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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197화 (197/303)

197화

16부 : 다음 층을 향하여 (5)

이거, 오해하겠네. 안 그래도 나를 보는 일행의 눈빛이 점점 묘해지고 있는데.

‘특히 최혜인이.’

나는 애써 그레모리의 얼굴을 밀어냈다.

“아, 고맙지만 그건 됐고요.”

“꺄악, 고맙대!! 귀여워…….”

아마 이 그레모리는 내가 욕을 박아도 귀엽다고 할 것이다.

이거, 오랜만에 맛보니까 느낌이 또 새롭네.

“휴……. 지금 저와 일행이 포위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해주세요. 그게 이번 소환의 소원이에요.”

“그래? 알았어.”

경쾌하게 답한 그레모리가 롬 제국군을 둘러보았다.

“저것들 다 없애버리면 되지?”

“……꼭 죽여야 하나요?”

“그건 아닌데.”

말하던 그레모리가 별안간 소매를 휘둘러서 뭔가를 쳐냈다. 날아온 것은 거대한 도끼였다.

튕겨 나온 도끼가 풍차처럼 회전하며 김태훈과 가르바를 스치고 지나가, 운 나쁜 롬 제국군 병사를 쪼개고 지나갔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 병사 여섯을 줄줄이 쓰러뜨렸다.

도끼를 던진 자는 바로 후군을 이끌고 온 마르쿠스였다.

왼쪽 눈을 지나 대각선으로 오른쪽 턱까지, 하록 선장 같은 긴 흉터가 있는 살벌한 인상의 사내다.

위력 미쳤네. 던진 사람이 센 건지, 쳐낸 사람이 센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몰라도.

그레모리는 도끼가 날아온 방향을 보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내가 기억해뒀다. 이따가 사지가 찢어질 줄 알아.”

내용은 별로 간드럽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고서도, 마르쿠스로 짐작되는 장수는 함부로 더 덤비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레모리를 노려볼 뿐.

한 손에 도끼 한 자루를 더 든 걸로 봐서, 도끼를 주로 다루며 투척이 회심의 한 수인 모양인데.

그게 쉽게 튕겨 나갔을 뿐만 아니라, 아군 병사를 죽인 꼴이 되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허……. 마르쿠스의 도끼를 맨손으로 쳐내?”

가르바가 헛웃음을 내뱉고 말했다.

“각자 지원군을 하나씩 불렀으니, 비긴 걸로 하면 되겠군.”

아니, 지들은 군대까지 불러놓고 비겼다니!

……라고 항의하고 싶었으나, 내가 부른 쪽은 마신이다.

존재 자체가 일인군단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여러모로 강렬한 등장에, 잠깐 당황하던 류경재 총경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이정우 기사, 그 숙녀분은……?”

숙녀분이라니. 요즘도 저런 고풍스러운 문어체를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꺄아, 숙녀래! 인간, 원래 스캐빈저 경만 구해줄 생각이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너도 조금 신경 써 주마.”

그런데 그레모리는 제법 마음에 든 듯하다.

나는 의도적으로 대충 설명했다.

“아, 뭐, 제 옛 친구 같은 겁니다. 좀 특수한 능력이 있어서, 던전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거든요.”

“호오, 그것참 편리한 능력이군그래. 그럼, 기사인 건가?”

역시나, 흑마법에 예민한 손태준이 눈을 번득이며 취조하듯 말했다. 특유의 감각으로, 그레모리에게서 뭔가 사특한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나 기사 아닌데?”

그레모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날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곤란하리라는 배려 따위는 없구나 - 가 아니라.

“미안, 스캐빈저 경.”

“아니, 뭐…….”

몹시 미안한 얼굴로 하는 저 말도 진심이리라. 원래 그레모리는 거짓말을 못 하니까.

어차피 거짓말 따위, 마신에게 죄책감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 빠진 것만큼의 느낌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레모리에게는 거짓말을 못 한다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마신치고는 몹시 희귀한 특성이다.

“기사가 아니면 뭐지?”

다행이다. 너 마신이냐고 안 물어봐서.

