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15부 : 던전 과몰입증 (3)
센시는 서포터의 말에 짐작했다.
‘아직 모르는군.’
서포터는 변이성 버그 이정우의 정체에 대해 모른다고.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저렇게 가볍게 말하지 못한다.
‘그게 아니라면 고도의 의식체 제어로 엄청난 연기를 하고 있거나…….’
전 인류가 전뇌성의 주민이 되어 메타 휴먼화한 이후.
상대를 속이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직접 대면하지 않기에 속이기 쉬워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의식과 상대 사이의 장벽이 하나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즉, 생각과 생각이 직접 교차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예민한 사람은 표정이나 몸짓을 떠나서 의식의 ‘파동’ 그 자체를 느끼게 되었다.
거짓의 파동, 불안의 파동, 분노의 파동 등.
감정을 연기하기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상대가 내뿜는 파동을 통해 기분을 인지한다.
거기에 따르면 서포터에게서는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이정우를 다소 특이한 버그, 그 이상으로 안 본다는 것이다.
센시는 스키드 로우와의 감응을 통해 이정우의 실체를 파악했다.
‘이정우는 아마도, 회귀한 멀린의 바뀐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스키드 로우가 숨겨둔 권능인 ‘크랙 파이브, Children Of The Damned’로 손태준의 몸을 차지했을 때.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이정우의 의식체가 스키드 로우를 몰아내려고 손태준의 정신 안에 진입해 왔다.
본래 이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장악한 대상의 정신은 스키드 로우의 독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스키드 로우가 소멸당했고, 링크가 끊기기 직전 센시는 익숙한 파동을 감지했다.
바로 그의 옛친구이자 이클립스의 리더이며, ‘무한의 카발리어’라 불리는 현 카발리어.
아서의 기운이었다.
‘이정우가 위기에 처하자, 곁에 숨어 있던 아서가 나서서 스키드 로우를 제거한 거다. 아서라면 가능하지. 그게 아니면 버그를 도울 이유도 없고.’
만약, 이정우가 멀린이고 그 곁에 카발리어가 있다면.
또, 이정우가 던전 과몰입증에 의해, 타워형 던전 2계를 자신의 세상처럼 여기고 지키려고 든다면.
과연, 카발리어는 구경만 할까?
‘또 이정우를, 멀린을 돕겠지. 녀석에게는 멀린이 있는 세계가 곧 유일한 진짜 차원이니까.’
그러기 위해, 카발리어는 설령 그 장소가 복제 차원이라고 해도 개연성을 높여 실제 차원으로 만들 것이다.
원래 카발리어는 멀린이 회귀하여 달아나는 차원마다 소멸시켜 왔다.
멀린이 있을 곳을 사라지게 만들어, 함께 전뇌성으로 데리고 돌아가려는 생각인 듯했다.
‘녀석다운 발상이었지.’
그러나 이번에는 행동이 좀 달랐다. 예전의 카발리어라면 1,000번 복제 차원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한다.
한데 소멸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1,000번 차원의 개연성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이정우의 정체를 알자, 비로소 여러 가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째서 1,000번 복제 차원이 여태껏 건재하고 있는지.
어째서 이정우가 센시 자신이 만든 ‘세계 파멸 시뮬레이션’에서 얻은 권능을 쓰는지, 등등.
세계 파멸 시뮬레이션은 게임의 형태로 아서와 모드레드, 현재의 카발리어와 센시가 함께 만든 가상 차원이다.
거기서 얻은 능력과 아이템을, 카발리어가 멀린에게 이전했으리라.
그리고 멀린의 곁에 머무르면서 1,000번 복제 차원을 지키기 위하여, 메타 휴먼 파이오니어와 트레일 블레이저를 쓰러뜨리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고.
‘아서, 이 미친놈아. 아무리 복제 차원에서 소멸하면 의식체는 전뇌성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는다고.’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간접 죽음을 체험하기에 최소 한 달은 가수면 상태에 빠져 의식을 안정시켜야 한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마더 브레인에게 알려서 처벌받게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쨌거나 아서의 본체는 마더 브레인의 수중에 있으니까.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케이스 1. 아서가 마더 브레인의 소환에 응할 경우. 와서 처벌받고 - 상당한 엄벌이겠지만 - 언젠가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복귀하게 된다. 마고는 당연히 돌아온 아서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고. 설령 100년 동결형을 당해도 기다릴 거야.’
카발리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언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이 막막한 지금도 수십 년째 기다리는 그녀다.
하물며 돌아온 상태에서 기다리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메타 휴먼에게 시간은 무한하니까.
‘그럼 지금과 달라질 게 없어. 케이스 2. 카발리어가 소환에 불응……해도 문제다.’
이는 곧, 그가 본격적으로 마더 브레인의 통제를 벗어나 멀린과 함께 1,000번 차원에 남겠다는 뜻이다.
당연히 1,000번 차원을 지키려 할 테고.
이클립스 전원과 메타 휴먼을 총동원하면 못 이길 것도 없으나, 카발리어는 강하다.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무엇보다 불리해지면 그의 특기인 무한을 발동, 시간 끌기에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본체를 파괴하면 그거야말로 카발리어가 복제 차원에 남는 것 확정이고, 마고가 케이스 2에서 누구 편을 들지도 걱정…….’
결국,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센시 자신이 정한 케이스 3뿐이다.
‘현재로써는 카발리어의 거취를 아는 것은 나뿐인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리고 녀석이 멀린을 설득하든 강제로든 전뇌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1,000번 차원과 함께 놈의 의식체를 소멸시킨다!’
그거야말로 가장 깔끔하면서 유일한 방법.
