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19부 : 멀리건 (12)
바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름……. 내 진명(眞名)을 어떻게 알았지?”
그야 게임에서 공략에 성공했으니까 알았지.
‘솔로몬의 마도서’는 랜덤이기는 하나 72마신 모두를 소환할 수 있는 엄청난 아이템이다. 또한, 오직 바알의 성에서만 얻을 수 있다.
세파시의 설정상, 바알은 솔로몬이 죽은 뒤, 누군가가 솔로몬의 마도서를 악용하여 또 마신들을 부릴까 두려워 직접 보관했다.
그런 만큼 습득 난이도는 최악이고 등급은 갓(GOD).
세파시 전체를 통틀어 단 하나 존재하는 고유 아이템이다.
이 솔로몬의 마도서는 마신 소환 스킬을 활성화해주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옵션이 있다. 바로, 불러내어 내용을 확인하면 모든 마신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난 그 내용을 거의 외워버렸지.’
바알의 진명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바알과 싸울 때 이용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이기도 하다.
“내 진명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바로, 진명을 말한 자에 대한 바알의 호감도가 30% 증가하는 것.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뢰도나 흥미라고 해야겠지만……. 세파시에서는 감정의 종류를 그 정도까지 세밀하게 나누지는 않았거든. 그 결과, 긍정적인 감정은 모두 호감도로 뭉뚱그렸다.’
호감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측근인 오리아스에게조차 방심하지 않은 바알의 빈틈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던진다고 먹히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30% 늘어날 뿐이니까.
여기에, 나는 한 가지 준비를 더 했다.
‘잘 해줬어. 오리아스!’
바로 오리아스에게 미리 할 일을 알려둔 것이다.
오리아스의 권능은 소환자를 원하는 모습으로 바꿔 주거나, 적들을 서로 화목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그 권능을 바알과 싸울 때는 사용하지 않았다. 앞발과 꼬리를 이용해 물리적인 공격만 했을 뿐이다.
일부러.
‘죽기 직전에 은밀하게 발동하기 위해서지. 눈치 빠른 바알이 회피하거나 막아낼지도 모르잖아.’
그 결과 오리아스는 마지막 치명타를 맞은 직후, 바알에게 권능 ‘적과의 동침’을 발동하는 데 성공했다.
‘이걸로 짜증 나게 군 건 없던 일로 해주지. 명복을 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오리아스의 혼령이 혀를 쯧 차더니 사라졌다.
그로 인해 바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나에 대한 호감도가 더 올라가 있다.
나는 진실의 눈으로 바알의 정보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 증가분도 50%뿐이지만 말이야……. 어지간하군, 바알. 오리아스가 목숨과 바꿔서 발동한 권능의 효과가 50%밖에 안 먹히다니.’
어쨌든 나에 대한 바알의 총호감도는 80% 수준으로 맞춰지게 되었다. 당장 순속을 써서 공격해오지 않는 게 그 증거다.
80%면 일부러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서는 공격받을 일이 없는 정도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애초에 바알을 쓰러뜨리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몬을 약화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알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수하들과 병력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것을 뚫고 나가려다가는 어차피 죽기 십상이다.
바알과 아몬이 서로 싸워, 최대한의 피해를 입어야 한다.
“송구합니다, 바알 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 미천한 몸이 감히 고귀한 바알 님의 진명을 입에 올렸나이다.”
“음?”
나는 말과 함께, 양손을 펴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며 예를 표했다.
“너는 누구냐.”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들키면 다 끝장이다.
“저는 바알 님 휘하인 바사고 일족의 방계, 스캐빈저라고 합니다.”
이게 첫 번째 고비다.
솔로몬의 마도서에 따르면, 바사고는 바알과 같은 일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바알의 세력에 가담했으리라는 법은 없다.
가미긴과 오로바스, 벨레드의 관계를 보고 넘겨짚은 것이다.
벨레드는 충분히 기회가 있었는데도 죽은 가미긴의 영지를 전혀 탐내지 않고, 오히려 오로바스가 물려받게 도와주었다. 직계가 아닌 방계인데도 그랬다.
