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14부 : 진짜 적은 누구인가 (3)
“으음…….”
잠시 망설이던 무하마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피하지. 다만, 셀리나 선생은 구속해야 하오.”
어차피 셀리나가 이 자리를 피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 따로 안배해둔 것도 있고.
그래도 좀 짜증스럽긴 매한가지다.
“마음대로 하세요. 일단은.”
“대장님은…… 솔직히 편들고 싶진 않소. 내 딸마저 해치려고 했으니 이가 갈리지. 하지만 하크 제국에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오.”
뭐, 저런 미치광이를 따르는 걸 이해해 달라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건가?
아니면 싸우더라도 죽이진 말아 달라는 뜻?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 뭐야. 하긴, 당연히 하산의 정체가 마신이라는 것도 모르겠지.’
그쪽 사정은 내 알 바 아니다.
난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서는, 어찌 되었든 하산을 없애야 하거든.
나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얼른 피하기나 하시죠. 이왕이면 부하들도 물리고요. 죽는 거 보기 싫으면.”
“……!”
하산 - 마신 모락스는 엄청난 광기와 공포로 수하들을 지배하고 있다.
꼭 무하마드의 딸에게 한 짓이 아니더라도.
곁에서 오래 모셨을 텐데도, 하산이 나타나자마자 경직되는 근위대 병사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무하마드가 딸에 대한 애정으로 그 지배력을 극복한 건 기특하다만, 그러고서도 하산의 안위를 챙기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소녀, 그것도 제 수하의 아이를 주저하지 않고 집어던지는 놈을 봐줄 생각도 없으니까.
무하마드는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선생님. 가시죠. 샬린, 얼른 친구들을 불러오렴.”
“응. 얘들아, 빨리 이리 와! 우리 아빠야.”
겁먹고 구석에 몰려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사이, 물구나무서듯 거꾸로 박혔던 하산이 자세를 바로 하고 머리를 뽑아냈다.
“반역자……. 죽인다…….”
“어서 가요!”
무하마드는 왼팔에 딸을 안고, 오른손으로는 셀리나의 손목을 잡은 채 후다닥 달려갔다. 그 뒤를 아이들이 헐레벌떡 따랐다.
“뭐 하는 거냐? 너희도 날 따라와라!”
무하마드의 호통에, 머뭇거리던 근위대 병사들도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아만도 빠져나갔을 테고, 이제 좀 마음 편히 싸우겠군.
일어서서 자세를 가다듬은 김태훈이 내게 말했다.
“저놈이 그거 맞지? 퀘스트.”
“응, 맞아.”
“에휴, 그럼 어쩔 수 없네.”
스응.
김태훈은 소울 블레이드, 귀혼을 소환하여 쥐었다.
나는 좀 의아해졌다.
김태훈은 천살의 특성을 가졌다. 늘 생명체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렇다 보니 전투를 회피하거나 꺼리는 법이 없다. 한데 이번에는 유독 내키지 않아 한다.
나도 성 미카엘의 창을 소환하여 들면서 말했다.
“왜 그러는 건데?”
“뭐가.”
“아니, 이번에는 왜 그렇게 몸 사리냐고.”
“득 될 게 없으니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더 묻지 못했다.
콰아아아아!
직후, 하산이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온 까닭이다.
아까처럼 투구의 뿔을 내민 호전적인 자세다. 저러고서 어떻게 저 속도로 달리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목표는 의외로 내가 아닌 김태훈이었다. 한번 찍은 목표만 끝까지 노리는 타입인가?
“흥, 단순한 놈.”
김태훈이 귀혼을 앞으로 겨눴다.
“어디, 네 발로 와서 들이받아 봐라. 꼬챙이에 꿰인 소머리 꼴이 되게 해줄 테니까.”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하산이 워리어와 흑마법사의 듀얼 클래스라는 것.
“형, 긴장해. 저놈 마법도 쓸 수 있어.”
“엥?”
그때,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하산이 수상쩍은 주문을 웅얼거렸다.
“후우우우…….”
그러자 하산의 몸에서 거무스름한 안개 같은 것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주변에 퍼졌다.
<주의! 적이 맹독 안개를 발동했습니다.>
눈앞에 경고 메시지가 떴다. 역시나, 세파시에서 흑마법사 클래스의 단골 마법인 맹독 안개다.
