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14부 : 진짜 적은 누구인가 (5)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겨우 흐름이 바뀌었구만.’
갑작스러운 전령의 등장이라는 변수는 나에게는 호재다.
일단, 마신 모락스가 아무리 막 나간다고 해도, 제 수하가 보는 앞에서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힘 - 그러니까 마신의 능력을 쓸 수는 없다.
하산은 적국의 포로는 물론, 반란을 모의했다고는 하나 자국 백성의 아이들까지 학살했다.
본래 목적은 자신의 힘을 더 키우기 위한 제물이지만, 병사들에게는 그저 전투 후의 분풀이나 본보기 정도로 비치리라.
그런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롬 제국에 맞서는 최강의 무력인 까닭에 따르고 있다.
‘그 정도가 아슬아슬한 선이겠지.’
모락스도 그 사실을 알기에, 수용 가능한 한도에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을 테고.
한데 마치 인간 같지 않은 - 예를 들어, 아까 김태훈의 검이 턱을 관통했는데도 멀쩡한 것처럼 기이한 모습을 보인다면?
자칫 그 선을 넘을 수도 있다.
모락스를 향한 병사들의 공포와 의구심이 임계점을 돌파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폭동일 수도 있고, 실각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모락스에게는 썩 달갑지 않을 것이다.
과연, 수하를 본 모락스가 멈칫하더니 곤봉을 내게 겨눈 상태에서 말했다.
“무슨…… 일이냐. 역도와…… 전투 중이다…….”
“롬, 롬 제국이…….”
“롬 제국이…… 어쨌다는 거지?”
“롬 제국의 대군이 사막을 지나 행군해오고 있습니다!”
하산은 잠깐 어리둥절한 듯 보였다.
“그럴…… 리가…….”
“네?”
“아니, 아니다…….”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 키마리스와의 협의에 대한 말을 하려 했겠지.
아니, 그런데 무슨 일이지?
진짜 다크 스톤의 마력을 다 흡수하고, 판을 뒤엎으러 쳐들어오는 건가? 키마리스가?
‘그런 성향으로는 안 보였는데.’
모르지. 거대한 힘을 손에 넣으면 또 어떻게 변할지.
“즉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군을…… 소집하라. 또한…… 사막으로 정찰대를 보내…… 롬 제국군의 동향을…… 살펴라.”
“예, 대장!”
전령은 뒤돌아서 부리나케 달려갔다.
역시 루시퍼의 참모답게, 돌발사태임에도 대처가 제법 능숙하다.
그러고 보니 근위대장은 황궁을 지키는 일만 하는 거 아닌가?
전쟁이 나게 생기자 전령이 하산을 찾아온 것도 그렇고, 명령한 내용도 그렇고.
역시, 하산은 이 나라에서 근위대장 그 이상. 거의 군 통수권자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그래서 하산을 쓰러뜨리는 게 퀘스트가 된 거로군. 이자야말로 하크 제국의 무력, 그 자체다.’
그때, 하산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된 거로군…….”
응?
“반역자 무리가…… 학교에 있다는 투서가 들어와서…… 조사해 봤는데, 야만족 이방인들과 얽혀 있었다…….”
투서라. 그래서 발각된 건가.
아만은 그렇다 쳐도, 셀리나 선생이 완벽하게 위장하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실제로 내가 곁에서 겪기에도 그랬고. 철저하리만큼 언행을 조심하고 보안을 유지했다.
아무리 세상에 비밀은 없다지만, 어디서 새 나간 거야?
“네놈들…… 반역 집단과 손잡고…… 내부에서 제국을 어지럽힌다……. 그사이 롬 제국은…… 군대를 일으키고.”
음,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알아서 해석해 주니까 편하긴 하네.
어라, 잠깐.
그럼 직전까지는 반역 무리의 일원이었다가, 이제는 롬 제국의 스파이가 된 건가?
그렇다면, 출진을 앞둔 대장이 할 일은…….
“죽어라.”
코앞에 있는 내부의 화근을 정리하고 가는 거겠지?
콱!
아뿔싸. 눈치채고 피하려 하는데, 하산의 손이 먼저 뻗어와 내 팔을 잡았다.
부웅!
