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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251화 (251/303)

251화

19부 : 멀리건 (2)

그 감정을 자각하자마자 나는 진저리를 쳤다. 하마터면 내가 내 뺨을 때릴 뻔했다.

‘미쳤구나, 이정우!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질투라니. 아, 아니, 질투하는 자체가 미친 거지.’

설령 김태훈의 이야기가 다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왜 질투심을 느끼는 거야? 그냥 기사와 서번트 사이였을 뿐인데.

그런 것치고는 김태훈의 집착도 심한 것 같기는 하다만. 내가 두 번째 삶을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했다고 쳐도, 나를 거의 4~50년 동안 찾아다녔다는 거잖아.

‘으윽, 그만 생각하자.’

나는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그래서, 마고가 누군데?”

“전뇌성의 핵심 멤버이자 나와 같은 관리자.”

“관리자…….”

“그리고 이 세계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아는 최강의 마법사야.”

최강의 마법사라. 어째 예감이 안 좋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느 때처럼 내 근처에 있던 레이저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뭔가 작게 중얼거리면서.

“안 돼요, 마스터. 안 됩니다…….”

그걸 보고 뭔가가 퍼뜩 떠올랐다.

“검은 남자도 관리자였지?”

“음, 맞아.”

“그런데 이번에는 왜 돌발 퀘스트가 안 뜨지?”

김태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밤에 얘기했던 내용 중에 개연성이라는 말 기억나?”

“엉. 무슨 섭리 같은 거라며. 정신계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 같은 법칙.”

“맞아. 거기에 따르면, 설령 관리자라고 해도 나처럼 규격 이상의 존재는 멋대로 복제 차원에 개입할 수 없어. 해당 차원의 인간이 되어서, 개연성 수치가 일정 이상이 될 때까지 나를 인식시켜야 해.”

“형이 기사인 검성 김태훈으로 살았던 것처럼?”

“그렇지. 그렇게 해서 존재를 인정받는 거다. 그런데 그 검은 남자, 그놈처럼 갑자기 끼어들어 오려면 거기에 맞는 명분이 필요해. 아무 명분이나 갖다 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개연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여야 하지. 드물긴 하지만, 그런 상황이 없었던 건 아냐. 그래서 전뇌성에서는 메뉴얼처럼 그 명분 - 음, 시나리오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걸 몇 가지 준비해두고 있어.”

그런가.

그래서 검은 남자는, 자신을 외우주의 신인 니알라토텝으로 상정한 것이다.

그건 곧, 마계에서 그가 니알라토텝만큼이나 강하다는 뜻이겠지.

“그러면, 이 마고라는 마법사는 그냥 끼어 들어온 거야? 그 명분, 그러니까 시나리오 없이?”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어째서? 검은 남자가 뭔가 실패했기 때문에?”

“아니.”

나와 대화하던 중, 김태훈은 뭔가 떠오른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놈이 성공했기 때문이야. 모드레드 자식, 쓸데없는 짓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쾅!

뭔가가 들이닥쳤다.

하나 그것은, 김태훈이 우려하던 마고는 아닌 듯했다.

“오로바아스으으으!”

마신, 벨레드다!

창백한 말을 탄, 기품 있는 미남자 -

“오로바스으으으! 어딨나아아!”

는 아닌가.

유령처럼 창백한 말을 탄 건 맞는데, 기품 따위는 어디로 내던졌는지 다급하기 짝이 없다.

벨레드로 보이는 남자의 긴 머리는 온통 산발이 되었고, 화려한 의복도 군데군데 찢어지고 탔다.

탔다?

“기습이다!”

“막아라, 오로바스 님을 보호해라!”

악마들이 법석을 떨며 오로바스의 앞을 막아섰다.

그 와중에, 참모 발레포르가 벨레드를 향해 재빨리 다가갔다.

“헤헤, 오셨습니까, 벨레드 님. 약조한 대로, 제가 즉위식을 늦춰…….”

“비켜라!”

쾅!

벨레드는 채찍을 휘둘러 발레포르를 후려쳤다.

“켁!”

나가떨어지는 발레포르에게 벨레드가 씹어뱉듯 말했다.