연이은 손태준의 질문에, 그레모리는 답해주는 대신 날카롭게 받아쳤다.

“내가 그걸 왜 너 따위한테 답해야 하는데?”

“너 따위?”

코덱스에게 몸을 빼앗겼던 문제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손태준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나한테 따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가? 그쪽이?”

역시나, 자기가 사는 의의가 있어야 - 그러니까 제거하고 싶은 암흑을 접해야 의욕이 솟아나는 타입이구만, 저 인간.

“어디, 확인시켜줄까?”

말하는 그레모리의 미소가 스산하다. 아, 불안하다.

그레모리가 인간에게 우호적인 마신이기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소환자 한정이다.

조금 전, 롬 제국군을 다 없애면 되느냐고 물었듯, 다른 인간은 어떻게 되건 상관하지 않는다.

“…….”

사실 더 불안한 사람은 최혜인이다. 그녀는 좀 전부터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레모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시선은 그레모리가 싫어할 텐데. 더구나 여자의…….’

모르는 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행위는 사람도 대부분 싫어하지 않던가. 하물며 상대는 변덕스럽고 오만하며 인간 따위 발아래로 보는 마신이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가는 다 죽어……. 나만 빼고.’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어디선가 봤던 대사를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니나 다를까.

“5초만 더 쳐다보면 그 눈알을 뽑아서 목구멍에 처박아 주지.”

살벌한 말이 그레모리의 앵두 같은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잔뜩 긴장한 롬 제국 병사들은 물론, 김태훈과 가르바까지 그레모리를 주시했다. 그 바람에 둘의 결투는 어정쩡하게 멈춰버렸다.

“저, 최…….”

뭔가 더 큰 일이 터지기 전에, 내가 최혜인 기사를 만류하려 할 때였다. 최혜인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잠깐 넋을 잃고 봤습니다.”

……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레모리도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 미소를 머금었다.

“솔직한 인간이구나. 넌 스캐빈저 경 옆에 있는 여자여서 목숨까지 구해주진 못하겠지만, 방금의 무례는 없던 거로 해줄게.”

“감사합니다.”

음, 뭐지. 뭔가 눈치챈 건가.

그런데 그걸 계속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코넬리아가 마침내 속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징 같은 깃발을 쳐들었다가 내리며, 냉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양군, 역도들을 포위하여 섬멸합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않게 하세요!”

“야, 코넬리아!”

당황한 가르바가 버럭 외쳤으나, 코넬리아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장군, 결투는 끝났습니다. 대의를 생각하세요. 위대한 통일 전쟁의 끝에 흠집을 낼 생각입니까?”

“쳇…….”

가르바는 마지못해 물러나며 김태훈에게 내뱉듯 말했다.

“너. 제법 싸울 맛이 나는 놈이었는데, 미안하게 됐다.”

김태훈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웃었다.

“지랄하지 마.”

“……고맙군. 죄책감을 덜어줘서.”

그 말이 끝난 직후.

“전군 돌격!”

앞과 뒤에서, 각각 가르바와 마르쿠스가 지휘하는 롬 제국군이 우리를 향해 돌격해 왔다.

다 보이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지만, 짐작건대 그 숫자는 각각 4~5천 이상!

그에 반해 우리는 고작 십여 명이다. 더구나 두 갈래 적 부대의 선두에는 제국 최강이라는 두 무장이 서 있다.

“크하하하, 그래. 어디 다 덤벼봐라, X밥들아!”

김태훈은 찐 광기를 뿜어대며 귀혼을 휘둘러대기 시작했고.

“최종 방어 태세, 저승문…….”

손태준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방어 스킬을 펼쳤다.

최혜인은 그 뒤로 물러나, 닥치는 대로 화살을 날려댔다.

“크악!”

“전방, 조심해라! 적 중에 저격수가 있다!”

조설아는 얼굴이 새파래진 와중에도, 내 앞으로 와서 섰다.

“앞쪽은 손태준 단장님이 방어하니까, 후방 탱커는 정우 네가 할 거지? 엄호할게.”

기특하네. 용케 패닉에 빠지지 않고, 포지션을 정확히 파악했다.

