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20부 : 마계 최후의 전투 (13)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실감이 안 났다. 실감 나기는커녕 기쁘지조차 않았다.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집이 아니다. 그 집에는 부모님도, 여동생도, 하다못해 반려동물 - 은 아닌가. 아무튼, 무르조차 없다. 그런 곳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쨌든 뭔가 끝났다는 안도감 비슷한 기분은 들었다.
특히, 류경재 총경의 반응을 보니 더 그랬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중얼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해냈군. 타워형 던전을 공략했어. 충분한 데이터를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됐네. 이게 다 자네 덕이야, 이정우 군.”
“아닙니다. 먼저 간 동료들 덕이죠.”
“그건…… 그렇군.”
그래, 조금 심술을 부렸다. 들떠 있는 류경재 총경을 보자니 어쩐지 거슬려서.
워낙 초대형 던전이어서인지, 퀘스트 정산에 잠시 로딩 시간이 있었다. 그런 뒤 보상이 제시되었다.
<보상 : 하이퍼 메모리 리더기>
응? 달랑 이게 끝?
한 달을 개고생하고 친구와 동료를 거의 다 잃었는데, 무슨 메모리 리더기 하나가 끝이라고?
김태훈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거의 충격 받은 얼굴로 말했다.
“리더기를 준다고……? 진짜야? 하지만, 리더기는 어차피…….”
“무슨 얘기야, 형?”
“아니, 아니야. 이 보상은 뭣하면 거절해도 돼. 그럼 아마 다른 것을 제시할 거야.”
“흐음, 그럴까…….”
그러기에는 김태훈의 말투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자연스럽게 힌트를 주는 척하면서, 내가 거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러다 퍼뜩 뭔가가 떠올랐다.
“하이퍼 메모리.”
“뭐?”
“나한테 있었어. 전에 다른 퀘스트의 보상으로 얻은 하이퍼 메모리. 이 리더기는 아무래도 그 내용을 확인하라는 것 같네.”
“……하지만 리더기를 입수해도 어차피 내용을 볼 수 없어. 출력할 디스플레이가 없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하이퍼 메모리 리더기를 보상으로 택했다. 내 손에 나타난 리더기를 본 김태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끙 하고 소리를 냈다.
류경재 총경은 작은 볍씨 같은 것을 받았다.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둘러싸인 씨앗이다.
“내 보상 목록에는 이것뿐이었네. 불의 정수라고 하더군. 어엇?”
말끝에 그가 당황한 이유는, 불의 정수가 손바닥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 봤지? 분명히 여기에…….”
“네, 봤습니다. 총경님. 그리고 축하합니다.”
“응? 뭘…… 어라, 왜 이렇게 몸이 뜨겁지?”
“좋은 현상입니다. 놀라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가부좌를 틀면 더 좋고요.”
“음, 알겠네. 가부좌라…….”
곧, 류경재 총경은 정석 그 자체인 가부좌를 취했다.
“내게는 아주 쉬운 일이지.”
맞아, 저 사람 불자였지…….
그나저나 불의 정수(精髓)라.
이름 그대로 가장 순수한 불의 결정체다.
이 던전의 관리자 - 아니, 그 무지막지하고 무례한 놈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던전 시스템을 구축한 누군지 모를 이를 가리키는 거다.
아무튼, 그는 어쩐지 류경재 총경을 편애하는 것 같다. 아니면 심성이 정의로운 자를 선호하나?
그만큼 불의 정수는 대단한 아이템이다. 미스테리어스 갓 등급의 소모성 아이템이며, 그걸 흡수한 자를 불 그 자체로 만들어준다.
겉모습이나 다른 성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불의 강점만 고스란히 지니게 된다.
예컨대 이제 같은 불에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음만 먹으면 흡수한다.
또 불 속성 스킬의 성능도 수십 배로 올려줄 터이니, 류경재 총경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보상이다.
세파시 게임에서도 가장 희귀한 소모성 아이템 가운데 하나였다.
‘하긴, 던전의 난이도와 소요 시간을 고려해보면 그럴 만했지.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의 기사가 되겠네.’
레이저에게는 아무 보상도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우리 파티원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 던전에 속한 존재나 마찬가지니까 당연한가. 같은 이유에서 이레네도 마찬가지다.
“음, 그럼.”