즉, 세력을 정하는 데는 일족 관계도 강하게 작용한다는 거다.
하물며 바사고는 바알의 직계다. 다른 세력으로 넘어갔을 리 없다.
“스캐빈저? 처음 듣는 이름인데.”
역시, 별말 없이 넘어갔다. 나는 내심 안도했다. 우선 큰 고비 하나는 넘겼다.
“저는 아직 천마장의 지위밖에 안 되어서 모르실 겁니다.”
“방계의 천마장이라……. 그럼 확실히 내가 다 알기는 어렵지. 한데?”
바알에게서 서릿발 같은 기운이 뻗어나와 나를 짓눌렀다.
“어떻게 오리아스와 함께 여기까지 와서, 나를 공격하게 된 거지? 확실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말은 저렇게 해도, 바로 공격하지 않는다. 호감도가 확실히 작용하고 있다.
나는 준비한 시나리오를 말했다.
“우선, 저와 수하들은 바사고 님의 명으로, 아몬의 진영에서 정보 공작 중이었습니다.”
“정보 공작?”
“네. 도중에 정보를 가로채고 가짜 정보를 넘겨서, 아몬 군의 전투가 방해받게 하는 겁니다. 미리 함정을 파둘 수도 있고요.”
“계속 말해.”
여기까지는 오리아스도 실제로 아몬 진영에서 하고 있던 일이다.
“그러다 오리아스와 아몬 군 간부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송구하지만 오리아스는 바알 님을 배신하고 아몬의 휘하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건 안다. 다짜고짜 나를 공격했으니까.”
“빠져나와서 그 사실을 바사고 님에게 보고하러 가려던 찰나, 오리아스에게 들통나 함께 끌려오게 된 겁니다.”
나는 혹시 바알의 숨겨진 능력이 있나 하고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어떻게 눈치채신 겁니까? 저희가 미리 경고해드리려고 해도, 보셨다시피 마법 로프에 봉인된 상태라 마음대로 목소리를 내기에도 어려웠습니다.”
“그냥 떠본 거다.”
“……네?”
“적진에 파견하는 임무를 워낙 오래 맡겨뒀던 터라, 갑자기 돌아온 게 이상했다. 더구나 못 보던 놈들까지 끌고. 그래서 그냥 수상하다고 해본 거다.”
이런 사악한 악마 같으니.
“만약, 오리아스가 결백하다면 무슨 말이냐고 펄쩍 뛰면서 억울해했겠지. 그러나 놈은 그 말을 하자마자 날 공격했다. 그 행동 자체가 배신의 증명이다.”
“과연, 현명하십니다.”
“그래서,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날 공격한 이유는 뭐지?”
바알은 말끝에 레이저를 가리켰다.
“저걸 시작으로 날 공격해왔지 않느냐.”
이제 두 번째 고비다.
“오리아스에게 발각된 뒤, 놈은 우리를 아몬에게 끌고 갔습니다. 처분을 확인받으려는 의도였겠지만…… 아몬은 거기서 우리까지 암습에 쓰기로 한 겁니다. 바알 님을 본 순간, 아몬이 심어둔 권능이 발동해서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바알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도저히 생각을 읽어낼 수 없다. 유리알 같은 눈으로 나를 빤히 응시할 뿐이다.
‘걸렸나? 역시 급조한 얘기라서 허술했나…….’
바알이 천천히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다.
“찾았다. 멀린. 아니지, 늑대.”
“?”
빨간 두건을 쓴 금발 소녀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뭐지? 넌 어떻게 여기에…….”
덕분에 바알의 관심은 잠깐 그리로 쏠렸고, 나는 소녀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마고!’
너무나 이질적인 소녀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진실의 눈을 발동한 게 주효했다.
‘저 모습은 뭐지? 어디서 많이 본…… 맞아, 내게 늑대라고 했지?’
빨간 모자.
마고는 동화 속 빨간 모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렇군. 니알라토텝이 강림했던 일로 김태훈이 설명하기를, 이 세계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개연성의 허락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래서 썼던 방법이 니알라토텝의 존재를 빌리는 것이라고.