뒤이어, 반대편 손에 든 곤봉을 호쾌하게 휘두른다. 내 관자놀이를 향해.
“골리앗의 머리!”
급한 김에, 투구형 방어구 중에서 방어력이 제일 높은 아이템을 소환했다.
조금이나마 충격을 줄여주지 않을까 해서다. 손 놓고 머리가 터져 나갈 수는 없잖아!
그래도, 예감은 했다.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곤봉을 지닌 것만으로 모든 공격에 방어 관통 효과가 붙는데, 하물며 그 곤봉으로 직접 타격하고 있다.
난 아마 죽겠지.
이렇게 된 이상, 던전에서 죽어도 제발 리스타트가 발동하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미 죽음을 경험해봤으나, 닥치면 늘 두렵구나.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직후.
콰아앙!
바로 귓가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렸다.
이게 바로 내 뚝배기 깨지는 소리를 직접 듣는 기분인가?
한데 그런 것치고는 아무런 통증도, 감각도 없다.
살짝 눈을 떠 보니, 시커먼 벽 같은 게 내 머리 옆쪽을 가로막고 있었다.
곧, 등 뒤에서 불길하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뭐함둥. 죽으려고?”
“……태훈 형?”
뭐함둥? 둥이라고?
목소리는 맞는데 어째 말투가 영 이상하다.
김태훈이 내 뒤에 서서, 나를 감싸고 있었다.
한 쌍의 거대한 검은 날개로.
시커먼 벽인 줄 알았던 것은 김태훈의 등 뒤에서 돋아난 날개였다.
“클클, 그래, 나는 김태훈임둥. 다만, 다시 태어난 김태훈. 이제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음둥.”
“아니, 왜 자꾸 둥둥……. 그 날개는 또 뭐고? 스킬이야?”
내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김태훈이 나를 붙잡고 훌쩍 날아오른 것이다.
점프가 아니다. 말 그대로 날아올랐다.
나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하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헐……. 형, 날 수도 있어?”
“예전의 김태훈은 못 날았지만 지금의 김태훈은 날 수 있음둥, 후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자꾸 둥둥거리는 건 또 뭐…….”
나는 말하던 도중 깨달았다. 처음에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김태훈의 안에 오래전부터 깃들어 있던 존재.
“당신 설마…….”
“후후후, 저 소 대가리 놈. 꽤나 황당한 모양임둥.”
“할……파스?”
김태훈의 얼굴을 한 그것이,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마치 부리처럼 길고 날카로워진 이가 드러났다.
“안녕, 이정우. 나는 처음임둥?”
“김태훈의 의식이 사라진 틈에 몸을 차지했군요.”
“에헤이, 그렇게 말하지 말람둥. 그대로 두면 영혼이 육체에서 떠날 지경이었음둥. 그래서 내가 나와준 것임둥. 차지한 게 아니라.”
“피해요!”
나는 소스라쳐서 외쳤다. 할파스는 빙글 선회하며 공격을 피했다.
하산 - 아니, 모락스가 엄청난 기세로 팔매질을 한 것이다.
저자는 이미 하크 제국 근위대장 하산이 아니라 마신 모락스였다.
피융!
오싹한 소리와 함께, 어른 머리통만 한 돌이 아슬아슬하게 할파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할파스는 날개를 펄럭이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이 개 같은 소 대가리가! 감히 나한테 돌을 던져?”
개 같은 소라……. 뭔가 말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사실,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마구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태훈은 어떻게 되는 건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지.
이 순간, 나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그가 걱정되었다.
나는 그런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내가 아는 모락스에 대한 정보를 빠른 투로 알려주었다.
마신끼리 이미 알 만한 것 말고, 현재 모락스가 가진 무기와 롬 제국과의 역학관계 등.
연신 날아오는 돌을 피하면서 내 말을 듣던 할파스가 대꾸했다.
“그런데, 너…….”
“네?”
“숨 안 막힘둥? 내 팔로 네 피가 막 떨어지는둥.”
“아…… 케헥!”
맞다. 나, 죽기 직전이었지.
이건 치료 물약으로 될 일이 아니다.
나는 서둘러 최상급 엘릭서를 소환하여 들이켰다.