“본좌가 언제 네놈과 약조했더냐? 너 혼자 일방적으로 전해 왔을 뿐이지. 더구나 본좌의 영지는 이 땅의 열 배는 넘는다. 일부러 멀리 떨어진 이 영지를 차지하려고, 네놈과 약조씩이나 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그, 그런…….”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는 악마들 사이를 헤치고 오로바스가 나섰다. 오로바스는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부님.”

“오로바스냐. 가미긴 후작의 일은 안 됐다.”

“감사합니다.”

뭔가 경황없어 보이는 상태에서도 가미긴에게 애도를 표하는 걸 보니, 역시 기품 있는 마신 맞다.

답례한 오로바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부님, 듣자오니 발레포르의 반란과는 무관하시다고……. 그러리라 믿었습니다만,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오로바스는 은근슬쩍 발레포르를 반란 분자로 만들어버렸다.

하긴, 벨레드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영지를 나눌 생각을 했으니, 역도로 몰아가면 할 말 없다.

역시 오로바스도 마신은 마신이다. 귀여운 겉모습에 혹했다가는 먹혀버린다.

벨레드도 그걸 느낀 듯했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놓고 발레포르를 쓰레기 취급이다.

“음. 대부로서 너의 후작위 계승을 증명하고 축하해주러 오던 길이었다. 한데…….”

말하던 벨레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부님?”

“도중에 마녀와 마주쳤다.”

“마녀요?”

“그래, 홍염의 마녀! 어딘가로 움직이며 도중에 마주치는 모든 것을 태우고 있었다. 방향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쪽인 듯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거느리고 있던 내 군단 두 개만 불타버렸다.”

오로바스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군단 두 개를 태우다니?

천마장 위가 군단장인 걸로 보아, 한 개 군단은 악마 일만 마리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한 마디로 벨레드는 2만 마리의 악마가 타죽었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벨레드는 불을 다루는 마신이라 저 정도에서 그친 듯했다.

김태훈이 어금니를 지그시 악물었다.

“홍염의 마녀……. 역시, 마고 너인가.”

“화염 마법을 쓰는 모양이지?”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 마법을 다 쓰지만, 화염 마법이 가장 강력해.”

그때, 우리 앞에 있던 악마 하나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크에에.”

“?”

뒤이어 그 악마의 몸 겉 부분이 줄줄 흘러내렸다. 마치 양초에서 촛농이 흘러내리듯.

“아아?”

악마는 놀란 듯 제 몸을 이리저리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풀썩 내려앉았다. 그리고 곧 땅에 떨어뜨린 아이스크림 꼴이 되어버렸다.

“이…….”

기괴한 광경에 내가 입을 뻐끔거릴 때였다. 여기저기서 악마들이 마구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놀란 윤성이가 나 대신 외쳤다.

“이게 뭐야!”

김태훈이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마고의 폭주다. 그녀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주변 기온이 올라가고 있어.”

대체 온도가 어느 정도이기에, 악마가 산채로 녹아내린단 말인가?

류경재 총경이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물었다.

“저 악마들은 어째서 불이 붙거나 타기 전에 녹아버리는 거지?”

“불이 좁은 지점에 집중되거나 뭔가를 연소하는 게 아니라, 태양처럼 공기 자체를 데우고 있기 때문이야. 거기에 악마의 거죽과 체내에 있는 점액이 끓어올라 몸뚱이를 녹이는 거지.”

멍하니 듣고 있던 설아가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설아야!”

윤성이가 설아를 부축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으앗, 뜨거워!”

이거 큰일이다. 마침내 강인한 육체를 가진 기사까지 쓰러질 정도가 된 거다.

나는 서둘러 불카누스의 작업복을 착용시켰으나 효과가 없었다.

“화염 내성인데 어째서……. 아!”

말하다가 스스로 깨달았다. 이것은 화염, 그러니까 불이 아니다.

열기라고 해야 한다. 너무나 강렬한 열기. 화염 내성인 불카누스의 작업복도, 체내에서 일어나는 열기까지 없애진 못하는 거다.

손태준은 더위 먹은 개처럼 혀를 길게 내민 채 헐떡거리고 있다. 윤성이는 졸도한 설아를 챙기느라 못 느낀 모양이지만, 자기도 온몸이 땀에 젖었고 드러난 피부는 시뻘겋다 못해 검붉었다.

