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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179화 (179/303)

179화

14부 : 진짜 적은 누구인가 (7)

“방금 뭐라고 했어요?”

황당해서 되묻는 내게 레이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각에 이상이 생겼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 말이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러죠.”

“같은 말을 반복하는 무의미한 행위로 신뢰가 생긴다면, 얼마든 말해 드리죠.”

어깨를 으쓱한 레이저가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행동을 함께하기로 했어요. 정확히는 당신들을 돕겠다는 겁니다.”

“왜요?”

“마스터의 명령입니다.”

“마스터가 누군데요?”

“그건 말 못 해요.”

아깝다. 자연스러웠는데.

그나저나 이거, 믿어도 되는 걸까?

내 생각을 예상한 것처럼, 레이저가 예쁜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겠죠. 당신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돕겠다고 하니까.”

“뭐,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 내가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이 그릇과 당신이 지금 무사할 수 있을지.”

그건 그렇다. 레이저는 우리 파티 전체가 달려들었어도 결국 쓰러뜨리지 못하고 놓친 강자다.

더구나 지금은 약해진 할파스와 나, 둘뿐이고.

그런데 방금, 김태훈을 보고 그릇이라고 했지?

‘할파스가 안에 깃들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네.’

할파스가 고개를 들고 힘겹게 말했다.

“천족을…… 믿지 마람둥, 이정우…….”

“할파스, 아직 안 갔네요.”

“너무함둥…….”

레이저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어요. 나는 당신들을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니까.”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건가요?”

“그럴 거면 몰래 따라다녀도 마찬가지죠.”

“끙…….”

레이저의 말이 다 옳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까닭에, 자꾸 무리한 추측을 하는 것이다.

‘퀘스트 창도 아무 반응이 없고 말이지…….’

그러고 보면, 크래커와 관련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시스템에서 아무 반응이 없다.

의도야 어쨌든 간에 레이저가 강력한 전력인 것은 분명하다.

그냥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같이 다닐까?

‘그러면서 틈을 봐서 그 마스터라는 존재의 정체도 알아내고 말이지. 그래, 그래야겠다.’

가만히 나를 보던 레이저가 말했다.

“당신들은, 동료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던가요?”

“당연하죠. 왜요?”

“아니, 저 버……인간이 죽어가는 것 같은데 구경만 해서요.”

“헉!”

할파스는 모락스에게 명치를 제대로 맞았다. 그것도 방어 관통 옵션이 있는 모락스의 클럽으로.

명치가 움푹 파인 것이, 가슴뼈가 무너진 건 확실하고. 그 여파가 심장까지 미쳤을지도 모른다.

‘모락스와는 달리, 할파스의 몸은 김태훈 거라고!’

나는 부랴부랴 치유 물약을 꺼내 명치에 붓고 먹이기도 했다.

눈을 감은 채 물약을 꿀꺽꿀꺽 삼키던 할파스가 중얼거렸다.

“우웩, 끔찍한 맛이네.”

“태훈 형……?”

“응, 나다.”

어느새 할파스는 김태훈으로 돌아와 있었다.

“치사한 마신 놈이,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통제권을 내게 맡기고 숨어버렸어.”

“하하……. 고생했어, 형. 덕분에 살았네.”

“난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뭐.”

옆에서 레이저가 맞장구쳤다.

“그건 맞아요.”

……어쩐지 앞으로 저 여자의 화법 탓에 피곤해질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때, 비로소 파티원 가운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기사도 아닌 이혜림 순경이었다.

“헉, 헉. 이, 이정우 기사님!”

“순경님? 설마, 혼자 오신 거예요?”

나는 단번에 파티 쪽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내 부름에 늦은 걸 떠나서, 그들이 이혜림을 혼자 다니게 둘 리 없으니까.

“네, 크, 큰일이……. 휴.”

겨우 숨을 고른 이혜림이 말했다.

“큰일이 났지 말임다! 어마어마한 병력이 여관을 포위했슴다!”

“병력? 무슨 병력이요?”

“아만의 말로는 하크 제국 황실 근위대라고 합니다!”

“이런…….”

어쩐지, 학교를 포위한 병력이 적다고 했더니.

여기에는 근위대장과 지휘관이 직접 온 대신, 소수의 병력만 거느리고 온 모양이다.

그래도 의외다.

조은경 기사 혼자서도 상대했던 근위대를, 나머지 파티원 전체가 뚫어내지 못했다는 건가?