숨만 끊기지 않았다면 빈사 상태인 사람도 일으킬 수 있는, 최고의 회복제. 윤성이의 어머니를 치료했던 그 약이다.
피가 거꾸로 넘어와서 잘 삼켜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한 모금 넘겼다.
그러자마자 약이 닿은 목구멍에서부터 순식간에 몸이 나아가는 게 느껴졌다.
‘와, 대박! 이런 느낌이구나. 그나저나 진짜 죽을 뻔했네, 휴.’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더 높이 날아올라 나를 물끄러미 보던 할파스가 말했다.
“참 신기한 인간이긴 함둥, 너.”
“네? 무슨…….”
“아니, 나는 대개 잠들어 있지만, 가끔 김태훈과 연결될 때가 있음둥. 그럴 때 녀석을 통해서 너의 말을 듣고 널 볼 때가 있었음둥.”
“아, 네.”
“그때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음둥. 너도 알겠지만, 김태훈 이 녀석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안 여는 인간임둥. 그래서 내가 머물러 있기에 더 좋았음둥.”
“음…….”
“그런데 유독, 널 만날 때만 감정을 느끼고 동요……, 아잇, 저 빌어먹을 놈이!”
끝의 말은 또 돌을 던진 모락스에게 한 것이다.
이번에는 날개 끝을 날려버릴 정도로 아슬아슬했기 때문이다.
잠깐. 그런데 김태훈이 원래 아무에게도 마음을 안 열었다고?
난 할파스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 줄 알았는데, 타고난 거였나?
“저기, 그런데 할파스 님.”
“뭐임둥?”
“모락스한테 이길 수 있어요? 아시겠지만 모락스는 위계를 무시하는…….”
할파스는 내 말을 끊으며 버럭 소리 질렀다.
“날 뭐로 보고!”
그랬다가 금세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렇슴둥. 모락스 놈은 강함둥. 무려 왕의 지위이기도 함둥. 하지만 너라면 알지 않음둥? 내가 무엇을 관장하는 마신인지?”
“죽음과 파멸, 전쟁과…….”
“크흐흐.”
“검.”
“그렇슴둥.”
슉!
할파스의 오른손에 익숙한 검이 나타났다. 귀혼이다.
다만, 평소 김태훈이 소환했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귀기.
묵색 검신에 파르스름한 귀기가 어려 요사스럽게 빛났다.
“난 검의 마신임둥. 인간들이 즐겨 보는 거 뭐냐, 웹소설인가 하는 데 보면 소드 마스터라는 검에 통달한 존재가 있음둥. 내가 바로 마신계의 소드 마스터임둥!”
나는 바알의 검술이 더 뛰어나지 않느냐는 말을 참을 정도의 눈치는 있다.
무엇보다 지금은 할파스의 팔에 안겨서, 거의 20미터 상공에 떠 있는 상태다. 입조심 해야지, 암.
“웹소설은 또 어떻게 알았어요?”
“그야, 김태훈이 틈만 나면 봤음둥.”
의외다. 김태훈, 웹소설 마니아였구나……. 조금 친근해지네.
“게다가 이 오른팔을, 무려 신의 힘이 깃든 의수로 네가 바꿔주지 않았겠음둥? 이것도 네가 신기한 이유 중에 하나임둥. 이런 물건을 어디서 턱턱 꺼내는둥.”
“그건 비밀입니다.”
“흥, 가만 보면 너도 이 김태훈 놈만큼이나 비밀이 많슴둥. 이놈 안에는 나 말고도 뭐가 있음둥. 아주 거슬리고 답답한데, 몰아낼 수가 없음둥.”
“네?”
나는 그게 무슨 얘기인지 더 묻지 못했다.
검을 겨눈 할파스가, 엄청난 속도로 회전 하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와아아아악!”
“크흐흐, 김태훈식 초음속 어쩌고 할 때마다 우스꽝스러웠음둥. 이게 진짜 음속 검술임둥!”
아니, 나는 내려달라고!
귀혼의 검날 끝을 아래로 한 채, 검은 회오리가 된 할파스가 모락스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모락스도 지지 않고 관자놀이의 뿔을 기다랗게 늘렸다.
콰아앙!
타워형 던전의 2층에서, 인간에게 깃들었던 마신과 인간 행세를 하던 마신이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