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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192화 (192/303)

192화

15부 : 던전 과몰입증 (10)

공터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뜻밖에도 아만이었다.

“어이, 건물주 아저씨. 살아 있었네? 롬 제국이 쳐들어와서 난리가 났는데.”

아직 그와 있었던 일을 모르는 김태훈의 인사에, 아만은 어색하게 답했다.

“아, 네…….”

아만을 본 하미르가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겼다.

“아빠!”

“오, 그래. 하미르, 무사했구나.”

셀리나 선생이 아만을 노려보았다.

“당신,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온 거죠? 혹시 또 누구를 데려왔나요?”

그녀는 분노한 와중에도 하미르를 생각해서 말을 가렸다. 참스승이네, 참스승.

아만은 지치고 초췌한 모습으로 답했다.

“그게 아닙니다, 셀리나…….”

“뭐가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아까는…… 제 의도가 아니었어요. 원래는 ‘지갑’을 가지러 가려고 했습니다. 롬의 군대에 빼앗길까봐……. 그런데 노란 머리가 따라붙은 겁니다. 당신이 거기로 돌아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지갑’이란 모이트란의 비밀 자금을 가리키는 은어다. 노란 머리는 롬 제국인의 별칭이고.

그러니까, 일부러 롬 제국군을 안내한 게 아니라는 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셀리나는 차갑게 코웃음 쳤다. 나도 믿기 어려운데 셀리나야 오죽하겠나.

그나저나 늘 온화한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단단히 분노한 것 같다.

하긴, 그나마 셀리나니까 저 정도 반응이지.

이진욱이었다면 보자마자 목을 날려버렸을지도. 동료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을 못 참는 자였으니까.

“아빠, 교장 선생님하고 싸우는 거예요?”

“그게 아니란다, 하미르. 선생님, 잠깐 저쪽으로 가서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눈이 동그래진 하미르를 의식한 아만이 제안했다.

“……이정우 씨가 제 옆에 있어도 괜찮다면요.”

아만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단둘이 있기에는 불안할 만큼, 불신이 생겼다는 뜻이니까.

“그 자리에 정우 씨도 있었으니 상관없습니다.”

“정우 씨, 부탁드릴게요.”

“그래요. 저도 궁금하네요.”

“하미르, 여기 있으렴. 아빠는 선생님하고 의논 좀 할 테니까.”

“네…….”

나와 셀리나, 아만이 공터 구석으로 향하자, 레이저도 당연하다는 듯 내게 따라붙었다.

“넌 왜 와요?”

“당신한테 붙어 있어야 하니까요.”

“뭐 얼마나 멀다고…….”

아만이 손을 내저었다.

“그때, 지하에 있던 분이군요. 괜찮습니다.”

아이들한테서 어느 정도 떨어지자, 아만이 입을 열었다.

“제가 롬 제국과 비밀리에 내통해온 건 사실입니다.”

“아만, 당신!”

“어쩔 수 없었어요. 하산의 무력과 정보력이 너무 압도적이라, 모든 계획의 장애물이었잖아요. 어떤 수를 써봐도, 결국 하산 때문에 실패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셀리나,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게 귀띔이라도 해줬어야죠!”

“처음부터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갑작스럽게 접촉하게 된 지라…….”

갑작스럽게?

마음에 걸리는 소리가 나왔으나, 일단 잠자코 들었다. 아만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제가 노린 것은, 롬의 무력을 이용하여 하산을 제거하는 거였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롬의 황제가 죽을 줄은, 더구나 그 일로 인해 침공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정말입니다.”

“하산을 제거하고 하크 황실을 정리한 다음, 당신이 황제가 되려던 건요?”

“그건…….”

잠깐 말문이 막혔던 아만이 입을 열었다.

“네.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게 제일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만. 그래서야 하크 황실과 다를 게 뭔가요?”

“다르죠. 완전히 다릅니다. 황실의 폭정을 쭉 봐온 제가 황제가 되고…….”

아만은 비로소 셀리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셀리나, 당신이 재상이 되어준다면.”

