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15부 : 던전 과몰입증 (5)
나는 레이저와 함께 어린이 학교를 향해 달렸다. 도중에 블링크도 적당히 섞어 썼다.
레이저는 블링크를 보고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섹터 블링크’를 발동하여 따라붙었을 뿐이다.
‘의외로 같이 다니기에 편한데?’
레이저에게는 특별히 뭔가 숨기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어차피 타워 밖까지 이어질 인연도 아니고, 레이저의 관심사는 오직 나였으므로 다른 파티원들과는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
게다가 -
“모노 와이어.”
무력은 최강!
어린이 학교를 감시하고 있던 병사 네 명을 다짜고짜 썰어버렸다.
병사들은 검을 뽑기도 전에 허리를 절단당해 나뒹굴었다.
“저기, 그래도 대화라도 좀 하고…….”
“우리를 보자마자 적의의 파동을 발하는 게 느껴졌어요. 굳이 불필요한 대화를 하면서 시간 낭비할 이유가 있나요?”
뭐? 무슨 파동?
살기 같은 건가.
“무슨 감정 같은 거 안 느껴져요? 이렇게 사람을 죽일 때? 거리낌이라거나, 죄책감이라거나?”
내 물음에, 레이저는 몹시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저들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요. 말하자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별 차이가 안 난다는 거죠.”
“허…….”
무섭다.
이건, 인베이더로 취급하는 것보다 더하다. 숫제 길가의 돌멩이와 동급이라니.
‘이건 설명해서 될 일이 아니네. 근본적인 가치관 차이랄까.’
하긴, 애초에 이 크래커라는 존재들의 정체도 정확히 모르니.
나는 더 말하지 않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하산의 부관이 자기 딸과 마야를 포함한 아이들을 모두 대피시키는 걸 확인했다.
내가 학교로 온 까닭은 셀리나 선생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부관이 체포하는 건 봤는데, 그 뒤에 끌고 가지 못했으니. 학교 어디엔가 숨어 있을 것 같단 말이야.’
학교에는 모이트란의 군자금도 숨겨져 있다.
셀리나는 그것 때문에라도 버티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개인의 돈이 아니라, 조직의 목숨줄이나 마찬가지인 돈이라서.
늘 웃고 온화해 보이지만, 모이트란 같은 지하 세력을 십 년 가까이 운영한다는 건 보통 독기로는 안 되잖아.
‘병사들이 포위한 걸로 봐서는 확실히 뭔가 있는 모양인데.’
문제는, 군자금을 숨긴 장소를 나에게까지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와 레이저는 학교 복도와 교실에서도 하크 제국군 병사와 몇 번 마주쳤다.
2인 1조로 돌아다니는 모양새가, 우리처럼 교내를 수색하는 듯했다.
‘역시 셀리나 선생을 찾고 있는 게 분명해. 어떤 면에서는 아만보다 그녀가 더 모이트란의 핵심 인물이니까. 아니면 은폐한 자금을 찾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럴 때마다 레이저가 끔살해 버리는 바람에 뭘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결국, 세 번째에는 내가 참다못해 성질을 냈다.
“아 거참, 족족 죽여버리지 좀 말라니까요! 하다못해 정보라도 좀 캐내고…….”
“어차피 저들에게서는 유의미한 정보를 얻기 어려워요. 괜히 우리 행보만 알려질 우려가 있습니다.”
“에휴, 말을 말자.”
“좋은 생각이에요.”
교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급하게 나간 분위기가 역력했다.
책상과 의자는 넘어져 있고, 책장의 책도 여기저기 빠져 있다.
‘잠깐, 책이 빠져?’
뭔가 뒤지거나 서둘러 나가다 보면 책상이나 의자는 넘어뜨릴 수도 있지만, 책이 빠지는 건 이상하다.
그것도 모조리 빼낸 것도 아니라 군데군데만. 마치, 정해진 공식처럼.
아니나 다를까.
내가 책장을 유심히 살피자, 덩달아 살펴보던 레이저가 말했다.