나는 하이퍼 메모리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리더기의 슬롯에 삽입했다.
하이퍼 메모리라고는 해도 외양은 흔하게 쓰던 USB 메모리 카드와 비슷하다.
다만, 김태훈의 말에 따르자면 용량은 그 수천만 배에 달한다는 모양이다. 왜 그렇게 큰 용량이 필요한지 모르겠으나, 용량은 클수록 좋으니까.
내가 메모리를 꽂는 모습을 본 김태훈이 말했다.
“거봐. 내용을 확인할 수 없잖아.”
“그거 말인데, 이 단자를 보니까 연결되는 게 있을 것 같아.”
“응?”
하이퍼 메모리 리더기는 상단에 홈이 파인 금속 직육면체였다. 전면부에는 하이퍼 메모리 카드의 슬롯이 있고, 상단 홈 안쪽에 특이한 형태의 돌기가 있었다.
그 돌기의 모양이 어쩐지 익숙했다. 그리고 어디에서 봤는지 곧 떠올랐다.
전뇌 태블릿.
정식 명칭은 ‘초월급 매니저의 태블릿’이라는 우스운 이름으로, 내 나이트기어이기도 하다.
그 태블릿의 측면에 있는 슬롯이 돌기의 형태와 같았다.
나는 태블릿을 옆으로 눕혀, 하이퍼 메모리 리더기 상단의 홈에 부착했다.
철컥.
아니나 다를까. 태블릿의 슬롯은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홈 내부의 돌기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오오?”
“잠깐, 정우야. 이건 돌아가서 찬찬히 보는 게…….”
김태훈은 이상하게 자꾸 나를 만류하려 들었다.
“돌아가면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아. 그리고 여기서 재생이 된다는 건, 지금 보라는 뜻이지.”
나는 그를 뿌리치고 태블릿 화면 재생을 계속했다. 김태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태블릿 화면에 로고 하나가 떠올랐다.
“응?”
어째서인지 매우 익숙한 로고.
“어어?”
심지어 장대하게 울리는 배경 음악까지 같다.
『 W-D-S 』
-주식회사 글로벌 테크-
WDS. 즉, World Destruction Simulation(세계 파멸 시뮬레이션)이다.
아아, 그립다 - 가 아니라!
이게 여기서 왜 나오지?
분명, 아직 출시되려면 멀었을 텐데? 애초에 현재의 기술로는 만들기 불가능한 게임이다.
나는 홀린 듯 화면의 로고를 터치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자 메모리 카드의 내용이 나타났다.
-하이퍼 메모리 최신 버전 확인.
버전 7.0 업데이트
1) 소장한 것만으로 플레이 데이터 실시간 저장.
2) 호환성 확장으로 호환 가능 차원 2,788,900개로 증가.
3) 캐릭터 복구시 사망 직전까지의 기억 데이터 완벽 보존.
아래는 세계 파멸 시뮬레이션 전용, 캐릭터 세이브 파일 백업입니다.
1) 최혜인 (레벨 85 / 아처 서포터)
2) 이진욱 (레벨 78 / 스피어 마스터)
3) 이혜림 (레벨 42 / 서번트)
4) 손태준 (레벨 94 / 실드 마스터)
5) 이용한 (레벨 28 / 엔지니어)
6) 김희숙 (레벨 26 / 던전셰프)
7) 이정아 (레벨 32 / 테이머)
8) 조설아 (레벨 90 / 격투가)
9) 차윤성 (레벨 92 / 소드 힐러)
이건…….
모두 내가 아는 이들이다.
타워형 던전에 들어왔다가 전사하거나 희생된 이들의 이름.
친구, 동료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이름도 있다. 이용한은 아버지고 김희숙은 어머니다. 여동생 정아도 있다.
어째서 이 사람들의 이름이 세이브 데이터에? 게다가 -
-백업 파일을 읽어오려면 원하는 캐릭터를 터치하십시오.
이런 문구가 맨 아래에 있다.
나를 유혹하듯이 점멸한다.
백업 파일을 읽어온다는 건, 그러니까 설마 -
‘되살아난다는 뜻인가?’
아니, 잠깐. 그 전에.
어째서 이들이 데이터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는 거지?
세이브 데이터를 읽어오면 되살아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이러면 꼭 고르카의 말이 사실 같잖아.