마고는 이미 한 번 멋대로 마계를 침입했었다. 그 탓에 외우주의 신 같은 거창한 존재 대신, 동화 속의 등장인물이 된 모양이다.
나는 여기까지 빠르게 추리해냈다. 돌발 상황이라 뇌가 더 활성화된 기분이다.
당황한 고르카가 귓속말을 날려 왔다.
-어, 어쩌죠? 쟤는 또 뭐고?
-절대로 저 빨간 모자한테 덤비지 마세요. 저건 고르카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관리자거든요.
“히익?!”
고르카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헛바람을 내뱉은 순간.
“죽어!”
마고의 새로운 형상인 빨간 모자의 소녀가 양손을 뻗어 불길을 뿜어냈다.
아마도 저건, 나를 노리는 마법일 것이다. 처음에 멀린을 찾았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
문제는, 마고와 나 사이에 바알이 껴 있었다는 것이다. 불길을 먼저 맞게 되는 건 바알 쪽이었다.
‘나를 죽이는 데만 몰두해서, 다른 데는 전혀 관심이 없구나. 심지어 그 대상이 대마신이라고 해도.’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김태훈이 말한 대로라면, 마신 정도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순간, 어떤 아이디어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 이걸 이용하는 거다!
나는 큰소리로 외치면서 -
“바알 님, 위험합니다! 저건 아몬의 부하인 홍염의 마녀입니다!”
블링크를 시전하여 바알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물론, 그전에 불카누스의 작업복 착용을 잊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불이 아닌 열기에 가까워서, 불카누스의 작업복이 제대로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연하게 눈에 보이는 불길의 형상이다.
‘저 모습도 그렇고, 힘이 좀 약해진 모양이군. 아니면 그 개연성? 섭리? 라는 것 때문에 제한받고 있거나.’
여기까지 생각한 직후, 마고의 불길이 내 전신을 휘감았다.
“크악!”
연기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뜨겁다! 왜 뜨겁지? 분명, 화염 내성이어서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데?
“아하하하! 내 불길에 스스로 뛰어들다니. 미쳤구나!”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지려 할 무렵.
“불…… 파멸의 불을 쓰다니. 그렇군.”
바알이 반응했다.
슉!
마고의 등 뒤에 나타난 그가, 양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확실히 네놈은 아몬이 보낸 자객이구나.”
펑!
바알의 검격은 마고가 만들어낸 불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불의 장벽도 단숨에 흩어져 사라졌다.
덕분에 나를 태우던 불길도 사그라졌다. 그만큼 바알의 검격이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리라.
“크윽…….”
레이저가 내게 다급히 달려왔다.
“어떡해! 화상이 심해요.”
“이걸…… 좀 뿌려줘요…….”
나는 하급 엘릭서를 여러 개 소환해 레이저에게 건넸다. 하급이라고는 해도, 치유 물약이 아닌 엘릭서를 써야 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네, 넷!”
레이저는 얼른 엘릭서를 받아 내게 퍼붓다시피 했다. 즉시 화상이 사라지며 새살이 돋았다.
그러는 사이, 바알은 마고와 본격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대마신 간의 신성한 전쟁인 마계 대전을 진행하는 중인데, 비열하게 자객 따위를 보내다니. 내가 아몬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아앙? 뭔 헛소리냐?”
빠직.
나는 좀 떨어진 데서도 바알의 관자놀이에 솟은 핏줄을 본 것 같았다.
마고는 자신과 무관한 얘기이므로 헛소리라고 한 거지만.
바알은 ‘신성한 전쟁인 마계 대전’과 ‘비열하게 자객 따위를 보내다니’라고 한 자기 말을 헛소리 취급한 걸로 받아들인 듯했다.
“헛소리…… 라고? 감히, 백 년에 한 번, 마계를 정화하는 마계 대전을 두고?”
나는 회복하자마자 얼른 바알의 뒤로 피하며 말했다.
“바알 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희까지 한꺼번에 제거하려고 진짜 자객을 뒤에 보낸 모양입니다.”
그런 내게 고르카의 감탄하는 귓속말이 들려왔다.
-와, 스캐빈저 님. 진짜 사악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