배신자이자 연적인 카발리어를 없애는 동시에, 마고의 미련을 끊어내서 최소한 기회라도 만들고, 전뇌성의 안위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센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변이성 버그 무리가 분열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약해져 있을 때 2계에서 끝장낸다.’
다만, 마신 강림 시나리오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으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키마리스도, 모락스도 소환이 해제되었다. 남은 쿨타임은 해당 차원의 시간으로 대략 100년. 너무 길어.’
마침, 뭔가 오해한 1계의 세력이 2계를 침공해온 참이다.
두 마신이 나름대로 생태계를 만들어 뒀었는데 그게 무너진 여파다.
센시는 그 사태를 조금 건드려 보기로 했다.
*
로비에 도착하자, 최혜인과 손태준, 류경재 총경, 이혜림 순경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겁나 빠르네!
평소에는 온화하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는 최혜인의 성격 때문인 듯하다. 딱히 챙길 짐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여기서 전력이 나뉘면 큰 손해지만, 나는 반쯤 포기했다. 내 실언과 이기심 탓에 벌어진 일이니.
사과할 때는 확실하게 사과만 하자.
나는 최혜인과 손태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고인을 두고 함부로 실언했어요.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손태준이 먼저 말했다.
“난 됐다. 던전 과몰입 증상 초기에 일어나는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단, 바로 떠나야 한다는 의견은 지금도 변함없다.”
뒤를 이어, 최혜인도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도 이정우 기사님의 평소 모습으로 보아,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일단 큰불은 껐다.
설령 팀이 나뉘더라도 불화한 상태에서 헤어지는 일만은 막아야 하니까.
‘이제 설득을 좀 해야겠네.’
혹시나 해서, 남은 손가락에 미리 ‘비너스의 반지’를 끼고 왔다.
액세서리 - 반지 타입의 레전더리 등급 아이템으로, 착용자의 매력을 높여주고 지능 수치를 올려주며 ‘매혹’이라는 고유 스킬이 붙어 있다.
전투에는 큰 도움이 안 되어서 마법사 계열 유저들 외에는 별로 인기가 없는 아이템이다.
매혹 스킬을 쓸 생각은 일절 없었다. 사과조차 안 받아줘서 얘기할 기회가 없을까 봐 보험 삼아 끼고 온 것이다.
‘그건 인베이더를 쓰러뜨릴 때나 통하지, 기사에게는 일시적일 뿐이야.’
지성과 정신력이 높은 대상에게 매혹을 썼다가는, 나중에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악감정을 품게 된다.
실제로 세파시 게임에서도, 남성으로 추정되는 ‘겜날두’라는 유저가 매혹 스킬을 써서 여성 NPC를 농락한 적이 있었다.
대상은 펍의 주인인 세라라는 NPC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NPC에게도 매혹 스킬이 통하는지 시험해보려던 것이다.
그러다 몽롱해진 여성 세라를 보고 나쁜 마음을 먹은 게 발단이었다.
NPC라고는 해도 게임 속에서는 실제 인간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생생했을뿐더러, 세라는 설정상 엄청난 미인이었다.
무한에 가까운 자유도를 자랑하는 세파시 게임답게, 몹쓸 짓까지 구현해버린 것이다.
-뭐야, 이거. 실화냐?
-이 게임은 규제도 안 받음?
-지금 서버에 있는 님들, 빨리 아이언 시티 광장 펍으로 오셈. 재미난 일 벌어지려고 하니까.
유저들은 이런 대사를 날려대면서, 문제의 유저 겜날두가 벌이는 행위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심 매혹 스킬을 배우거나 매혹 스킬이 붙은 아이템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중에는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었으나 모두 방관했다. 어차피 상대가 진짜 인간도 아닌 NPC인데 괜히 다른 유저와 시비 붙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게임 캐릭터를 괴롭히느냐며 따지는 것도 애매하다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겜날두는 랭킹도 제법 높았다.
대신, 눈치 빠른 이들은 매혹 스킬과 관련된 아이템을 시세보다 몇 배 비싼 값에 경매장에 올렸고, 그런데도 불티나게 팔렸다. 적어도 이틀간은 그랬다.
하지만 그 일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 상황은 급변했다.
세라가 용병 NPC 둘과 함께,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겜날두를 찾아가서 도륙내 버린 것이다.
세라는 세파시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의 번화가 펍 주인인 만큼, 유저들뿐만 아니라 무수한 NPC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런 NPC들 가운데, 게임 시스템상 어지간한 유저도 설설 기는 존재가 몇 있었다. 세라가 데려온 두 용병이 그런 존재였다.
일명 타이거 브라더스.
한국 유저들이 ‘호랑이 형제’라 부르는, 산군과 맹호라는 형제 용병이다.
두 NPC는 세라가 유저에게 당한 일을 듣고 격노했고, 인공지능의 자의로 겜날두를 단죄했다.
더구나 겜날두는, 어째서인지 시스템에 의해 감각 수치가 강제 최고치로 설정되어 있었다.
몹쓸 행동의 대가로 받은 일종의 페널티다.
그 탓에, 겜날두는 괴력의 산군이 자신의 사지를 뜯어내고, 나이프의 명수인 맹호가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는 감각을 생생히 맛봐야 했다.
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게임 캐릭터인 겜날두였으나 고통은 겜날두의 플레이어 본인이 고스란히 느꼈으므로, 절규가 보이스 채팅창을 가득 채울 지경이었다.
그 후 겜날두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쇼크로 미쳤다거나 자살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갑자기 옛날 일이 왕창 떠올라버렸군. 그만큼 센세이셔널했던 사건이라.’
어쨌든 결론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매혹 스킬을 남용하면 안 된다는 거다.
나는 진심을 담아서 최혜인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