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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272화 (272/303)

272화

20부 : 마계 최후의 전투 (3)

김태훈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천사……?”

마신 이포스가 천사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다.

순백의 펑퍼짐한 로브에 두 쌍의 새하얀 날개, 머리 위의 금빛 고리까지. 누가 봐도 널리 알려진 전형적인 천사의 모습이다.

나는 김태훈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속지 마. 저거 원래 모습 아니니까.”

“아아, 그렇겠지. 그런데 저래도 되는 거야?”

“뭐가? 마신이 천사의 모습을 한 거?”

“엉.”

“안 될 건 뭔데.”

“그게, 그러니까 상도덕? 같은 게 있지 않나?”

“그런 게 어디 있어.”

듣고 있던 그레모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재미있는 인간이네.”

이포스는 나와 김태훈, 그레모리를 한번 매섭게 노려보더니, 구시온에게 쏘아붙였다.

“미친 거냐? 보라색 잠옷 거지야? 저 인간이 얼마나 위험한 놈인데,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자고? 애초에 여기 나타나서 그레모리를 끊어낸 의도가 불순하다는 생각은 안 드냐? 뇌가 청순해?”

천사의 모습으로 험한 말을 해대니, 그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엄청나다.

정작 목표가 된 구시온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무감정하게 대꾸했다.

“예의를 아는 인간이오. 약속도 어긴 적 없고.”

“그러니까 위험하지! 우리에 대해 불쾌하리만치 잘 아는 놈이라고.”

위계 22위인 이포스의 이명은 ‘어리석은 자의 귀공자’다.

언뜻 듣기에는 이포스가 어리석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쉬우나, 그가 빼어난 두뇌를 가졌으므로 어리석은 자들이 숭상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어지간한 존재는 모두 이포스보다 어리석다.

그런 만큼, 이포스도 방대한 지식과 정보망을 가졌다.

만약, 내가 세파시에서 소환하고 접촉하고 거래했던 마신들이, 어떤 원리에서인지 모두 게임 속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 마신이었다면.

이포스가 그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나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솔로몬의 마도서를 손에 넣은 이후부터, 마신의 약한 지점을 철저하게 공략하며 상대해 왔다.

꼭 전투에서의 약점이 아니라 소환한 마신이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들을 정확히 알고 거기에 따라 이용했다.

심지어 갑작스레 던전에서 직접 대면했던 무르무르까지, 그 특성을 파악하고 강림을 유지하는 변칙적 형태로 복속했다.

이포스에게 그런 내 행동이 곱게 비칠 리 없다. 김태훈이 내게 귓속말을 건넸다.

「어라, 저 천사 흉내 내는 마신은, 다른 것들과 다르게 널 싫어하네?」

「저건 머리가 엄청나게 좋거든. 의심도 바알 뺨치게 많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야.」

「흠, 그렇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김태훈이 말을 이었다.

「너, 저 보라색 잠옷 입은 마신하고는 친한 거지?」

「그레모리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그리고 잠옷 아니야. 로브지. 이름은 구시온이고.」

「그거나 저거나. 아무튼, 그럼 혹시 구시온이라는 마신도 그레모리처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냐?」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레모리보다 훨씬 어려워.」

구시온으로 하여금 아스모데우스와의 충성 서약을 철회하게 하려면, 눈에 보이는 대가가 필요하다.

그레모리가 바라는 것은 그녀의 마음에 든 인간 또는 마신의 피.

그리고 구시온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라면 어려웠을 거야. 아예 시도조차 못 할 만큼.」

공물 중에서도 보화다.

가치 있는 광물, 금과 보석, 고대의 무구 등. 뭐든 보물이 될 만한 물건을 바쳐야 한다.

「하지만 나는 예외야.」

「역시,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당연하지.」

다가오는 마신들의 면면을 확인한 순간.

일부러 그레모리를 중심으로, 이 구역의 마신들이 다 모이길 기다렸다.

그 가운데 어느 정도 완화지대 역할을 해줄 마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구시온에게 말을 걸었다.

“구시온 님. 혹시, 저와 손잡을 생각이 있는지요?”