맹독 안개는 단숨에 큰 대미지를 입히진 못하지만, 야금야금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또한, 자신을 가려 방어 역할도 겸하므로 흑마법사들이 즐겨 사용한다. 바로 지금처럼.
“뭐야, 안 보이잖아!”
“말하다가 들이마시면 안 돼, 형. 저거 다 독이야.”
“흐업.”
나는 만일을 대비해, 해독 물약을 소환하여 김태훈에게 던졌다.
그가 물약을 받는 순간, 검은 안개를 뚫고 하산이 튀어나왔다.
나를 향해서.
“헛!”
아무리 금강불괴 스킬이 있다고 해도, 적이 강맹한 기세로 공격해오면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된다.
나는 성 미카엘의 창을 수평으로 세워 하산의 들이받기를 막았다.
쾅!
다음 순간, 두 발이 붕 뜨면서 눈앞에 불이 번쩍할 정도의 충격이 덮쳐왔다.
직접 겪어본 적은 없으나, 덤프트럭에 받히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충돌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뭔가가 등에 부딪히고 있었다.
“커헉.”
거기서 다시 튕겨 나와 엎어지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나중에 김태훈에게 들은 바로는, 내가 총알처럼 날아가서 학교 울타리를 부수고, 건너편의 건물을 뚫고 사라졌다고 했다.
수십 미터를 날아온 바람에, 일어나 앉았을 때는 나도 잠깐 어리둥절했다.
‘여기가 어디야?’
그러다, 정면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상황을 깨달았다.
얼마나 날아온 거지?
정말 무시무시한 괴력이다.
이런 힘과 속도에다가 흑마법까지 쓸 수 있다니. 역시 마신의 화신답다고 해야 하나.
더 무서운 점은, 하산이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모락스로서의 힘은 아직 쓰기도 전이라는 의미니까.
‘역시 무투파 마신…….’
참, 이럴 때가 아니지.
까딱하다가는 김태훈이 당한다.
나는 서둘러 어린이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내가 돌아왔을 때는, 역시나 하산이 김태훈의 한쪽 발목을 잡고 바닥에 연이어 패대기치는 중이었다.
쾅! 콰앙!
한 번 내리칠 때마다 공터가 점점 깊이 파였다. 처음에 들은 굉음의 정체가 바로 이거였다.
“쿨럭!”
김태훈이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나는 급한 김에,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창을 내던졌다.
내 쪽을 힐끗 본 하산의 기세가 돌변했다. 전투에의 흥분조차 없이 침잠해 있던 눈빛이 사납게 번득였다.
참고로, 하산의 투구는 눈 부위만 뚫린 풀헬름(머리 전체를 감싸는 형태의 투구)이었다.
하산은 김태훈을 팽개치고 위로 솟구쳐 올라 창을 피했다.
‘아깝다.’
나는 방금 성 미카엘의 창을 단순히 던지기만 한 게 아니다. 창에 붙은 고유 스킬을 써서 날린 것이지.
신성 번개.
창날에서 신성력을 품은 뇌전을 뿜어내는 공격으로, 특히 마족에게 효과가 탁월하다.
그것을 퍼지게 하는 대신, 창날 끝에 압축하여 뭉치게 했다.
맞았다면 하산도 제법 타격을 입었을 텐데.
아까 돌진해오던 도중 맹독 안개를 쓴 것도 그렇고, 김태훈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안개에서 나온 순간 내게 급선회한 것도 그렇고.
방금, 압축한 신성 번개를 알아보고 피한 데서 확실해졌다.
하산은 힘을 앞세우는 까닭에 우둔해 보이기 쉬우나, 실상은 교활한 여우 - 아니, 뱀이다.
하긴, 놈의 본체인 모락스도 그렇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대천사 가브리엘과 맞서 싸울 만큼 강하면서도, 루시퍼가 신임하는 참모이기도 하다.
강대한 소의 힘에, 뱀의 지혜를 가진 마신. 그것이 모락스다.
성 미카엘은 날아가다 말고 허공에서 사라졌다. 내가 인벤토리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 방향을 보던 하산이 내게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놈이 처음으로 내게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비밀.”
“?”
나는 답하는 동시에, 인벤토리로 보냈던 성 미카엘의 창을 다시 소환하여 재차 스킬을 발동했다.
사실, 원래 목적은 이거였거든.
고유 스킬, 성력 제압!
