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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200화 (200/303)

200화

16부 : 다음 층을 향하여 (8)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대폭발!’

나는 눈을 뜸과 동시에 화들짝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나는 거대한 깔때기 모양의 분화구 바닥에 있는 듯했다. 경사면은 지면이 전혀 안 보일 정도로 높았고, 움푹 파인 가운데 부분의 면적만 해도 축구장 몇 개 넓이는 돼 보였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분화구 가운데의 허공.

바닥에서부터 대략 3미터 정도 되는 높이에, 금빛의 원형 기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차원문…….’

정말로 차원문이 생겨난 것이다.

아마, 저것이 3층으로 향하는 통로겠지.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미르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차원벽에 구멍을 낼 정도의 거대한 에너지를 체내에서 일시에 분출하고 무사할 사람은 없다.

잔인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미르에게 이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 잠재되어 있을 줄이야.

아니, 정말 잔인한 것은, 이 2층 마지막 던전 퀘스트를 설계한 대상.

하미르를 차원문 발생 용도로 이용한 어떤 존재였다. 나는 그런 존재가 분명히 실재함을 인식했다.

아만과 하미르가 모두 사망하여, 결과적으로 조은경 기사의 나이트 기어인 모이트란은 내게 귀속됐다.

나는 그것이 마치 아만 일가의 유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되면 복수해 줄 것이다.

아만과 하미르를 죽음으로 인도하도록 설계한, 그리고 아마도 크래커들의 마스터일 것 같은 그 존재에게.

한동안 쓰라린 심정으로 차원문을 바라보다가, 주변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그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윤성아! 설아야! 정신 좀 차려봐.”

“끄응…….”

“정우야……. 여기는 천국이야?”

다행히 둘 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둘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최혜인과 손태준, 류경재, 이혜림 등도 마찬가지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셀리나와 마야도 무사했다. 마지막 순간, 용케 그레모리의 보호 범위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레이저가 뚱한 얼굴로 둘의 옆에 있는 걸 보니, 그녀가 데려왔을 수도 있겠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의 힘이 빠져 다시 주저앉았다.

‘이혜림 순경의 외침 덕이 컸지.’

정신이 덜 들었는지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가 새삼 예뻐 보인다.

그레모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바닥에 그녀를 상징하는 문양만 불탄 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지난 마력을 다 소모하여 역소환되었다는 뜻이다.

죽음 형태의 강제 역소환은 아니어서 마계에서 잠들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타격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고마워요, 그레모리.’

그레모리에게는 이번에 큰 신세를 졌다. 혹시 모르니, 그녀가 좋아하는 공물인 약초를 바치고 감사의 의식이라도 치러야겠다.

‘잠깐. 김태훈은?’

마지막 순간, 김태훈이 돌아오지 못했던 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쪽으로 가르바가 향했던 것도.

설마?

내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최혜인이 내게 말했다.

“혹시 김태훈 기사를 찾으시는 거라면…….”

“네, 맞아요!”

“저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대략 50미터 거리입니다.”

나는 최혜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그쪽에 한 사내가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검게 그을린 뒷모습만 보여서 누군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태훈 형?”

일어나서 다가가자, 당연하다는 듯 레이저가 따라붙었다.

가까이 간 나는 사내의 정체와 그의 행동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당신은…….”

검게 탄 사내는 바로 가르바였다.

그는 위에서 감싸듯, 김태훈을 상체로 가린 채 서 있었다.

정황상 가르바가 김태훈을 공격한 게 아니라, 몸으로 가려 목숨을 살린 듯했다.

‘어째서?’

김태훈은 그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는데, 드러난 피부가 벌겋게 화상을 입은 듯했으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거로 보아 숨은 붙어 있었다.

나는 얼른 치유 물약 두 병을 소환했다.

코넬리아가 폭발에 휩쓸려 사망한 것인지, 아니면 마법 효과가 다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인벤토리가 작동했다.

치유 물약 한 병을 김태훈에게 통째 들이부은 다음, 다른 하나는 가르바에게 끼얹었다.

김태훈은 호흡이 안정적으로 변했고, 가르바는 컥 하고 밭은 숨을 토했다.

“가르바! 괜찮아요?”

“……아니다.”

“네?”

“난 가르바가 아니야. 내 이름은 제임스 그린. 미합중국의 기사다.”

“기억이, 돌아왔군요?”

가르바 - 아니,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린아이가 내뿜는 강렬한 마력을 접했다. 동시에, 거기에 맞서던 네 일행의 마력에도 닿았고. 그러자 내 머릿속에서 폭죽이라도 터지는 것처럼 아찔하더니, 지난 기억들이 일시에 돌아왔다.”

“그래서 태훈 형을 구한 거예요?”

“……본의 아니게, 네게 빚을 졌으니까. 넌 처음부터 나를 알아보았는데, 던전 과몰입 증후군 탓에 이계인들 편에 서서 너희 일행을 공격했으니.”

“이계인들이요?”

“음? 설마, 모르고 들어온 건가?”

설명을 더 듣기도 전에.

팟!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제임스의 두 눈과 코 사이에 붉은 수평선이 나타났다.

“……?”

나와 제임스는 둘 다 얼어붙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내가 먼저 눈치채고 외쳤다.

“만지면 안 돼요! 지금 바로…….”

내가 허겁지겁 최상급 엘릭서를 소환한 순간.

제임스가 한발 먼저, 양손을 올려 자기 얼굴을 더듬거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 - 정확히는 코 윗부분이 분리되어, 뚜껑이라도 열린 것처럼 뒤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동시에 제임스의 몸도 끈 떨어진 연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엘릭서는 숨만 붙어 있으면 어떤 상처라도 치료할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자는 살릴 수 없다.

