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16부 : 다음 층을 향하여 (7)
롬 제국 병사들은 하미르를 둘러싼 채 창을 찌르고.
가르바는 주저앉은 손태준의 목덜미에 검을 내리친다.
코넬리아는 숨겨온 스틱술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하나가 무너지니 줄줄이 이어져, 그 밖의 다른 동료들도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다.
‘다 끝났나? 여기까지 와서?’
나 자신조차,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릴 무렵.
두 가지 변수가 생겨났다.
우선, 그 첫 번째는.
“야.”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서리라고 생각지 못한, 그레모리의 개입.
“너, 지금 누구 마음대로 스캐빈저 경을 때리고 찌르는 거니?”
“웃!”
코넬리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끼어든 그레모리에게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레모리의 하얀 손이 빛살처럼 뻗어와, 코넬리아의 목을 움켜잡았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외쳤다.
“가르바! 그자를 해치면 코넬리아도 죽는다!”
우뚝.
가르바의 검이 손태준의 목 바로 위, 그야말로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정지했다.
역시, 코넬리아는 롬 제국이 포기할 수 없는 인재다. 하크 제국을 합병할 지금, 그녀의 머리가 더욱 중요해졌으리라.
“어머?”
그레모리도 손의 힘을 살짝 풀었다. 내 외침이 아니었다면 코넬리아는 그대로 목뼈가 부러져 죽었을 것이다. 붙잡히는 순간의 충격만으로도 기절했으니까.
“이 비열한 자식…….”
가르바가 나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눈에 흉흉한 분노가 떠올랐다.
그런 비난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설령 비열한 수를 써서라도 내 동료를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
“사부!”
최혜인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손태준에게 달려와 그를 감쌌다.
“무슨 짓이냐. 멍청한 녀석…….”
중상을 입은 손태준이 힘겹게 말했다. 최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태준과 가르바의 사이를 막아섰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게는 이제 사부님밖에 없습니다.”
“…….”
거기에 더해, 가르바는 진심으로 코넬리아의 안위가 걱정된 듯했다.
“전군, 동작 그만!”
그가 지휘하던 전방 쪽 부대가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하미르!’
나는 그러자마자 하미르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병사들은 여전히 하미르를 둘러싼 채였다.
그들의 발아래로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 나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피의 양이 적지 않았다. 아이의 몸에서 저 정도 출혈이라면 하미르는 이미…….
그때, 나를 따라 허겁지겁 달려온 차윤성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그 소리에 고개를 들자, 기묘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병사들의 몸이 저마다 멋대로 어긋나고 있었다. 마치 잘못 쌓아 올린 블럭처럼.
그러다 발목만 남기고 일제히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병사들의 발목으로 만들어진 울타리 가운데, 피투성이가 되어 넋 나간 듯 앉아 있는 하미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어, 레이저?”
병사들을 일격에 해치우고 하미르를 구한 것은 레이저였다.
“…이 작은 것이 눈에 익어서요.”
“잘했어요, 레이저! 그런데 공터의 아이들은 어쩌고 왔어요?”
“병사들은 다 처리했고, 다른 작은 것들은 그 후에 자기 부모들이 데리러 오더군요.”
“다행이다…….”
“그런데 아직도 여기에 묶여서 뭐 하는 거예요?”
“보다시피 길목이 앞뒤로 막혀서요.”
“흥, 내가 열어드리죠. 좀 귀찮지만.”
말하자마자 레이저가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 번 휘날릴 때마다 병사 서넛이 잘려 쓰러졌다.
“으악!”
“마, 마녀다!”
결국, 가르바가 이를 악물고 레이저에게 돌진해왔다.
“또 만났구나, 마녀! 이번에야말로 죽여주마.”
“할 수 있다면?”
레이저는 롬 제국군 사이로 교묘히 몸을 숨기면서 가르바를 공격해댔다.
가르바는 아군 병사들 때문에 함부로 냉기 마법을 쓰지 못했다. 자칫 수하들까지 얼려버릴 위험이 있어서다.
이것 참, 누가 악당인지 모르겠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얼른 하미르 곁에 다가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하미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피 아니에요.”
