권력이 강할수록 더더욱.
삼국지에서 병력이 훨씬 적어도, 적장을 쓰러뜨리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아마 조은경 기사는, 분명 홀로 황제를 제거하려고 황궁에 잠입했을 것이다.
“그때, 앞을 가로막은 자가 바로 근위대장 하산이었습니다.”
하산은 조은경을 이기진 못했으나, 놀랍게도 조은경 또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제 암살에 실패하여 달아난 것이다.
역할 수행 중인 던전의 인베이더가, A급 기사의 암살 시도를 파악하고 막아냈다고?
‘놈은 마신이다.’
나는 거의 확신했다.
이어진 아만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 추측은 더욱 굳어졌다.
“하산은 병사 출신으로, 롬 제국과의 전쟁에서 연이은 전공을 세워 차근차근 출세한 자입니다. 순전히 개인의 무력으로 근위대장의 자리까지 올라갔기에, 군부에는 그자를 존경하는 이들도 많지요.”
말하던 아만이 지그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자는…… 그야말로 잔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전에 하산이 지휘하는 부대가 롬 제국에 협력하려 한 마을 하나를 몰살한 적이 있었는데, 여자와 어린아이들만 골라서 죽이고 그 피로 자기 몸을 씻는 행위를 했습니다.”
“……!”
“세상에.”
“개 또라이네.”
류경재 총경과 차윤성은 하산의 잔혹함에 불쾌감을 표했지만.
나는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혹시, 늘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이를 해치지 않습니까? 절규하는 아이 부모의 모습을 감상하고요.”
“아, 맞습니다. 미친놈이지요.”
“그리고 그자가 수소와 연관된 뭔가를 늘 지니고 다니지 않나요? 예를 들면 뭐, 소머리가 새겨진 방패라거나…….”
아만이 놀란 기색으로 답했다.
“헛! 어떻게 그것까지 아셨습니까? 전장에 나설 때면, 늘 소머리 모양의 투구를 씁니다. 관자놀이에 소뿔 같은 긴 뿔이 달린 투구입니다. 간혹 그 뿔로 적의 배를 꿰어버리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역시, 그…… 은경이의 조국까지 악명이 자자하기는 한 모양이네요.”
“뭐, 그렇죠.”
이 특성들이 알려주는 한 존재가 있다.
내 추측대로라면 하산은 아마 72마신의 하나 - ‘모락스’일 것이다.
위계는 21위. 기독교에서는 몰렉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그리고 마신 중에서도 인간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조롱하는 놈이기도 하다.
이거, 만만치 않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