“여기에 움직인 흔적이 있어요.”
책장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는 드문 일이다. 내 힘도 이미 보통 사람의 수십 배를 훨씬 넘어선다.
책장을 슬쩍 밀어본 레이저가 말했다.
“무게가 상당해요. 이 세계 인간들의 힘으로, 백 명이 밀어도 꿈쩍도 안 하겠네요. 겉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책장 전체가 철로 되어 있어요.”
“레이저한테도 무리예요?”
“날 뭐로 보고. 한 손가락으로도 가뿐하죠. 다만, 힘으로 억지로 움직였다가는 책장이 분해되면서 책과 함께 장애물이 되는 구조 같아요. 만약 은신처가 있다면 거기까지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고요.”
“아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책들을 모아서 다시 원래 자리에 꽂았다.
그런 다음 책장을 밀자, 육중한 책장이 천천히 회전하며 움직였다. 그 뒤편에서 작은 철문이 나타났다.
“책 자체가 스위치였군요. 책을 빼내거나 꽂을 때마다 움직일 수 있는.”
레이저는 조금 감탄한 기색이었다. 이 정도면 병사들이 못 찾았을 법도 하다.
나름대로 철저한 방비를 한 거로 보였다. 하산이 직접 나섰다면 또 모르겠지만.
철문을 열자, 아래로 이어지는 좁고 깊은 계단이 드러났다.
나와 레이저는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그렇게, 계단이 거의 끝날 무렵.
“더 다가오면 미간에 바람구멍을 뚫어드리죠.”
차분하지만 위협적인,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주변이 어두웠으나 내게는 셀리나 선생의 모습이 잘 보였다. 초인적인 감각 덕이다.
“셀리나 선생님!”
“……이정우 씨?”
“네, 접니다. 안심하세요.”
셀리나는 활을 겨눈 채였다. 그녀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말했다.
“같이 있는 사람은요?”
“괜찮아요. 제 동료입니다.”
“아, 다행…….”
말하던 셀리나가 풀썩 주저앉았다. 나는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선생님! 어디 다치셨어요?”
허리를 부축한 내 왼손에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베인 상처. 검인가?’
나는 곧바로 치유 물약을 소환하여 셀리나의 옆구리에 부었다.
“윽…….”
셀리나는 나직이 신음하며 눈을 떴다.
“정우 씨…….”
“네, 접니다. 여긴 어쩌다 다쳤어요?”
“병사들에게 붙잡혀서 빠져나오다가…….”
레이저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당신, 아공간을 쓸 수 있군요?”
“뭘 새삼……. 아.”
그러고 보니 내 아공간, 즉 인벤토리는 다른 기사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나이트 기어만을 수납하고 소환할 수 있을 뿐이지만, 나는 온갖 아이템을 넣었다 뺐다 한다.
“뭐, 내 능력이 그런 종류여서요.”
“흐음, 확실히 특이해요.”
레이저는 거기서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셀리나의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다. 셀리나가 신기하다는 듯 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빨리 낫는 약은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 온 이국의 물품인가요?”
“네, 뭐……. 마법과 연관된 거죠.”
“마법이요?”
셀리나는 쿡 하고 웃었다.
“이런 상황에 농담도 잘하시네요.”
어라, 가만. 하크 제국에는 마법이 없던가?
‘여긴 마법이 없는 세계관이구나. 왜 당연히 마법을 쓸 거로 생각했지?’
어쩌면 그래서 조은경 기사가 더 맹위를 떨쳤는지도 모르겠다.
기사들의 스킬과 세파시의 마법은 상충하는 부분이 있어서, 스킬로 마법을 막거나 마법으로 스킬을 파훼하는 일이 가능하다.
마법사가 없다면 조은경 기사의 스킬이 더 강하게 느껴졌겠지.
쌩 무력으로만 상대했으니 부대 몇 개가 덤벼도 감당하기 버거웠을밖에.
“일단 나가요, 선생님.”