김태훈은 등이 온통 젖었고, 나도 뺨과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땀을 느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해. 이러다 다 죽어. 열기를 식히려면……. 잠깐!’

아이템들을 떠올리다가 뭔가가 퍼뜩 생각났다. 김태훈에게 들은 얘기와 이상한 질투심 같은 감정에 정신이 팔려 생각해내는 게 늦었다.

‘빙검 스카디.’

2층에서 만났던 롬 제국 황궁 주둔군의 장군, 가르바.

원래 신분은 미국 출신의 기사, 제임스 그린이다.

그가 사망하면서 남긴 나이트 기어가 바로 빙검 스카디다.

이름 그대로 강렬한 냉기를 뿜어내는 검. 그거라면 불은 못 끌망정 이 열기는 중화할 수 있으리라.

나는 서둘러 홀의 맨 뒤로 향했다. 모든 악마를 앞에 두고 볼 수 있는 위치다.

그런 다음, 빙검 스카디를 소환하여 망설임 없이 스킬을 발동했다.

고유 스킬, 얼음 여신의 입김!

푸화아아아악!

모든 것을 얼리는 무시무시한 냉기가 전방으로 방출되어 나갔다.

그러나 원래라면 얼음덩어리가 되어야 할 악마들은 모두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생기를 되찾았다.

“오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휴, 이제 겨우 살겠네.”

내 예상대로, 스카디의 고유 스킬로 열기가 중화된 것이다.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했다.

홀에 냉기가 어느 정도 머물러 있긴 하겠으나, 곧 열기에 데워질 것이다.

열기는 계속해서 유지되는 데다 점점 강해지는 반면, 냉기를 계속 뿜어내기에는 무리인 까닭이다.

‘어쩐다?’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저만치 앞에서 마신 벨레드가 나를 유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흐음, 어쩐지 인간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낭패다. 하필 이런 때에.

벨레드는 인간과 인간계를 끔찍이 싫어한다. 오죽하면 자기를 소환한 인간에게 다짜고짜 불을 내뿜을 정도.

“대부님, 저자는…….”

오로바스도 그런 사실을 아는 듯, 서둘러 뭔가를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벨레드가 한발 빨랐다. 그는 악마 무리를 훌쩍 뛰어넘어 내 앞에 착지했다.

“네놈, 어떻게 숨어들었느냐!”

벨레드는 외치자마자 입을 벌렸다. 목구멍 안에서 불길이 일렁이는 것까지 보였을 정도다.

“이런…….”

김태훈이 다급히 움직이고, 레이저도 말없이 모노와이어를 벨레드에게 펼치려는 순간.

나는 벨레드의 얼굴 앞에 왼손을 펼쳐서 내밀었다.

“위대하신 왕, 벨레드를 뵙습니다.”

“?”

그 왼손 가운뎃손가락에는 내가 인벤토리에서 불러낸 실버 링, 그러니까 은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벨레드가 나를 의식하자마자 착용한 것이다.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벨레드가 수그러든 어조로 말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군. 하긴, 평범한 인간이 마계에서 돌아다닐 수는 없겠지. 열기를 단숨에 식히는 냉기 마법에다, 소환의 예를 아는 자라……. 그런 인간은 천 년 전에 다 죽은 줄 알았더니.”

이것은 소환 및 대면 법칙의 일부다.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낀 은반지를 보여주는 행동은, 말하자면 벨레드에게 갖추는 일종의 예의이자 의식이다.

마신마다 원하는 예의나 의식이 다르다. 그런 데 예민한 마신도 있고, 아예 신경 안 쓰는 마신도 있다.

벨레드가 언급했듯, 그런 법칙과 의식을 아는 인간은 매우 드물었다.

‘솔로몬의 마도서 아이템 덕에 살았네.’

솔로몬의 마도서에는 모든 마신의 특성과 생김새, 주의할 점 등이 리스트로 정리되어 있다.

김태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도 섭리랄까. 제대로 된 예를 표하는 인간을, 마신은 무턱대고 공격하지 못한다.

“누구에게 해주길 원하느냐?”

또한, 제대로 된 의식을 갖춰 대면한 인간에게, 벨레드는 자기 능력으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그 소원은 -

순간, 마침내 홀에 작은 태양 같은 형상의 재난이 들이닥쳤다.

“아서어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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