“……!”

“그래서 제가 실정하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준다면, 하크 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로 거듭날 거라고 확신했어요.”

“아만……. 그건 당신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에요.”

답하는 셀리나는 이제 분노가 아니라 슬퍼 보였다. 길게 하품한 레이저가 끼어들었다.

“무의미한 대화가 길어지네요.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요?”

레이저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아만이 나와 셀리나에게 말했다.

“정우 씨.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거죠?”

정확히는 그게 아니지만, 설명해줄 이유도 없어서 적당히 답했다.

“뭐, 아마도요?”

“제가 탈출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셀리나와 하미르를 데리고 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음…….”

셀리나는 놀라서 아만을 보았다.

“아만, 진심이에요? 왜 하미르만 보내려는 거죠?”

“하미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닌 거, 셀리나도 알잖아요. 여기에 남아 있다가는 분명 롬의 놈들이 눈독 들일 겁니다. 그래서 운 좋으면 롬의 군인으로 키워지고, 잘못되면 싹을 자르려고 들 수도 있겠죠.”

“음…….”

아만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당장 우리 파티원들조차도 하미르를 데려가서 검사해보려고 했으니까.

거기에는 조은경 기사의 자식이라는 점도 한몫했지만.

롬이 무를 숭상하는 풍조가 있다면, 더욱 하미르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아만, 당신이 보호하면 되잖아요. 이제 협력한 대가로 부귀영화를 보장받을 테니까요.”

“그게 아닙니다.”

아만은 씁쓸하게 대꾸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내가 원한 건, 딱 하산을 없애는 것까지였다고. 롬은 자국 황제의 죽음을 빌미로, 하크를 통째 삼키려고 합니다. 여태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 제국을 통일하려는 거죠.”

“제국 통일…….”

되뇌는 셀리나를 보자니, 확실히 이 세계가 갇혀 있었음이 느껴진다.

우리 세계에서야 뭐, 역사적으로 힘을 좀 얻었다 하면 대륙을 통일하려던 나라가 수두룩했으니.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소위 난세를 겪었다 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통일로 평정하려는 세력이 나왔다.

이 세계는 대체 언제부터 롬과 하크 제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던 걸까?

키마리스도 하산도 그 실체는 마신이니 수명이 무한하다. 적당히 이름을 바꾸거나 신적인 존재로 자기를 포장하면서, 두 제국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여 꿀을 빨아왔다.

‘마신들이 사라지자마자 누군가가 그 구도를 깨려는 거군. 아마도, 롬 제국에 속한 어떤 특출한 인물이…….’

새로 롬의 황제가 되었다는 자는 누군지 모르겠으나, 어쩐지 코넬리아라는 이름이 자꾸 떠올랐다.

아만을 통한 하크 제국 내부 사정의 정탐.

영원불멸일 것 같던 키마리스 황제의 죽음이라는 위기.

이런 것들을 기회로 바꾼 거다.

이 세계에 오직 하나의 제국만이 존재하게 할 기회로.

“그렇게 해서 롬 제국이라는 나라만이 남게 되면, 아마 저도 숙청될 겁니다. 한 번 배신한 자는 결국 또 배신한다고 여길 테니까요.”

“…….”

“단, 그전까지 다른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지킬게요. 그러니까 셀리나, 당신과 하미르는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합니다.”

반 황실 세력의 두뇌이자, 아만이 제국의 재상감으로 여겼을 만큼 출중한 지력의 소유자인 셀리나.

이제 전설처럼 된 ‘신의 힘’을 가진 기사의 아들이자, 그녀의 능력을 물려받은 하미르.

아만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이 두 사람이 무사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고뇌에 빠진 셀리나를 뒤로 하고, 아만이 내게 말했다.

“그리고 정우 씨,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무슨 약속이요?”

“우리 일을 끝까지 도와주면, 은경의 유품을 돌려드리기로 했잖아요.”

“아……. 하지만, 모이트란의 목적은 달성하지도 못했는데요.”