차윤성은 힐러인 만큼, 손태준과 내 사이에서 이혜림 순경과 아이들을 보호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류경재 총경은 후방에서 전방의 김태훈 같은 역할을 하려는 듯, 내 앞으로 와서 검을 휘두르며 불길을 뿜어냈다.

“신이여…….”

최후를 직감한 듯, 아만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셀리나도 내게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

“그간 고마웠어요, 정우 씨. 그리고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요.”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러요.”

“네?”

나는 셀리나에게 설명하는 대신, 재미있다는 듯 앞뒤를 돌아보는 그레모리에게 말했다.

“자, 지금이에요. 여기서 나와 내 일행 전원이, 조금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게 해줘요. 안전하면서도 충분히 멀리 떨어진 장소까지.”

재차 말하지만, 그레모리는 거짓말을 못 하고 소환자에게 우호적이다. 그래도 마신이라는 것은 변함없다.

바라는 바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수작을 부린다. 거짓말을 못 하는 대신, 내가 말한 범위 내에서 ‘사실대로’ 장난을 치는 것이다.

“칫. 많이 늘었네, 스캐빈저 경.”

“몇 번 당했으니까요.”

말하자면, 마신에게 비는 소원은 ‘원숭이의 손’ 패러독스 같은 것이다. 소원의 허점 - 언급을 빠뜨렸거나 어떻게라도 해석할 수 있는 부분 - 을 이용해, 결과적으로 소원을 빈 자를 파멸로 이끄는 것.

예컨대, 죽은 아들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면, 무덤에서 부패한 시신의 모습 그대로 돌려보내 준다거나.

‘살아 있는 상태의’, ‘멀쩡한 몸과 마음으로’, ‘아들의 원래 기억과 영혼 그대로’,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이라는 세부 조건을 빠뜨린 탓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마신들은 그저 재미로 그 짓을 한다.

때로는, 인간 주제에 자신을 소환한 데 대한 화풀이이기도 하고, 파멸한 소환자의 영혼이 탐나서 그러기도 한다.

다만, 그레모리는 이유가 좀 다르긴 하다.

“아쉽다. 방해되는 것들 다 치우고, 오랜만에 스캐빈저 경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하하…….”

사실이다. 그레모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레모리가 나에게 반하게 되고 난 후, 난 두 번 더 그녀를 소환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경솔하게 소원을 빈 나머지, 동굴에서 그레모리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이후의 상황은 생략한다. 나도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데다, 어차피 게임이라고 생각해서 크게 결벽을 떨지 않았다.

두 번째는 좀 더 신경을 썼다. 그레모리와 보낸 시간이 싫어서라기보다, 그 후로 뭔가 몸 상태가 나빠져서 시들시들했고.

마신과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이, 아무리 게임 속이라고 해도 꺼림칙해서다.

그런데도 그레모리는 내 소원에서 작은 허점을 찾아냈고, 또 황량한 고원에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또 그녀에게 넘어가 버렸고 -

이크, 회상은 그만. 최혜인이 눈을 가늘게 뜬 것이, 어쩐지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

“좋아. 부탁을 들어줄게. 사랑하는 스캐빈저 경이 바라는 일이니까. 다만…….”

“다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에엑? 왜요?”

“이 일대에 뭔가 기분 나쁜 이상한 기운이 펼쳐져 있거든.”

젠장, 코넬리아의 마법이다!

그레모리 소환에는 내 마력을 운용하지 않았지만, 정작 그레모리가 우리를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그녀의 마력을 운용해야 하니까.

‘그걸 미처 생각 못 했네.’

그나마 그레모리가 마신이기에, 코넬리아의 마법을 파훼하고 뜻대로 발동할 수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얼마나 걸려요?”

“흐음? 스캐빈저 경 세계의 시간으로 5분?”

원래라면 엄청나게 짧은 시간이지만,

“아, 너무 긴데…….”

앞뒤 합쳐 만 명에 가까운 정예군과, 오호장의 두 명이 덮쳐오는 이 상황에서는 억겁 같은 시간이다.

이미 파티원들은 대군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흐음,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그 급한 마음을 그레모리가 예술적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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