아, 이거 혹시 전부 롬 제국 병사들의 피인가? 바닥에 고인 것들도?
하긴, 십 수 명이 절단됐으니 그럴 만도 하지.
퍼뜩 정신 차린 하미르가 말했다.
“아빠! 아빠는요?”
“하미르…….”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창에 찔려 고슴도치처럼 된 아만이 쓰러지는 모습을 봤다. 그는 일반인보다 조금 강한 정도에 불과하므로, 내가 엘릭서조차 꺼낼 수 없는 지금 회생하기란 불가능하다.
“안 돼…….”
두리번거리던 하미르가 눈을 치떴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아만을 본 것이다.
“아빠!”
“하미르, 안 돼!”
나는 얼른 손을 내밀었지만, 허공에 헛손질했다.
내가 하미르의 움직임을 놓쳤다고?
고개를 돌려 하미르가 간 쪽을 보던 레이저가 말했다.
“저 작은 것, 좀 달라졌군요.”
“달라져요?”
“이상 변이를 일으켰어요. 저것도 버그였나…….”
하미르는 어느새 아만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 그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만은 눈을 반쯤 뜬 채, 옆얼굴을 바닥에 처박고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절명했음이 분명했다.
그레모리가 코넬리아의 멱살을 잡고 상큼하게 말했다.
“앞으로 2분.”
순간, 그리로 시선을 옮긴 레이저와 그레모리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멈칫했다.
“저건, 이 계층에 없던 것인데?”
레이저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이어.
“설마, 반신(半神)?”
그레모리도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둘 사이에 무형의 불꽃이 튀는 듯하다.
하하, 당신들은 또 왜 그러는데.
2분이라. 1분이 한 시간 같구만.
그러자, 자기도 질 수 없다는 듯.
“아빠…….”
나직이 중얼거리던 하미르의 눈이 이상한 정광으로 번득였다.
순간, 서로 노려보던 그레모리와 레이저의 시선이 일제히 하미르에게로 향했다. 깜짝이야!
하미르를 중심으로 이상한 기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리며, 아지랑이 같은 거대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어, 하미르……?”
“대폭발.”
내 옆으로 다가온 이혜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언제 꺼냈는지, 작은 회중시계 같은 도구를 들고 있었다. 바늘이 하나뿐인 은색 회중시계다.
“네? 이혜림 순경님, 방금 뭐라고…….”
“저건 대폭발의 기운임다. 이 탐지기 좀 보시지 말임다. 에너지 총량이 조금 적을 뿐, 거의 같은 파장을 보이고 있슴다. 그 에너지 총량도 곧 비슷해질…….”
순간, 이혜림이 든 회중시계 모양 탐지기의 바늘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아니, 더 커질 것 같슴다…….”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그 대폭발?
서울의 한 개 구를 날려버렸던 대폭발이요?
그걸 하미르가 일으키려 한다고?
“잘못된 연결입니다. 코드를 제거해야…….”
휘리리릭!
모노와이어를 꺼내 든 레이저를 향해, 그레모리가 내뱉듯 말했다.
“이미 늦었어. 스캐빈저 경, 내 옆으로 와서 최대한 바짝 붙어. 이동하려던 주문까지 포함하여, 모든 마력을 총동원해서 방어막을 칠게.”
그 정도냐고, 그게 사실이냐고 굳이 되묻지 않았다.
그레모리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 익숙한 기운은 대폭발의 전조가 분명했다. 그 증거로,
<주의! 신경증, ‘트라우마’가 발동합니다.>
<주의! 신경증, ‘공황장애’가 발동합니다.>
몸이 먼저 느끼고 있었으니까.
오랜만이네, 신경증. 하필 이때.
나는 그레모리에게 가려다 통나무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헉, 헉, 허억.”
숨이 제대로 안 쉬어졌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귓가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리로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코넬리아가 말하기를 네놈이 가장 주의할 대상이자, 틈이 보이면 최우선으로 제거해야 할 놈이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어느새 도끼를 든 장수가 내 머리맡에 와서 섰는데도 반응할 수가 없었다.
