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20부 : 마계 최후의 전투 (8)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 하나를 깨달았다.
‘왜 이레네가 안 보이지?’
차원을 건너다니는 이레네에게는, 아스모데우스가 꼼짝 못 하게 된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그녀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을 터였다.
그렇다면 -
‘어째서인지 아스모데우스를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불길한 가설이 뇌리를 스쳤다.
‘아스모데우스가…… 이미 이레네에게 뭔가 했나?’
기잉!
허공에 이상한 진동음이 일었다.
동시에, 성벽에 닿을 만큼 두꺼워진 대지의 벽이 성벽과 한꺼번에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으헉!”
고르카가 기겁해서 바닥을 굴렀다. 그의 정수리 쪽 머리카락이 썩둑 잘렸다.
나는 레이저와 함께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면서도 생각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격노의 주인 외에도, 아스모데우스가 관장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가 그 별칭을 극도로 싫어해서 내가 입에 담지 않았을 뿐.
‘……색욕의 마신.’
제기랄, 그렇다.
성별이 있는 존재라면 아스모데우스가 발하는 색욕 제어의 권능을 견뎌낼 수 없다.
“아서, 위!”
나도 모르게 김태훈의 본명을 부르며 경고했다.
“응?”
아스모데우스의 눈에 막 귀혼을 찔러 넣었던 김태훈이, 서둘러 검을 빼내 위쪽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늦었다. 검을 안구에서 꺼내느라 늦어진 거다.
그리고 허공에서 나타난 이레네가 김태훈에게 검을 내리쳤다. 김태훈은 급한 김에 팔뚝으로 막았다.
쩡!
팔과 검이 부딪쳤는데 쇠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신의 잘린 오른손.’
나는 안도했다. 현재 김태훈의 오른쪽 팔뚝은, 신의 잘린 오른손이라는 건틀릿 아이템으로 대체되어 있다.
미스테리어스 갓 등급의 아이템으로, 사용자의 신체 일부로 변화되어 죽을 때까지 영구 귀속되는 물건이다.
오른팔이 베이거나 손가락이 잘려도 즉시 재생하는 ‘초월급 재생’ 옵션에, 오른손은 절대로 무기를 놓치지 않으며 추가 내구도가 부여되는 ‘검을 쥔 손’ 옵션까지.
미스테리어스 갓 등급에 걸맞은 아이템이다. 그게 김태훈을 살렸다.
“뭐야. 배신이냐?”
발끈한 김태훈이 이레네에게 반격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기에, 나는 서둘러 외쳤다.
“아냐! 아스모데우스의 권능에 조종당하는 거야?”
“응? 그렇다고 하기에는…….”
한 차례 검을 부딪치고 아스모데우스의 어깨로 뛰어 올라간 이레네의 모습이 이상하다.
“후, 후욱, 하아…….”
붉게 상기된 얼굴에, 연신 입술을 핥는 혀. 비비 꼬는 다리까지.
저건 영락없이…….
음, 뒷말은 생략하겠다.
“아아, 아스모데우스 님…….”
내 예상을 증명하듯, 이레네는 타서 일그러진 아스모데우스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마신급 악마한테도 먹힌다는 뜻이군.’
어쩌면 그레모리가 따라오지 않은 이유도 저 권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스모데우스에게 계약으로 종속된 것도.
“배신 맞는데?”
“조종당하는 거라니까. 아스모데우스는 색욕의 마신이기도 하거든.”
“색욕, 아하……. 잠깐. 그런데 레이저는 왜 멀쩡해?”
김태훈의 말대로, 레이저는 멀뚱하게 아스모데우스와 이레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뭔 짓이냐는 듯.
후웅!
그때, 한 차례 더 대기가 울렸다.
고르카가 다시 허겁지겁 엎드리듯 몸을 숙였다.
“다들…….”
눈을 번득인 레이저가 외쳤다.
“카르고, 그 반대예요!”
“어?”
“밑이라고!”
서 있던 류경재 총경은 그 말에 서둘러 뛰어올랐지만, 엎드린 자세이던 고르카는 반응이 늦었다.
쓰컹!
오싹한 소리와 함께, 고르카의 코에서부터 시작하여 뒤통수까지 깨끗한 수평선이 그어졌다. 최고 등급의 투구를 착용했으나 소용없었다.
“씨발, 내 치맥…….”
힘없이 중얼거린 고르카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고르카 씨…….”