“그럼, 다른 파티원들은 근위대와 싸우느라 못 온 건가요?”

“아, 그럴 뻔했는데, 대치 중일 때 아만이 데려온 분이 막아서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음다!”

무하마드인가 모하메드인가 하던 지휘관이 제때 도착한 모양이다. 잘했군, 아만.

“아이들도 같이 갔죠?”

“넵! 그분이 아이들을 여럿 데리고 있어서……. 엇? 어떻게 아셨슴까?”

“싸우기 전에 정리됐는데 뭐가 큰일 났다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병력이 여관을 포위했다니까요?”

“아니, 안 싸웠다며?”

뭔가 얘기가 어긋나고 있다. 비로소 눈치챈 이혜림이 설명했다.

“여관을 포위한 것은 다른 병력임다! 지금 파티원과 근위대가 힘을 합쳐 그 병력과 싸우고 있슴다!”

다른 병력?

명치가 아물어 한숨 돌린 김태훈이 끼어들었다.

“그건가 보네. 롬 제국.”

“아.”

어쩐지 좀 전부터 미묘하게 공기가 수런거린다 했더니.

어린이 학교는 여관보다 더 도심 가운데, 북쪽에 있다. 롬 제국 병력이 여관에서 막혀 여기까지 진군해오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예상보다 진군 속도가 빠르네. 전령이 와서 알린 게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벌써 하크 제국 내로 진격해 오다니.

키마리스하고의 협상도 있고 하니 내가 롬 제국군과 싸울 이유는 없지만, 일단 여관으로 가야겠다.

“형, 이제 괜찮지?”

“엉, 입맛만 빼고.”

“레이저, 당신도 따라올 건가요?”

“당연히……. 그런데 제가 이름을 말했던가요?”

“자, 다들 얼른 가자.”

나는 김태훈, 이혜림, 레이저와 함께 아만의 여관을 향해 달렸다.

*

“어때, 자연스러웠지?”

마고의 말에, 그로써는 드물게 센시가 핀잔을 주었다.

“자연스럽기는 무슨. 시나리오가 실패했잖아!”

마신 강림 시나리오는, 하크 제국의 근위대장으로 위장한 채 살고 있던 마신 모락스가 정체를 드러내는 게 골자다.

이미 변이성 버그들의 강함은 이클립스도 인정했다. 그렇기에 모락스에게 금지된 해킹 아이템을 주고, 마신의 본체가 직접 온 수준으로 강화해 두었다.

또한, 시나리오 발동을 앞당기기 위하여 개연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투서의 형식으로, 마신의 화신이 변이성 버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손을 쓴 것이다.

실제로 시나리오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변이성 버그 가운데 하나가 덩달아 마신을 강림시키는 변수가 발생했지만, 작업해둔 모락스가 더 강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소멸한 줄 알았던 레이저가 나타났다. 그리고 변이성 버그들을 도와 모락스를 삭제해 버렸다.

“설명이 필요할 듯하네, 마고.”

서포터 영감이 평소처럼 온화한 어조가 아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레이저가 우리 일을 방해한 겐가?”

“……몰라.”

“뭐라고?”

“나도 모르겠어.”

“그게 말이 되나! 레이저는 크래커 중에서도 유독 충성스러운 존재일세. 벌써 자네를 수백 년이나 모셔온 크래커인데, 왜 그랬는지 자네가 모른다니?”

포르투나가 빈정대듯 덧붙였다.

“그러게. 누군가가 모른 척 뭔가를 지시한 거 아닌가?”

“……레이저가 소멸할 뻔했을 때.”

마고는 뭔가를 품에서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동전만 한 크기의 원형 버튼이었다.

“나와의 링크가 끊겼어.”

포르투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마고의 손바닥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았다.

“진짜 불이 안 들어오네. 링크가 끊어졌다고?”

“어. 다들 알다시피 레이저는 엄청난 재생력을 가졌어. 손가락 한 개만 남아 있어도 거기서 나머지 조직을 재생할 수 있지.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제법 강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야. 그 바람에 나와의 마인드 링크가 끊겨서…… 본능이 눈을 떴어.”

“본능이라면…….”

센시가 포르투나의 말을 이었다.

“이클립스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열망.”

“그래. 크래커 자체가 이클립스가 되려다 실패했거나, 기준에 미달하여 탈락한 존재들이니까. 크래커의 기원은 다들 알겠지?”