곧장 이포스가 이를 갈았다.

“저것 봐, 저 새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헛짓거리를 하잖아.”

거참, 입이 험한 마신이네.

“마신을 상대로 잔머리 굴리는 놈. 맹독 같은 자식.”

듣고 있던 그레모리가 중얼거렸다.

“어마어마하게 인정받고 있구나, 스캐빈저 경.”

하긴, 명참모인 이포스가 저 정도로 경계하고 멸시한다는 뜻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한바탕 욕설을 퍼부은 이포스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수했구나. 다 잘 되니까 세상이 네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

그건 진짜 아닌데. 그러기는커녕 하는 일마다 꼬이는 기분이다.

일단, 떠들도록 잠자코 놔뒀다가,

“구시온을 소환하여 소원을 이룬 자는 드물게 있을망정, 제 편으로 끌어들인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곧바로 대꾸했다.

“근처의 성을 다 채울 정도의 보화를 바쳐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다! 응? 네놈…….”

이포스는 잠깐 허를 찔린 듯한 기색이다가, 괘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넌 지금 그레모리의 성 앞에 있지. 저 성이 어스에서 제일 큰 성은 아니나,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규모는 된다. 저 성을 보화로 가득 채우는 일은, 아스모데우스 님뿐만 아니라 바알이나 아몬도 못 할 거다!”

나는 구시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구시온 님. 어째서 아스모데우스의 세력에 가담한 거죠?”

구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일족이 아스모데우스 님의 가신 가운데 가장 핵심인 말 일족의 방계이기 때문이다. 너도 이미 만났던 벨레드 님과 무르무르를 포함하여, 무려 그 숫자가 열이나 된다. 그러니 나 혼자만 빠지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겠나.”

“흐음, 하지만 그레모리의 성 가득한 보화를 준다면요?”

구시온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들거렸다.

“실현 불가능한 빈말은 하는 게 아니다. 화를 부르기에 십상이니까.”

“그럼, 그렇고말고.”

이포스가 맞장구를 쳤으나, 구시온의 눈길은 집요하게 나를 훑고 있다. 짐짓 태연한 척하지만, 타고난 본성을 억누르진 못한다.

인간이 그렇듯 마신들도 저마다 근원적인 성질이 있다. 그 성질은 오히려 인간의 그것보다 더욱 바꾸기 어렵다.

인간은 교육이나 수도 등의 수단으로 교화되기도 하나, 마신은 애초에 섭리 안에서라면 거의 제멋대로 살아가는 존재다. 새삼 본성을 바꾸려고 시도할 리가 없다.

‘무르처럼 완전히 바뀐 환경하에서,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그리고 내게는 그런 보화가 있다.

바로, 세파시의 최고 단위만큼 지니고 있는 다크 스톤이 그것이다.

내 인벤토리 안에서는 2차원화 한 단일종의 아이템으로 분류되어, 한 칸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걸 다 꺼낸다면 서울시 면적을 다 채우는 것은 물론, 그만큼의 대지를 붕괴시킬 만큼 어마어마한 질량과 부피가 된다. 그레모리의 성 하나 정도 채우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고 다크 스톤이야말로 마신들이 가장 탐낼 보화지. 자기 힘과 직결되니까.’

다크 스톤을 이용, 구시온을 아스모데우스의 세력에서 빼낸다. 그런 뒤 구시온은 다크 스톤의 힘으로 강해져, 그만큼 아스모데우스 세력의 위협이 된다.

그레모리에 이어 유력한 마신 둘이 연달아 이탈하면 세력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 계획의 일부.

“줄게요.”

“뭐라고?”

“보화를 드린다고요. 저 성을 다 채울 만큼의 양으로.”

여기에는 그레모리도 살짝 당황했다.

“저, 스캐빈저 경. 잘 알겠지만…….”

“마신을 상대로 허언을 하면 안 된다는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으음, 알았어.”

눈이 반쯤 돌아간 구시온이 나섰다.

“그게 정말인가? 나를 떠보거나 조롱한 거라면, 아무리 너라고 해도 혀를 뽑아 버릴 테다.”