고르카의 시신은 다른 악마들처럼 흩어져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진욱이나 최혜인이 그랬듯, 쓰러진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길, 여기서 데리고 나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모처럼 고르카도 결심해 줬건만.
고르카가 던전 과몰입 증후군에 걸린 것이며,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슬픔을 달랠 겨를도 없이, 2파, 3파가 계속해서 날아왔다. 레이저가 내 옆구리를 안고 말했다.
“정우 씨. 그냥 힘 빼고 내게 맡겨요.”
아무래도 레이저에게는 저 가공할 투명 칼날이 보이는 모양이다.
“레이저! 총경님도…….”
“카르고가 당할 때 손써뒀어요. 고르카는 너무 무거운 데다, 엎드리는 바람에 늦었지만…….”
슉! 파앗!
레이저는 허공을 밟듯 뛰어다니면서 다양한 높이로 날아오는 투명 칼날을 피했다.
그러면서 나를 옆구리에 끼고 남은 한 팔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듯.
“어? 어엇!”
그 움직임에 따라, 류경재 총경도 허공으로 튀었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가 했다.
‘아, 모노와이어구나!’
나는 비로소 레이저의 수법을 깨달았다. 그녀는 일대에 특기인 단분자 커터, 즉 실 형태의 모노와이어를 펼쳐둔 것이다.
그게 밀리거나 잘리는 것을 통해, 투명 칼날의 위치를 파악했을 테고.
류경재 총경에게도 방어구 틈에 모노와이어를 연결하여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다.
“총경님, 그냥 힘을 빼세요!”
“으음.”
류경재 총경은 내 말대로 즉시 전신의 힘을 뺐다. 그러자 정말 꼭두각시 인형처럼 되었다.
“컥!”
“으흠!”
레이저는 옆에 낀 나와 달리, 류경재 총경은 인정사정없이 다뤘다. 바닥에 마구 쓸리고 성벽에 튕겼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내가 말했다.
“레이저, 조금 더 부드럽게는…….”
“섬세하게는 못해요. 이런 식으로 응용한 것도 처음이라.”
“그렇지, 어렵겠죠?”
미안, 총경님. 조금만 참으시길.
“뭐, 잘리는 것보다는 낫죠.”
“그런데 대체 뭐가 날아오는 거죠?”
“초음파요. 대기를 진동시켜서 다양한 각도로 초음파를 날리고 있어요.”
비장의 무기라 이건가. 저거라면 혼자서 악마 군단 몇 개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사이 김태훈은 이레네의 개입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그냥 베어버리면 그만이나, 내 말에 따라 그녀를 해치지 못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그래도 이레네를 해쳐서는 안 돼. 그랬다가는 바알이 극대노할 테고, 작전 자체가 허사로 돌아간다…….’
결론은 아스모데우스의 본체를 최대한 빨리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다. 이러는 사이 다른 마신들과 그의 친위대도 몰려올지 모르니까.
김태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에잇, 성가시게!”
김태훈은 이레네의 연이은 공격에 밀려 떨어지는 척하면서, 허공에서 몸을 돌려 아스모데우스와 마주한 자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정수리에 귀혼을 박아넣은 뒤 -
“카르마가 다소 쌓여도 어쩔 수 없군.”
그대로 일도양단했다.
코드 무한(∞), 참격!
소리 없이, 아스모데우스의 몸이 세로로 깨끗이 쪼개졌다.
정수리에서부터 이마와 코, 턱을 거쳐 명치까지.
그 사이에서 시커먼 기운이 연기처럼 새어 나왔다. 마신과 악마들의 피와 같은, 검은 마력이다.
“꺄아악! 아스모 님!”
이레네가 절규했다. 이제 좀 적당히 정신 차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류경재 총경이 놀라 탄성을 질렀다. 그는 아스모데우스에게 몇 번이고 불길을 날렸고, 제독검으로 베기도 했다. 그래서 그 피부와 근육이 얼마나 질긴지 알고 있었다.
김태훈도 베기가 먹히지 않기에 찔러대기만 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종잇장처럼 잘렸다.
“무한 코드 때문이에요.”
레이저가 두려운 것을 보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무한 코드……?”
“네. 아서 님이 무한의 카발리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 저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재능. 모든 현상에, 짧지만 계속되는 무한을 부여하는 것…….”
레이저의 목소리에 경외심이 담겼다.
“정확하게 무슨 뜻이죠?”
레이저가 빠른 투로 해준 설명은 이랬다.