“지금은 이 비밀 은신처가 제일 안전해요.”
“그렇다고 계속 숨어 있을 수는 없잖아요.”
“여기서 보름 정도는 버틸 수 있어요. 비상시에 대비해서 물과 식량을 비축해뒀거든요.”
“그 후에는요?”
“그건……. 설마 그때까지 우리를 찾아다닐까요?”
말하는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선생님. 혹시, 롬 제국이 쳐들어온 건 아세요?”
“롬 제국이요? 아, 얼핏 듣긴 했어요. 전령이 비상사태 어쩌고 하면서. 하지만, 그쪽과 싸우는 건 평소에도 늘 있는 일이라…….”
“그 정도가 아니라, 대군을 일으켜서 본격적으로 침공해 왔어요. 그 오호장인가 뭔가 하는 자들이 직접 지휘해서요.”
“네? 오호장이 직접?”
셀리나 선생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리고……. 제가 그 뒤에 하산을 쓰러뜨렸고요.”
“하산을? 그때 확실히 죽은 거예요?”
“네. 확실히 죽었어요. 이제 하산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설마 했는데…….”
반색하던 셀리나의 표정이 금세 또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지금 하크 제국에는 롬 제국의 침공을 막아낼 마땅한 무장이 없어요.”
“맞아요. 그런 것 같더군요.”
“……있을 때는 악마가 따로 없더니, 죽고 나니까 아쉬울 일이 다 있네요.”
“아무래도 하크 제국과 롬 제국은 언뜻 보기에는 으르렁대는 사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암묵적으로 불가침을 지켜온 게 아닌가 싶은데요.”
“맞아요. 그런 사이였죠. 하크 제국은 아마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받았을 거예요. 마침, 모이트란 잡겠다고 하산까지 나선 참이었으니까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공교롭군요.”
듣고 보니 나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롬 제국 황제를 시해한 범인을 하크 제국에서 보냈다고 생각하는 자체는 가능한 일이기는 한데.
총공격이 이뤄진 타이밍이 지나치게 정확하다.
“음……. 아무튼, 그런 연유로 하크 제국은 곧 위태로워질 겁니다. 전시이니만큼 반란 혐의를 받는 이들을 즉결처분할 가능성도 매우 크고요.”
“우린 양쪽에서 쫓기는 처지가 됐네요.”
셀리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이대로 있다가는 하크 제국 병사에게 잡히든, 롬 제국군에게 잡히든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님과 아만 씨는요.”
“그래서 어쩌자는 말씀이죠?”
“피하세요.”
“네?”
나를 물끄러미 보던 셀리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피해요? 어디로……. 사막으로요? 아니면 롬 제국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요.”
“완전히, 다른 세상이요……?”
셀리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셀리나 선생과 아만, 마야 등을 3층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단, 3층까지만.’
1층과 2층에서의 경험으로 보건대, 3층도 어떤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나라로 이뤄져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거기서도 검은 마력석 - 그러니까 다크 스톤이 높은 가치의 자산으로 다뤄질 확률 또한.
‘타워 전체가 던전이라면, 인베이더들이 장악한 공간일 테고. 그렇다면 인베이더의 힘의 바탕인 검은 마력이 핵심 에너지일 테지.’
어째서 하크 제국에는 마법이 통용되지 않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곳에서조차 다크 스톤은 귀하게 취급하고 있잖은가.
나는 3층에서 아만과 셀리나 일행이 정착할 수 있도록, 다크 스톤을 넉넉하게 주고 갈 생각이다.
아만의 무력과 셀리나의 머리에, 내가 준 자금까지 있다면.
어지간한 곳에서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하미르도 둘의 곁에 두고 갈 것이다.
‘그게 맞아.’
손태준과 김태훈이 하는 말로 미뤄보아, 하미르를 던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가는 실험체가 되기에 십상이다.
과연, 그게 조은경 기사가 원한 일일까?
설령 그녀가 정말 던전 과몰입증에 걸렸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