“……왜.”

콰직.

귀한 엘릭서가 든 병이 내 손안에서 부서졌으나, 그것조차 실감하지 못했다.

우웅!

부서진 엘릭서 병 대신, 내가 소환한 신창 롱기누스가 손에 잡혔다. 나는 그 창을,

“왜 그런 거죠?”

모노와이어로 제임스를 살해한 레이저에게 겨누었다.

“이제 겨우 기억이 돌아왔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나도 저 사람에게서 들을 정보가 많았는데. 왜 죽인 거냐고!”

나는 격분했다.

레이저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과 말투로 답했다.

“처음부터 죽일 거라고 했잖아요? 몇 차례고 저항하거나 방해받아서 실패했을 뿐. 이제 기회가 왔으니 하려던 일을 한 거예요.”

“이익…….”

그래, 그녀는 - 크래커는 이런 존재였지.

인간의 형상을 하고는 있으나, 정작 인간의 목숨을 털끝만큼도 존중하지 않는 살육 괴물들.

레이저뿐만이 아니다. 페어라이트에게 외눈 검객 악투샤와 사신 기사단의 부단장 이진욱이 죽었다.

또, 그다음에 나타난 코덱스 때문에 파티원들끼리 서로 죽일 뻔했고, 나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그뿐인가. 스키드 로우에게 김태훈이 한쪽 팔을 잃었으며, 다들 심각한 부상을 당했고, 손태준은 돌이키기 어려운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한동안 같이 행동하고 아이들을 구해줬다고 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문을 열고 말았나 보네. 저런 괴물에게.’

레이저는 태연히 내게 물었다.

“공격할 거예요?”

“아니.”

나는 창을 인벤토리로 돌려보내고 돌아섰다.

“당신은 어차피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아무 가책도 없겠죠. 또,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은 나보다 강하고.”

그래서 미처 못 보았다.

“그러니까 그냥 무시하려고요. 나를 따라오든 말든, 뭘 하든 말든. 파티원들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이제 내게 당신은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군요.”

한순간 레이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쓸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미안합니다, 제임스 기사. 당신은 내게 빚을 졌다고 했지만, 결국 나를 만난 탓에 죽은 건 당신이군요. 차라리 여기에서 롬 제국의 장군으로 살도록 놔뒀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이제 얕게 코까지 골고 있는 김태훈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레이저를 뒤로 한 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파티원들에게로 걸어갔다.

그사이 정신이 든 류경재 총경이,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무슨 일인가? 보아하니 레이저 양이 롬 제국의 장군을 죽인 모양인데. 혹시 그것 때문에 다투기라도 했나?”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저기로 들어가는 게 급선무일 것 같네요. 총경님.”

“아.”

하미르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차원문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정우야. 태훈 형, 내가 업을까?”

차윤성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 가자.”

그리고 셀리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녀는 마야를 품에 안고,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셀리나 선생님. 이미 아셨을지 모르겠지만, 롬 제국의 오호장은 이것으로 모두 사망했습니다. 롬 제국 정예군도 마찬가지고요.”

“네…….”

“아만의 죽음으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힘에 눈뜬 하미르가 침략자를 전멸시킨 걸로 해두죠.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으로.”

“알겠어요. 정우 씨, 나는 여기에 남을게요. 이제 안전해지기도 했고, 마야를 돌볼 사람도 필요하니까…….”

“그리고 침략군이 사라지다시피 한 하크 제국을 재건할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요. 참, 이제 더는 제국이 아니겠네요.”

셀리나가 처연한 미소를 띠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마침내 원하던 상태가 되었지만……. 고맙다고만은 못 하겠네요. 당신들이 불러일으킨 후폭풍이 너무 커서.”

“바라지도 않아요. 그럼.”

이 정도가 좋다.

이제 다시 볼일도 없을 테니, 무사함을 확인하고 떠나면 되는 거다. 괜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남길 필요도 없이.

내가 발을 떼려는 순간.

마야가 손을 내밀어, 내 손가락 하나를 붙잡았다.

“정우 아저씨.”

“마야, 이제 아저씨는 떠나야 해. 건강하게 잘 있으렴.”

“아저씨, 고마워요.”

“…….”

“그래도 끝까지 우리를 지키려고 싸워준 거잖아요. 나쁜 적들도 다 물리쳐 줬고. 고마워요.”

“그래, 나도 고맙다.”

나는 살짝 목이 메는 걸 느끼며 답했다. 아주 조금은, 구원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에게서 조금 멀어졌을 때였다. 귓가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아저씨는 떠나야 해.”

“……깨어 있었어?”

김태훈이다. 아주 얄미운 투로 내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다.

“그래, 나도 고맙다.”

“적당히 해라. 확 팽개치기 전에.”

“크크, 장난이야, 장난. 이별이 하도 애틋해 보여서 좀 덜 슬프라고.”

“인간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멀쩡해. 그래도 계속 업어줘.”

“왜?”

“아, 피곤해서 그래. 나도 동생한테 좀 업혀 보자.”

“징그럽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김태훈을 등에서 내리게 하지 않았다.

장난을 멈춘 그의 목소리가 너무 기운 없어서다.

엘릭서와 치유 물약은 재생력을 끌어와 치료를 앞당기지만, 마력과 기력 자체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사실, 제임스의 발치에 쓰러진 김태훈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전신 2~3도 화상을 입은 피부 위에,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으로 난 크고 작은 상처들 때문이다.

“올라가면 일단 좀 쉬면서 치료하자.”

“응, 난 더 잘게…….”

다시 잠든 김태훈을 업은 나와 파티원들은, 3층으로 이어진 차원문을 향해 차례로 뛰어들었다.

그 너머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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