아서, 그러니까 김태훈은 어떤 현상을 무한히 계속되게 할 수 있다고.
예를 들어, 레이저가 모노와이어로 김태훈을 공격하려 한다. 그때, 김태훈이 자신과 레이저 사이의 공간에 무한을 적용하면, 모노와이어는 절대 그에게 닿지 못한다.
“무한히 이어지는 공간을 지나가야 하는 까닭이죠. 그러는 사이 저분은 다른 위치로 피해버리고요.”
“뭐야, 그게……. 무한이 아니라 무적이네요.”
“펼쳐지는 순간에는 무적이 맞아요.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지속 시간이 짧죠. 섭리는 어떤 존재에게도 무적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러면 지금 저건, 한번이 아니라 벤 자리를 무한히 벤 결과인가요?”
“맞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단숨에 벤 것 같지만, 사실 잘릴 때까지 무한히 벤 거예요.”
아스모데우스를 무한으로 베어낸 김태훈이 착지했다. 류경재 총경이 흥분해서 그에게 소리쳤다.
“대단해! 김태훈 기사, 마신을 잡았네!”
그런데 김태훈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손맛이 영 아니네…….”
“응?”
그 직후.
세로로 쪼개졌던 아스모데우스의 몸뚱이가 일제히 검은 연기로 변했다. 그리고 절단면의 하부를 향해 맹렬히 빨려 들어갔다.
그 자리에, 뭔가가 서 있었다.
비로소 그 뭔가를 본 류경재 총경이 놀라 움찔했다.
“뭐지? 마신의 몸속에 있었나?”
쾅!
순간, 김태훈이 재빨리 류경재 총경의 앞을 막아서면서 귀혼을 휘둘러 뭔가를 쳐냈다.
“그게 내성(內城 - 이중으로 쌓은 성에서 안쪽의 성) 그 자체였구만. 미친…….”
나는 그 말을 이해하고 아연해졌다.
“그러니까, 그 거대한 몸뚱이가 아스모데우스의 본체가 아니라…….”
“성이었네요. 마력으로 만든.”
레이저도 황당하다는 투로 내뱉었다. 크래커인 그녀도 이전까지 마신을 상대로 직접 싸운 경험은 없는 듯했다.
“대단하구나.”
거체 안에서 나온, 아마도 진짜 아스모데우스로 짐작되는 존재가 말했다.
“내성을 부수고 나를 드러낸 것은 너희가 두 번째다. 오백 년 만이로군.”
아니, 댁이 대단한데요.
마력이 얼마나 넘쳐나면 그런 거대 인형 옷 같은 유기체를 만들 수 있는지. 심지어 자체적인 의지도 있어 보였는데?
“아스모 님!”
이레네가 사라졌다가 아스모데우스의 옆에 나타났다.
“첫 번째는 이 아이의 아비였지.”
아스모데우스는 묻지도 않은 TMI를 하면서 이레네의 허리에 가볍게 팔을 둘렀다. 그것만으로도 이레네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려고 했다.
“하, 하아……!”
“바알이 알면 또 나를 베려고 들겠군. 딸에게 무슨 짓거리냐고.”
거인 형태의 내성 안에서 나온 존재는, 금관을 쓴 미청년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키는 오히려 보통보다 살짝 작아 보였다. 한 170센티미터 전후?
허리까지 내려오는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무저갱처럼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작은 체구에 긴 머리, 아름다운 외모 때문인지 미녀처럼도 보인다.
어째 대마신이라는 것들은 죄다 꽃미남이냐? 혹시 원래는 천사였기 때문인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제안해보았다.
“아스모데우스 님. 대마신답게 정정당당히 싸우시지요. 인질은 풀어주십시오.”
“인질?”
아스모데우스는 이레네의 등을 가볍게 쳐서 그녀를 앞으로 밀어냈다.
“하앙!”
그러자 비틀 몇 발자국 밀려났던 이레네가, 재빨리 되돌아가 다시 아스모데우스에게 달라붙었다.
“저를, 버리지…… 마세요, 아스모 님…….”
“자, 누가 인질이지?”
“…….”
저거, 혹시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일종의 페로몬 같은 건가? 접근하기만 해도 이성은 이성이 날아가 버리는 거야?
‘아, 라임 좋았다…….’
그리고 조금 부러운 권능이기도.
“자, 다시 싸워볼까? 거추장스러운 내성도 사라졌으니.”
한 발 앞으로 나서던 아스모데우스가, 별안간 눈에 이채를 발했다.
“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