구시온은 망각과 감정의 마신인 동시에 모순의 마신이다.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면서도 어떤 마신보다 재물을 탐낸다.

겉으로는 초연한 듯 표정조차 잘 변하지 않으나, 조건만 들어준다면 언제든 입장을 바꿀 수 있다.

이제까지는 그 조건을 맞춰줄 수 있는 상대가 없었을 뿐.

“그레모리 님. 성안에 있는 수하들을 다 내보내시는 게 좋겠어요.”

“뭐야, 정말로?”

“제가 빈말 안 하는 거 아시잖아요.”

“응, 그렇지. 알았어. 다 나오라고 할게.”

“그리고 죄송하지만, 성안의 시설물들이 다 부서질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구시온 님이 저 성을 다 채울 정도의 보화를 얻는다면, 그중 극히 일부를 써서 내 성을 새로 지어주는 일 정도는 기꺼이 해주실 거야. 배포가 크니까. 그렇죠, 구시온 님?”

“……물론이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까워서 죽을 지경이고만, 뭘.

아무튼, 이미 답해버렸으니 구시온도 발뺌할 명분이 없다.

“좋아요. 그럼, 공물을 드리겠습니다. 구시온 님의 가신 계약을 해지하는 데 필요한 공물입니다.”

각각의 마신이 원하는 공물이나 조건은, 그 자체가 마력으로 구속하는 계약을 끊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예컨대 솔로몬의 마도서에 따르면, 강력한 마신인 발락의 계약을 바꾸는 데 필요한 조건은 ‘천 마리의 뱀’을 바치는 것.

발락이 이를 확인하는 순간, 기존의 계약은 저절로 철회되고 천 마리의 뱀을 바친 자와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된다.

구시온은 지금까지 계약으로 종속된 관계가 없었다. 승마 귀족이라는 일족의 명분에 얽매여 아스모데우스 밑에 들어가 있었을 뿐.

즉, 내가 그가 바라는 공물을 준다면 -

다크 스톤 소환, 유지!

나와 첫 번째의 주종 계약을 맺게 되는 셈인 거다.

‘개수가 아니라 시각을 통한 위치로 아이템을 소환하는 것도 처음이네.’

보통, 다크 스톤을 인벤에서 꺼낼 때는 개수가 기준이 된다. 5개면 5개, 10개면 10개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해서 언제 성을 다 채울지 알 수 없다. 하여, 다른 방식으로 꺼냈다.

위치는 그레모리의 성 바로 위의 상공.

방식은 내가 스톱할 때까지 소환 상태를 유지하는 것.

다수의 게임이 그렇듯, 버튼을 누르고 있거나 이동 상태를 유지하면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콰르르르르릉!

처음에는 한 개, 두 개씩 성안으로 떨어지던 다크 스톤이 폭포처럼 떨어져 내렸다.

성내의 홀과 광장을 채우면서 순식간에 쌓이는 게 밖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뭐야, 싯펄……. 말도 안 돼.”

마신 이포스는 경악한 와중에도 입이 험했다.

구시온은 눈을 부릅떴다. 탐욕에 젖어 있던 눈빛은, 어느새 점점 나를 향한 경외로 바뀌었다. 그가 나직이 뇌까렸다.

“마신으로서 나의 정의는, 변하지 않는 맹세와 그 맹세를 증명할 만한 부(富).”

그러니까 돈 많은 놈이 정의라는 소리다. 속물적이긴 해도, 알기 쉽고 확실해서 오히려 추상적인 걸 바라는 마신보다 낫다.

그 증거로, 같은 마신이라도 아가레스는 시큰둥하다. 어마어마한 양의 다크 스톤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걸 넘어서서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다크 스톤은 쉬지 않고 쏟아져, 어느덧 그레모리의 성 첨탑 위로 쌓일 지경이 되었다.

“너의 맹세를 증명하였으니 나 구시온은 저 공물을 받고, 너 스캐빈저를 따르는 계약을 맺겠다.”

“굿! 좋았어. 이정우 미친놈아!”

김태훈이 탄성을 질렀다.

일단 계획 하나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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