파지지직!
성 미카엘의 창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와 맹독 안개를 흩뜨렸다.
빛에 닿은 하산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큭……!”
됐다.
성력 제압은 신성력으로 악마의 기운을 억눌러 제압하고, 마족의 모든 능력치를 20% 감소시키는 강력한 스킬이다.
이걸로 하산 놈의 기세도 조금은 수그러들겠지.
하산이 성력 제압의 빛에 접촉하여 움찔하는 사이.
“하아, 내가 이래서 득 될 게 없다고 했는데.”
먼지 구덩이에서 뒹굴던 김태훈이 밑에서부터 하산을 공격했다.
온 힘을 다해 귀혼을 위로 찔러 올린 것이다.
“이 소 대가리 새끼, 죽어라!”
귀혼은 정확히 사각지대에서, 투구가 가려주지 못한 부위를 향해 날아왔다. 더구나 마침 하산이 약해진 순간.
타이밍도, 각도도 완벽했다.
우직! 귀혼은 하산의 턱을 뚫고 들어갔다.
투구까지 꿰뚫진 못했으나, 귀혼이 파고 들어간 깊이로 보아 머릿속까지 닿았을 듯했다.
그 증거로.
푸화악!
투구의 아랫부분과 눈구멍 등 뚫린 구멍을 통해,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헤헹, 맛이 어떠냐!”
김태훈이 의기양양하기도 잠시.
“내가 꼬챙이에 꿴 소 대가리로 만들어 준다고 했……. 윽?”
치이익.
하산의 피를 덮어쓴 그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으윽, 이거 뭐……. 아악!”
김태훈은 괴로운 듯 전신을 뒤틀었다. 드러난 피부가 부글부글 끓듯이 녹는 게 보인다.
그러는 사이에도 투구 아래로 피는 계속 쏟아져나왔다.
“내 눈!”
특히, 제일 먼저 직접 맞은 얼굴의 피해가 심했다.
김태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괴로워했다. 그 왼쪽 손등의 뼈가 드러났다.
“이런!”
설마, 피조차 맹독이었나?
블링크!
나는 김태훈의 바로 앞을 지정하여 블링크를 발동했다.
그전에 이미 방어구를 소환하여 착용한 뒤였다.
불카누스의 작업복.
용광로 앞에서 일해도 멀쩡할 정도의 화염 내성을 가졌는데, 동시에 대부분의 독에도 견딘다.
급한 김에 몸으로 김태훈을 가로막고, 양손에 각각 해독 물약과 치유 물약을 소환해 들었다.
그걸 한꺼번에 퍼부으려는 찰나.
쾅! 우직!
몸이 직각으로 꺾일 정도의 강렬한 충격이 나를 덮쳤다.
피를 쏟아내면서 멈춰 서 있던 것처럼 보이던 하산이, 내 옆구리를 뭔가로 후려친 것이다.
문제는, 그 공격이 금강불괴 스킬의 효과를 무시하고 들어왔다는 것.
“크윽?”
가뜩이나 불카누스의 작업복은 속성 내성에 반해, 물리 방어력 자체는 약한 편이었다.
단숨에 갈비뼈가 서너 대는 나간 것 같다.
휘청하는 내 어깨로 두 번째 공격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콰직!
나는 결국 한쪽 무릎을 꿇다시피 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왼팔이 축 늘어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뭐지?’
하산은 고개를 위로 쳐든 채, 한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길이는 약 1.5미터 정도.
손잡이 부분을 가죽끈으로 칭칭 감았고, 몸체에는 뭐인지 모를 검은 액체가 얼룩을 이뤘다.
나는 진실의 눈으로 하산이 든 무기의 정체를 확인했다.
<인신 공양의 클럽>
마신 모락스가 산 제물을 때려죽여 원혼이 깃들게 한 사악한 무기입니다.
타입 : 둔기
기능 : 힘 200 추가, 속도 200 추가, 지구력 1,500 추가.
내구도 : 30,000
소유주 : 마신 모락스
가치 : 뫼비우스 등급
고유 스킬 :
- 방어 관통
대상의 모든 방어구와 지구력, 실드 등의 방어 스킬을 무시합니다.
- 원혼의 저주
둔기에 깃든 아이들의 영혼이 맞은 대상에게 저주를 내려, 랜덤 디버프를 발동합니다.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