“어떤 면에서는 달성한 거라고 할 수 있죠. 결국 하크 제국이 무너지게 되었으니까요.”

자조적으로 웃은 아만이, 조은경의 나이트 기어이자 조직의 이름이었던 메이스 - 모이트란을 소환했다.

허공의 틈새로 비운의 나이트 기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받아 가십시오.”

“음…….”

진실의 눈으로 확인해 보니, 확실히 레전더리 등급의 나이트 기어가 맞다.

이걸 받는 순간, 나는 셀리나와 하미르를 무사히 하크 제국 밖으로 - 정확하게는 3층으로 데려갈 의무가 생긴다.

아만이 약속을 지켰듯, 나도 다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할 테니까.

내가 잠깐 주저하는 사이, 아만이 입안으로 뭔가를 나직이 읊조렸다. 아마, 모이트란의 소유권을 내게 양도한 것이리라.

직후, 아만은 십 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외모가 변했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근육도 사라져, 마르고 빈약한 몸이 되었다.

‘모이트란과의 계약을 통해서 마력을 주입받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하긴, 기사도 아닌 그가 나이트 기어를 그냥 소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은경이 죽으면서 뭔가 특별한 방법을 쓴 게 분명하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아들을 부탁하기 위해서.

‘조은경 기사. 당신……. 어떤 면에서는 참 잔인한 사람이었네.’

또한, 던전 증후군 환자였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죽은 뒤까지 자식을 걱정할 만큼.

“아만!”

변하는 아만의 모습에 당황하여 외치는 셀리나를 향해.

아만은 처연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이게 내가 그 사람과 한 약속이었어요, 셀리나. 하미르를 끝까지 무사하도록 지켜주겠다고. 그리고 적당한 때가 오면, 그녀의 증표를 하미르의 보호자에게 넘겨주겠노라고…….”

“아만……. 당신, 왜 그렇게 멍청해요?”

셀리나는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이거, 여기서 거절하면 인쓰 되겠는데?’

스스로 그런 핑계를 댔으나, 사실 내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차피 셀리나와 마야, 하미르를 구하고 싶어서 오늘 하루라는 시간을 얻었고.

모이트란을 회수해가려던 것도 사실이니.

나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듯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이트란의 손잡이를 쥐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모이트란을 받아 가도록 하죠. 대신, 셀리나 선생님과 하미르가 안전한 장소에 도착하면, 이건 하미르에게 넘겨줄게요. 하미르가 제일 잘 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잠깐 커졌던 아만의 눈이 곧 축축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쭉 지켜보고 있던 레이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비효율적인 버그네.”

“뭐가요…….”

“이러니까 게이트에 부하가 걸리는, 예정에 없던 시나리오가 계속 생겨나는 거잖아요.”

“네, 네. 뭔지는 몰라도 내가 잘못했네요.”

내게 모이트란을 넘겨준 아만이 하미르에게 다가갔다. 하미르는 갑자기 늙고 쇠약해진 아버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빠! 왜 갑자기 할아버지가 됐어요?”

하미르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허허, 아만. 이게 아빠가 원래 가졌어야 할 모습이란다.”

어, 그러고 보니 아만의 실제 나이는 꽤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전 세대의 대장 격인 조은경 기사의 연인이었으며, 열두 살인 하미르의 아버지이기도 하니까.

새파란 애송이가 부관 자리에 앉기는 어려웠을 테니, 서른 살 정도에 조은경 기사와 만났다고 가정하더라도 마흔이 넘었다.

나는 파티원들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해서, 이렇게 됐어.”

그사이 아만은 고개를 내젓고 훌쩍거리는 하미르와 마야에게 뭔가 열심히 말하고 설득했다.

때로는 아들을 가볍게 안거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목소리가 조금 커지기도 했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파티원 누구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게 부자가 마지막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마침내 아만이 하미르의 손을 잡고 우리에게 왔다.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순간, 새로운 퀘스트창이 나타났다.

이거였군.

다음 층으로 가는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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