‘마르쿠스…….’
마르쿠스는 죽으라거나, 끝이라거나 하는 말도 특별히 하지 않았다.
도끼를 내리치기 위한 가벼운 기합을 내뱉었을 뿐.
“합!”
쾅!
머릿속에서 천둥이 울리고, 눈앞에 불이 번쩍였다. 귀와 코에서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감각은 어느 정도 돌아왔으나,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역시 한 방으로는 안 되나. 그래도 확실히 내부를 공격하는 데는 못 버티는 모양이군. 그럼, 한 번 더.”
‘큭!’
나는 연이어 찾아올 충격을 각오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툭.
뭔가가 내 눈앞에 떨어졌다. 도끼를 쥔 팔이었다. 뒤이어 다리도 아무렇게나 털썩 나뒹굴었다.
코넬리아의 그것으로 짐작되는 비통한 외침이 들려왔다.
“마르쿠스 장구우우우운!”
“내가 말했지?”
거짓말하지 않는 그레모리가 나를 안아 들며, 팔다리가 찢겨 나간 마르쿠스에게 말했다.
“넌 사지를 찢어서 죽여준다고.”
“그레모리…….”
“그래, 스캐빈저 경. 나야. 그리고 저 작은 인간이 내뿜는 파동의 정체를 알았어.”
“정체……요?”
“응. 저건 두 개의 차원을 잇는 통로를 만들어내는 마력 폭발이야. 통로라고 해봐야, 강제로 차원 벽을 찢은 다음 갖다 붙이는 과격한 방식이지만. 상호 작용하는 차원문을 아무런 에너지의 충돌 없이 만드는 일은, 모르긴 해도 신이나 가능할걸? 그래서 저런 식으로 차원벽에 구멍을 내 버리는 거지.”
두 개의 차원을 잇는다…….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하다. 도끼에 찍힌 것 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레모리가 상냥하게 말했다.
“스캐빈저 경, 걱정하지 마. 저것 때문에 시공이 일그러지게 생겨서, 어차피 지금 공간 이동을 하기에는 글렀지만……. 대신, 널 대피시키려던 마력으로 털끝 하나 안 다치게 지켜줄 테니까.”
두 개의 차원을 잇는, 대폭발.
차원문.
2층과 3층!
순간, 나는 코피를 울컥 쏟아냄과 동시에 깨달았다.
하미르다.
3층으로 가는 통로는, 바로 하미르 그 자체였던 거다.
‘그래서 하미르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한 거로군…….’
셀리나가 같이 언급된 거로 보아, 원래 하미르를 각성케 하는 원인은 그녀인 듯했다.
하지만 시나리오와는 달리, 아만이 몸을 던져 희생함으로써 기사지체인 하미르의 잠재력을 깨웠다.
문제는, 저게 정말 차원문 발생의 전조인 대폭발이라면 경험상 이 일대는 초토화하리라는 것이다.
롬 제국군도 다 날아가겠지만, 우리 일행도 무사하기 어렵다.
그때, 이혜림 순경이 다급히 소리질렀다.
“기사 여러분! 모두 이리로 모이십쇼. 제발요!”
고함이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까운 그 외침에, 파티원들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말에 따랐다.
나이스, 이혜림!
“사부님, 일어나십시오!”
“으으음…….”
“조설아, 뛰어. 빨리!”
그레모리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다급함이 깃들었다.
“차원문 생성까지 20초도 안 남았어. 모일 거면 서둘러!”
“다 왔어요. 누군지 모르는 누나. 어?”
답하던 차윤성이 당황했다.
“태훈, 태훈 형! 태훈 형은 어디 있지?”
김태훈은 반쯤 무아지경에 빠져, 아직도 롬 제국군 사이에서 귀혼을 휘두르면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저 미친!
그를 향해 가르바가 입술을 깨물고 달려가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태훈…….”
내가 김태훈을 부르려던 순간.
우우우웅!
마치, 일대의 모든 공기가 하미르의 작은 몸속으로 빨려드는 것처럼 압축되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몇 초 후, 압축되었던 공기와 마력이 일제히 방출되며.
하미르를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