-아직 이클립스가 지금 같은 조직의 형태를 갖추기 전.

메타 휴먼들은 이미 복제 차원 증식 현상을 인지했다.

거기에 유희에의 열망이 더해져, 급기야 몰래 복제 차원으로 들어가 활개 치고 다니는 이들이 생겼다. 그런 메타 휴먼들을 일컬어 크래커라고 칭했다.

“당연히 알지.”

“우리와의 관계가 지금처럼 된 과정도 알아?”

“웅? 나는 그냥 링크 버튼을 받아서 페어라이트랑 이어진 건데. 과정까지는 모르지.”

서포터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알고 있네.”

크래커들은 저마다 탄생한 시기가 달랐다.

가장 오래된 크래커가 바로 레이저고, 두 번째가 코덱스다.

그렇다 보니, 이클립스들 또한 자신의 크래커와 맺어진 시기며 과정에 차이가 났다.

“마더 브레인의 통제를 벗어나 복제 차원으로 간 크래커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욕구를 마음껏 분출해댔지. 연애, 폭력, 살인, 정의 실현 등등.”

전뇌성이 아무리 자유로운 세상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엄연히 법규가 존재했다.

메타 휴먼들은 마더 브레인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각자의 욕망 자체는 크지 않았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켜켜이 쌓이자 무시 못 할 수준이 되었다.

그 정신 에너지가 축적되어 마더 브레인과의 링크를 방해할 정도로.

마더 브레인은 캡슐을 이용하여 메타 휴먼의 감정은 물론 생체 신호까지 제어한다.

그런 링크가 방해받자, 감정과 생체 신호에 혼란이 발생했다. 즉, 미치거나 죽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 그건 알아! 그게 전뇌 알츠하이머지?”

신나서 말하는 포르투나에게, 센시가 핀잔을 주었다.

“그것도 모르면 바보게?”

“…….”

그런 링크 노이즈 현상은 전뇌 알츠하이머라고 불리며 메타 휴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튼, 그때는 전뇌 알츠하이머가 나타나기 전이기는 하지만, 크래커들은 본능적인 괴로움을 느낀 거네. 몰래 복제 차원으로 가서 욕구를 풀 정도로.”

서포터의 말을 마고가 정정했다.

“몰래가 아니야.”

“응?”

“몰래 간 게 아니라고. 마더 브레인은 크래커들이 복제 차원을 넘나다니는 것을 알고 계셨어. 그러면서도 묵인해 주신 거야.”

포르투나가 의아하다는 듯 묻다가 스스로 답을 찾았다.

“왜? 아……. 노이즈, 그러니까 전자 아밀로이드 발생을 느껴서?”

“그렇지. 복제 차원에서의 욕구 분출이 당시에는 가장 좋은 치료법이었거든.”

처음에는 묵인했지만, 크래커들이 일으키는 트러블이 점차 잦아지면서 마더 브레인도 두고 볼 수만은 없게 되었다.

특히, 복제 차원을 소멸하는 게 아니라 ‘지키려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게 큰 문제였다.

이는 부작용을 넘어서서, 마더 브레인의 가장 중요한 권능인 통제력과 직접 연관되었다.

결국, 복제 차원을 넘나들어도 문제없을 만한 인원만 선별하여, 각자의 포지션을 정하고 유희 겸 정리 임무를 일임했다. 그렇게 선별된 5인이 바로 이클립스였다.

“이클립스가 되지 못한 크래커들은 강하게 반발했지. 복제 차원에 오래 있으면서 마더 브레인의 통제력도 약해진 상태여서 더더욱.”

“반발하면 뭐 어쩌려고…….”

“가벼운 일이 아니었어. 기존의 이클립스를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 그 김에 자신이 집착하는 복제 차원에 숨어 살려는 자, 마더 브레인의 명령을 무시하고 이전처럼 마음대로 복제 차원을 넘나들면서 유희를 즐기려는 자 등등 그 반발의 형태도 매우 다양했거든.”

이클립스 멤버들은 복제 차원과 함께 그런 크래커들도 정리했고, 능력이 아까운 일부는 굴복시켜 수하처럼 부렸다.

그렇게 수하가 되었을 때, 크래커가 어디에 있더라도 주인인 이클립스와 이어주기 위한 장치가 링크 버튼이었다.

마고는 그 링크가 끊겼다고 했다.

즉, 레이저가 멋대로 폭주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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