‘그러고 보니 고르카의 이름만 없어.’
그 이유는, 그가 정말로 플레이어이기 때문인가?
레이저가 나에게 나직이 말해온 건 그때였다.
“정우 씨. 아서 님의 상태가 이상해요. 정우 씨를 향한 공격 징후가 보여요.”
“……?”
나는 무슨 소리인가 하고 흠칫 고개를 돌렸다가, 김태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입을 열었다.
“역시, 멀린이라고 해야 하나.”
“…….”
“대단해. 좀 특이한 형태의 아이템인 줄 알았더니. 디스플레이 시스템은 또 언제 갖춰둔 거야?”
말하면서,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옆구리의 검병에 가볍게 손을 얹고.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류경재 총경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 그러나? 다 끝난 마당에 싸우기라도 하는 건가?”
“비켜, 총경. 캐릭터 주제에 인간인 척하지 말고.”
“……무슨 소리지?”
“아, 그렇군. 어차피 죽어도 저장되겠네?”
말하자마자 김태훈은 주저하지 않고 귀혼을 휘둘렀다. 진심으로 류경재 총경을 죽이려는 공격이다.
퍼석!
류경재 총경의 몸통이 둘로 나뉘었다.
“……!”
그리고 곧바로 붙었다.
나는 똑똑히 봤다. 귀혼에 절단됐던 그의 몸 사이에서 불길이 일더니,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
“허엇.”
김태훈도, 류경재 총경 본인도 놀랐다. 김태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또 뭐냐. 멀린, 마신들도 그렇고, 대체 캐릭터를 어디까지 업그레이드한 거야?”
자꾸 나보고 뭐라고 하지 마. 난 이들이 캐릭터라는 것조차 몰랐으니까.
얼떨떨하게 제 몸을 내려다보던 류경재 총경이 고개를 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네만, 김태훈 군. 자네, 혹시 이정우 기사를 해치려는 건가?”
“해치는 게 아니야. 죽여서 리셋하려는 거야.”
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나를 죽여서 리셋시키겠다고?
그러니까, 리스타트를 강제 발동시키겠다는 뜻인가?
류경재 총경이 혀를 찼다.
“어쨌거나 이정우 기사를 죽이겠다는 뜻이군.”
“그래, 그렇게 됐어. 하이퍼 메모리 데이터를 읽어오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자네도, 공략 내내 좋은 동료였지. 나의 예상보다 훨씬.”
화르륵!
류경재 총경이 제독검을 소환했다.
“하나 이정우 군을 해치려 든다면 막을 수밖에 없네.”
제독검은 평소보다 훨씬 흰 빛이 강한 불길을 뿜어냈다. 그 불길을 김태훈이 힐끔 보았다.
“백염, 1200도 이상이라는 건가. 성가시게 됐네. 뭐, 그렇다고 해서…….”
팟!
“날 막을 수 있을까?”
직후, 김태훈이 움직였다. 정확하게는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펑!
그러자마자 류경재 총경의 흉부에 구멍이 뚫리면서 불똥이 튀었다. 총경은 잠깐 비틀거렸으나 구멍은 금세 메워졌다.
“소용없다!”
류경재 총경은 외침과 함께, 사방으로 불꽃을 퍼뜨렸다.
제독검 십이식, 화염무!
그를 중심으로, 주먹만 한 불덩어리가 눈보라처럼 몰아쳤다.
눈보라와 불은 상충하는 이미지지만, 이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마침, 불덩어리의 색이 푸르스름한 빛을 띤 흰색이어서 더 그랬다.
‘와, 저게 화염무라고?’
내가 알던 것과 아예 다른 기술처럼 보인다. 이전에는 좀 더 큰 불덩어리 서너 개를 연속으로 쏘아내는 정도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했지만.
과연, 저거라면 김태훈이 아무리 빨라도 피할 수 없겠네.
‘그리고 나도!’
나는 얼른 방어구를 불카누스의 작업복으로 교체하고, 레이저에게도 같은 것을 착용시켰다.
다만, 이번만은 김태훈에게 주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적으로 돌변했으니까.
그래, 김태훈이 적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음식을 나눠 먹고 잡담하던, 여기까지 목숨 걸고 함께 온 친구가.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에서 사랑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 사실을 실감하자, 가슴 안쪽이 고통으로 찌르르 울려왔다.